• 北대외연락부(現 225국), 통혁당-민혁당 지도조직 
      
    김필재    
      
    [1] 북한의 '대외연락부'(現225국, 대남공작조직)는 남한 내 親北 조직(지하당 포함)을 유지·확대하고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침투하는 간첩을 관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대외연락부 소속의 대표적인 공작원으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들 수 있다. 
    ▲남한출신으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오른 거물간첩 정경희
    ▲1992년까지 지하당 남조선로동당을 만들어 김낙중 등을 관리하다 북한으로 도주해 2000년 사망한 이선실
    ▲1995년 10월 24일 부여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검거된 ‘부여간첩’ 김동식
    ▲15대 대선직전 적발 체포된 ‘울산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자살)
    ▲1998년 12월까지 反국가단체인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을 지도하다 여수 앞바다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북한으로 돌아가던중 해군 광명함의 포격을 받아 사망한 대외연락부 5과장 윤택림

    현재 대외연락부는 前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이었던 김일성의 외오촌 조카 강주일(본명 강관주)이 총괄하고 있다. 강주일은 김정일의 ‘수족’으로 불릴 정도로 김정일과 밀착관계에 있었다.(2004년 2월22일 보도)


  • [2] 4·11총선 진보당 비례대표 당선자인 李石基(이석기) 씨는
    反국가단체인 <민족민주혁명당>(이하 민혁당) 해체 이후 북한의 지령을 받아 활동한 하영옥의 지시로 조직 재건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민혁당은 김일성이 1927년 중국의 길림에서 조직했다는 청년혁명조직인 <반제청년동맹>을 사상적으로 계승했다는 조직이다. 1992년 김영환, 하영옥, 朴 모 씨 등은 반제청년동맹을 계승해 종북(從北) 지하당인 민혁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1997년 총책 김영환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들이 북한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서 민혁당 해체를 선언했다.
     
    민혁당 사건 판결문에 따르면, 1997년 민혁당 해체 당시 경기남부위원장이던 이석기(李石基) 씨는 민혁당 해체 선언 이후 하영옥(서울대 법대 82학번)을 중심으로 조직 재건에 나섰다. 李 씨는 하영옥에게 경기남부뿐만 아니라 영남위원회 조직까지 책임지는 임무를 받았다. 민혁당은 1997년을 기점으로 조직이 二分化(이분화)되는데, 李 씨는 사상적 전향을 거부하고 북한의 지도에 충실한 후기 민혁당에서 더 큰 중책을 맡게 됐다. 이후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상적 전향 여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李 씨는 또 민혁당을 이탈한 후배 朴 모 씨를 만나 “조직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는데 알고 있느냐, 조직 내부에 사상적으로 변절한 사람들(김영환 등)이 있어 전부 제명시켰다. 제명된 인간들이 마치 조직의 중앙위원인양 행세하며 많은 동지들을 이탈시키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李 씨는 김영환 등이 민혁당을 이탈하면서 북한 추종주의를 명확히 비판했지만 “북한을 추종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면서 오히려 이 문제를 사상적으로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하며 박 씨에게 말했다고 한다. 李 씨는 민혁당 해체를 인정하지 않은 하영옥과 함께 활동하다 1999년 민혁당 사건이 발표되자 지하로 잠적, 3년 동안 수배생활을 했다.
     
    李 씨는 2002년 5월 공안당국에 의해 검거되어 구속됐다. 그는 법정에서 징역 2년6월이 확정된 상태로 복역하다가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3년 8·15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이후 그는 인터넷매체 <민중의 소리> 이사 및 <사회동향연구소> 대표 등을 맡아왔다. 진보당 내 민혁당 사건 연루자로는 李 씨 외에 이의엽 정책위의장이 있다.
     
    이의엽 의장은 민혁당 사건으로 2000년 9월 구속됐다. 2001년 출소 이후 부산에서 노조교육, 조직사업을 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부산 금정구에서 민노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으며, 2010년 민노당 정책위의장을 맡았다. 운동권 출신의 하태경 前 열린북한방송 대표(4·11총선 새누리당 당선자)와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최근 라디오와 좌담회에서 이석기, 이의엽 씨 등을 거명하며 이들이 민혁당과 연계되어 있었던 사실을 밝힌 바 있다. 

    [3] 전향한 거물간첩 金用珪(김용규)씨는 자신의 저서인《소리없는 전쟁》과 《時效人間》을 통해 통혁당 조직이 북한 노동당의 주도로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金씨는 두 책에서 “통일혁명당은 1961년 12월, 전남 무안군 임자도에서 면장을 지냈던 지방유지 최영도가 甥姪(생질)인 남파 공작원 김수영에게 포섭되면서 시작됐다”고 밝히고 있다.

    최영도는 세 차례에 걸쳐 평양을 다녀오면서 노동당에도 입당을 한다. 전남도당 책임자가 된 최영도는 지하당 조직망을 확산하는 한편 과거 남로당에서 전남도당위원장직을 맡았다가 수사기관에 체포돼 10년형을 살고 나온 정태묵을 다시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북한은 최영도의 조직을 전라남도 지도부의 正(정)조직으로, 정태묵의 조직은 후보조직으로 이원화시켜 관리하며 조직을 확산해나갔다. 노동당 연락부로부터 서울의 유력 인사를 포섭하라는 지시를 받은 최영도는 생질인 김수영을 내세워 김종태(金鍾泰)를 포섭하기로 한다.

    反정부 감정을 갖고 있던 金鍾泰는 오히려 본인이 더 적극적으로 북쪽과 선을 닿게 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포섭은 쉽게 이루어졌다. 평양으로 밀입북한 金鍾泰는 간첩교육을 받는 한편 김일성(金日成)과 만나기도 했다. 간첩 교육을 받은 후 다시 남한으로 돌아온 金鍾泰는 김질락, 이문규, 이진영, 임진영 등 친척, 친우 등 측근들을 손쉽게 규합해 통혁당 서울시 지도부를 구성했다. 金용규씨는 자신의 책에서 북한이 통혁당 재건을 위해 계속 공작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1973년 7월에는 자신이 직접 통혁당 재건 공작계획에 참여했다는 사실도 함께 적고 있다. 포섭대상은 과거 金鍾泰와 연계되었던 인물들이었다.

    통혁당 재건 계획과 관련해 金씨는《소리없는 전쟁》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는 북한의 공작망이 우리 사회 어느 곳까지 깊게 뻗쳐 있는지를 아래와 같이 밝혔다.

    “이렇게 두 사람이 낮과 밤을 이어 지시문을 모두 해독하고 보니 그것은 그동안 평양의 공작팀들이 각각 관리하고 있던 일부 현지조들과의 접선암호와 특정 조직원들의 기록 대장이었다. 기록대장에는 발전소, 전신전화국 등 요충부문에 점 형태로 특별 관리하던 개별적 대상도 있었고, 2∼3명 또는 4∼5명으로 구성된 조직도 있었다. 그 중에는 최근에 구성된 조직도 있고, 1960년대 초·중반에 布置(포치)된 교수와 박사들로 구성된 조직, 언론계·종교계·공공(公共)기관, 그리고 각 단체에 뿌리박은 조직들도 있었다.”

    김필재(金泌材)spooner1@hanmail.net

    [관련기사] 한명숙 연루 '통혁당' 지도이념은 '주체사상(主體思想)'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45010&C_CC=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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