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국을 內亂으로 몰고간 선동가들 
      
     수카르노, 아옌데, 페론의 경우
    배진영   
     
     건국 초기부터 시작된 軍部와 공산당의 대립 
        
      1945년 8월17일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선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운동을 펼쳐왔고, 전쟁 중에는 일본군 점령당국에 협력했던 아흐메드 수카르노가 대통령이 되었다. 新生 인도네시아에 대한 宗主權을 계속 유지하려는 네덜란드와 한 편에서는 협상이, 다른 한 편에서는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공산주의자들은 성급하게 자신들의 권력욕을 드러냈다.

    1948년 8월 1920년대 초기 인도네시아 공산당(PKI:Partai Komunis Indonesia) 지도자의 하나였던 무소가 그해 8월 소련으로부터 귀국하자, 인도네시아 내부의 左翼 세력들은 무소를 중심으로 집결했다. 이들 가운데는 1960년대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는 아이디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고무된 左翼 세력들과 軍內 좌익 동조자들은 1948년 9월 중순 마디운市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수카르노 정부는 이 반란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이 공산반란은 8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고 진압되었다. 무소, 샤리푸딘 등은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총살당했으며, 한동안 공산당은 숨을 죽이게 되었다(공산당은 1952년 이후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인도네시아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아 정식으로 독립하기도 전에 발생한 공산반란으로 軍部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불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은 국민전체의 이익보다는 계급의 이익을 우선하는 자들로 비쳤던 것이다. 이와 함께 軍內 좌익 세력들을 대상으로 한 肅軍(숙군) 작업이 단행되면서, 인도네시아軍은 정치적으로나 지휘체계면에서 통일된 조직으로 再정비되었다.

      마디운 반란은 인도네시아의 완전 독립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 정부가 親共的이라고 선전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西方 세계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는데, 마디운 반란 진압으로 수카르노 정부는 그런 혐의를 벗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무렵 베트남의 胡志明(호지명)은 자신의 공산주의 성향을 감추지 않은 결과, 미국이 對공산권 포위의 일환으로 베트남 문제에 개입, 남북으로 분단되며 길고 긴 전쟁을 겪게 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국민 신뢰 받는 군부 
     
      1948년 11∼12월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한 최후의 공세를 펼쳤다. 이미 국제적 대세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승인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던 수카르노 등 文民 정치인들은 일시적으로 네덜란드軍의 포로가 되는 것을 감수했다. 그러나 軍部는 중앙 정부가 붕괴된 상황 속에서 끈질긴 게릴라戰을 전개했다. 이 와중에서 서부 자바에서 실리왕 사단을 지휘했던 나수티온은 軍部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떠올랐다.
      젊은 수하르토 중령은 1949년 3월1일 족자카르타 탈환전을 성공으로 이끌어 武名(무명)을 떨쳤다. 이 시기 軍部는 성공적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함으로써 독립 후 국민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상당한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이러한 軍部의 항전과 유엔과 미국 등 국제사회의 지원에 힘입어 인도네시아는 1950년 8월17일 정식 독립국가로 출범하게 되었다.
      독립을 쟁취하기는 했지만 1950년대 인도네시아는 경제난·빈곤·지역분리주의·지역갈등 등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 서구의 제도를 모방한 의회민주주의가 실시되었지만, 정국은 좀처럼 안정되지 못했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1945년 마련된 임시 헌법에서 강력한 권한을 보장받았다가, 여러 정파들의 반발로 1950년 헌법에 의해 권한의 상당 부분을, 수상을 우두머리로 하는 내각에 넘겨 주어야 했던 수카르노 대통령과 내각의 불화였다.
      자신의 권한을 되찾기 위해 수카르노는 서구식 의회주의 대신 대중에게 의존하는 정치를 시작했다. 1956년 10월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는 서구 선진국가들과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조건이 다른 인도네시아의 실정에는 맞지 않는 것이라면서 「敎導(교도)민주주의」를 제창했다. 인도네시아의 마을 공동체 회의에서 長老들이 주민들 사이의 토론을 지도, 조정하면서, 민주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전통을 국가 운영에 援用(원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체였다. 
        
      「敎導민주주의」는 대통령 권력 강화 위한 「트로이의 木馬」 
        
      물론 국민들을 「敎導」하는 것은 수카르노 자신이어야 했다. 「敎導민주주의」는 수카르노가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으로 복귀하기 위한 「트로이의 木馬」였던 셈이다. 수카르노의 政體 변경 기도는 대통령에의 권한 집중이 지방자치의 약화를 가져올 것을 걱정하는 지방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수카르노는 계엄령을 선포, 이러한 반발을 억눌렀다.
      1959년 2월 수카르노는 제헌의회(건국후 첫 헌법을 만드는 의회가 아니라 새 헌법을 만들기 위한 임시 기구임─필자 注)를 소집,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1945년 헌법의 부활을 요구했지만, 제헌의회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수카르노는 같은 해 7월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非합법적으로 대통령 포고를 통해 1945년 헌법의 부활을 선언했다. 8월17일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의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서 「혁명의 길」로 돌아간다고 선언했다.
      이와 함께 수카르노는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주의(Nationalism)·종교(Agama·이슬람교)·공산주의(Komunisme) 세력의 대동단결을 기치로 한 나사콤(NASAKOM) 체제를 천명했다. 공산당이 다시 인도네시아 정치의 한 軸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공산당의 再등장은 軍部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통령 권한의 강화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州지사 任免權(임면권)·국민협의회(MPR:인도네시아의 최고 통치기구, 유신 헌법 하의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유사) 의원 任免權·정당 해산권 등을 손에 넣은 수카르노는 1960년 3월 의회를 해산했다. 대신 수카르노는 자신이 임명한 공산주의자·직능 대표들로 구성되는 「협동의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제 인도네시아에서는 선거에 의해 구성된 국가기구는 사라지게 되었다. 반대 정당들이 해산되고, 비판적인 언론사는 문을 닫았다. 1963년 수카르노는 꼭두각시 의회에 의해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수카르노는 가난한 국민을 물질적 富가 아니라 환상적·상징적 富로 부양하려고 했다(리처드 닉슨 - 「지도자들」). 국민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수카르노는 맹목적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정책을 썼던 것이다. 
        
      환상적·상징적 富로 국민을 부양하려 한 수카르노 
      
        그 첫 번째 표적이 된 것은 舊식민 종주국이었던 네덜란드였다. 수카르노는 그 때까지 네덜란드領으로 남아 있던 西이리안(Irian Jaya) 倂呑(병탄)을 주장하고 나섰다.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방(이때까지 인도네시아는 英연방처럼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방을 형성하고 있었다) 해체, 네덜란드人에 대한 特權 폐지, 네덜란드에 대한 채무 이행 거부 등의 조치가 시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카르노는 그의 천부적인 연설 솜씨를 발휘하여 대중을 선동하였다. 1957년 12월 西이리안 문제에 관한 네덜란드와의 협상이 결렬된 데 분노한 군중들이 네덜란드人 소유의 기업들을 공격했지만, 수카르노는 이를 방관했다. 15억 달러 상당의 네덜란드人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 와중에서 4만6000명 이상의 네덜란드人과 네덜란드-인도네시아 혼혈인들이 인도네시아에서 황급히 탈출했다. 이때 숙련된 기술자들과 경제인들이 많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인도네시아 경제는 더욱 나빠지게 되었다.
      수카르노의 과격한 反네덜란드 정책이 가져올 후유증을 우려하고 있던 자유민주주의 성향의 정치 세력들은 공산세력을 배제하는 새로운 정부 수립을 수카르노에게 요구했다. 이 요구가 거절당하자 그들은 1958년 2월15일 중부 수마트라와 북부 술라웨시 지역을 기반으로 「인도네시아 공화국 혁명정부(PRRI)」의 수립을 선언했다.
      이 반란을 진압한 나수티온은 「軍部가 국토방위뿐 아니라 정치·사회적 역할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드위풍시」(Dwifungsi), 즉 「軍部의 二重 기능」으로 불리게 되는 이 구상은 이후 인도네시아 정치의 일부가 되었다.
      수카르노의 두 번째 표적은 이웃한 말레이시아였다. 東南亞의 覇者(패자)였던 古代 인도네시아의 수리비자야 왕국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음일까? 수카르노는 말레이시아 연방의 독립에 한사코 반대했다. 1963년 9월 말레이시아가 독립한 후 수카르노는 말레이시아를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괴뢰」로 매도했다. 수카르노의 反말레이시아 정책은 反英·反서방 정책으로 이어졌다.
      사실 1955년 4월 반둥에서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를 개최, 「非동맹 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로 떠오를 때만 해도 수카르노의 외교 정책은 특별히 反서방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수카르노는 非동맹국가들 가운데 급진좌경국가 및 공산국가들을 「신생국가들(NEFOS:New Emerging Forces)」이라고 칭하면서 이들 국가와 新식민주의·제국주의 국가들 및 그 走狗(주구)국가들은 영원히 대립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이 대립에서 신생국가들의 승리를 위해 「자카르타-프놈펜-北京-평양」軸線(축선) 구상을 내놓았다. 
      
        쿠데타軍, 장성들의 시체를 토막내 연못에 던져 
        
      수카르노의 외교정책은 소련과 중국(중공)으로의 접근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수카르노가 이들로부터 얻어낸 원조는 민생이나 경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립경기장 건설 등 상징 조작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건강이 악화된 수카르노가 중국 의료진에 의존하게 되면서 인도네시아의 親共·親중국 노선은 더욱 강화되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당수 아이디트는 1962년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했다.
      공산당의 대두는 軍部와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가져왔다. 유일神 알라를 섬기는 이슬람의 입장에서 공산주의의 無神論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300만명의 당원을 일컫는 非공산권 최대의 공산당인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親中 노선은 인도네시아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華僑(화교)들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인도네시아人들의 민족감정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건국 초기부터 공산당과 앙숙이었던 軍部, 특히 육군은 수카르노가 1965년 5월 기존의 육·해·공·경찰 군 외에 제5군으로서 「勞農민병대」 창설 방안을 내놓자 격렬히 반대했다.
      軍部·이슬람·공산당 세력들은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서로 다른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었다. 대체로 軍部는 右翼 국민당과 관료기업가층을, 이슬람 세력은 상공업자·地主·富農층을, 공산당은 노동자 계층을 대변하고 있었다.
      1965년 9월30일 밤 대통령 친위대 제1대대장 운퉁 중령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자카르타 인근의 두 개 대대와 할림 공군기지의 공군병력, 그리고 무장 공산주의자 등 2000여 명이 이 쿠데타에 참가했다. 이들은 軍部 내 강경 反共주의자인 나수티온 국방치안 장관 등 7명의 軍 고위 장성들을 습격했다.
      야니 육군장관 등 세 명의 육군 장성들이 자택에서 피살되었다. 다른 세 명의 육군 장성은 쿠데타軍의 본거지 할림 공군기지로 연행되었다. 이들은 기지 내에 있던 여성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살해되었으며, 토막난 이들의 시체는 기지 내 연못에 던져졌다. 나수티온은 가까스로 자택에서 탈출했지만, 그의 부관과 딸이 쿠데타軍에게 목숨을 잃었다. 
        
      국민들의 反共궐기 
        
      쿠데타 소식을 접한 수카르노는 유사시 탈출에 용이하다는 생각에서 할림 공군 기지로 달려갔다. 여기서 쿠데타 주모자인 다니 공군 장관과 수파르조 육군 준장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은 수카르노는 『혁명에서는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면서 이들의 어깨를 두드렸다고 한다. 이런 행적 때문에 수카르노는 9·30 親共 쿠데타를 배후 조종했거나, 최소한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치명적인 혐의를 받게 되었다 (물론 수카르노는 후일 그의 가족들에게 자신의 연루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면서 「9·30 사건은 자신을 쓰러뜨리기 위한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
      이튿날 아침 운퉁 중령은 방송을 통해 자신들의 조직을 「9·30운동」이라고 소개하면서, 자신들의 거사는 美 CIA의 조종을 받아 수카르노 정권을 전복시키려던 「장군 평의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혁명평의회」 설치를 선언했다.
      그러나 1978년 인도네시아 국군 치안질서회복작전사령부에서 발간한 보고서에는 9·30 사건은 수카르노 死後 육군에 의해 공산당이 제압당할 것을 두려워한 공산당이 軍에 대해 先制 공격을 가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운퉁 중령의 방송을 들은 자카르타 주둔 전략예비군 사령관 수하르토 少將은 직감적으로 이 사건이 공산당의 음모라고 판단했다. 그는 먼저 자카르타 시내 주요 거점들을 점거한 두 개 대대의 지휘관들을 설득, 이들 부대를 철수시켰다. 이튿날 수하르토가 『할림 기지로 진압부대를 투입하겠다』고 위협하자, 할림 기지의 쿠데타軍도 투항, 쿠데타는 사흘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쿠데타는 아주 간단하게 진압되었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軍장성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0월4일부터 이슬람청년조직들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反共 궐기가 일어났다.
      이들은 공산당 해체를 요구하면서 軍·警과 함께 전국적인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 공산당 서기장 아이디트를 비롯해 25만∼100만명의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악바르 탄중 전 인도네시아 국회의장 겸 골카르당 당수는 이때 활약했던 이슬람 학생 조직의 멤버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事變(사변) 속에서도 수카르노는 자신이 기존에 취해 오던 정책들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는 민족주의·종교·공산주의의 나사콤 체제를 나사소스(NASASOS:민족주의·종교·사회주의)체제로 살짝 바꿔 존속시키려 했다.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정부內 공산주의자들을 추방하라는 대중들의 요구도 외면했다. 1966년 3월 개각에서는 나수티온 국방치안 장관 등 軍部 內 반공주의자 두 명을 해임했다. 그러면서 그는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反말레이시아 정책과 敎導민주주의를 되풀이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더 이상 呪術을 발휘할 수 없었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그가 발버둥칠수록 국민들의 마음은 그에게서 떠났다.
      수카르노의 측근들이 부패혐의로 체포되어 사법처리되었다. 1950년대 후반 이후 억압당했던 언론들이 비판 기능을 회복하면서 수카르노의 失政과 성격상의 결함, 여성편력 등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수카르노에 대한 닉슨의 평가 
        
      이 사이 軍部의 實權을 장악한 수하르토는 한동안 군인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그는 변화를 갈망하는 청년 세대의 지지를 바탕으로 「新질서」를 제창하면서 조금씩 수카르노 체제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수하르토는 수카르노가 권좌에 있는 동안은 물론 수카르노가 下野한 후에도 그의 권위를 존중해 주는 자세를 견지했다. 수하르토는 9·30 사건과 관련하여 수카르노를 직접 조사하고도 그 내용을 공표하지 않았으며, 수카르노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도 않았다. 1967년 3월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고 나서도 수하르토는 수카르노가 계속 대통령 관저를 이용하도록 허용했다.
      수카르노는 1966년 3월11일 軍部의 압력을 받고 수하르토에게 「정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안전·평화·안정을 확보하고 대통령의 안전과 권한을 보장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조처를 취할 것을 명령한다」는 명령서를 내주었다.
      수하르토는 이 명령서에 기초하여 이튿날 공산당을 해산했다. 수카르노는 『수하르토에게 치안유지상의 결정권만을 부여했을 뿐, 정치적인 결정권을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고 반발했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시대는 종막을 고했다.
      수하르토는 1967년 3월 대통령 권한 대행을 거쳐, 1968년 3월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것은 「개발」을 내세운 새로운 독재의 시작이기도 했다. 수카르노는 1970년 6월21일 軟禁(연금) 상태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닉슨은 그의 저서 「지도자들」에서 수카르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혁명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사회체제를 해체시키는 데는 전문가였으나, 그것을 재건할 줄 몰랐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고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수카르노는 지도력에 관한 불행한 사실 하나를 보여 주었다. 이는 국민들의 감정을 사로잡는 데 가장 유능한 지도자는 때때로 가장 비참한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는 점이다.
      민중 선동은 효과가 있다. 책임감을 결여하였던 수카르노는 선동으로 가장 충동적인 힘을 만들어 그의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자신의 호소를 교묘하게 꾸밀 수 있었다. 두려움과 미움은 아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선동은 이러한 감정들을 움직일 수 있다. 희망도 강력한 힘을 가지며, 선동은 그릇된 희망을 높인다> 
        
      36.6% 득표로 당선된 少數派 대통령 
        
      이미 여러 차례 국회의원을 지냈고, 세 차례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그는 이 나라 정계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이 나라의 富가 소수의 기득권 세력의 수중에 偏在(편재)해 있다고 주장하면서, 대중들에게 더 많은 몫을 돌려줄 것을 주장했었다. 네 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그는 기성 정치질서에 반대하는 여러 정파들의 連帶(연대)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기성 질서를 대변하는 후보들의 분열에 힘입어 그는 가까스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少數派(소수파) 대통령」이라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애써 무시하고(그의 집권 기간 중 실시된 각종 선거에서 그는 단 한 번도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은 적이 없었다), 기층 민중들을 위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취임 직후의 1년 半을 화려하게 보냈다. 그의 개혁정책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세계는 이 개혁정치가의 등장을 기대와 불안감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하지만 얼마 후 그의 정책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몫을 빼앗아가는 개혁에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야당이 지배하는 의회는 사사건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점차 그는 대중들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방식을 택했다. 대중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왔고 곧잘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곤 했다. 대중들이 사회正義 실천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저지르는 불법 행위들은 많은 경우 대통령에 의해 정치적으로 追認(추인)되었다.
      경제적인 면을 보면 그의 재임 기간 중 국가의 주요 산업들이 국유화되었다. 대중들을 위한 복지제도가 확충되었으며, 이 부분에서의 재정지출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그의 임기 말에 접어들면서 경제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희망찬 미래를 보여 주던 여러 경제 지수들이 급격히 나빠졌다. 그 이유를 딱 부러지게 밝혀내기는 어려웠지만, 경제가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만은 분명했다. 외부 경제여건의 변화, 특히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수출품의 국제 가격 급락이 경제 위기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국민들 사이에는 냉소와 불만이 확산되었다.
      국제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우방이었던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대신 그는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이단적인 존재로 배척당하던 근린 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를 회복시켰으며, 그 나라 원수와의 돈독한 우정을 내외에 과시했다. 그는 중국에 접근했는데, 중국이 미국을 대신한 정치·경제적 파트너가 되어 주기를 기대하는 듯했다. 나라 전체가 나락 속으로 빠져드는 데도 그는 여전히 「개혁」을 외쳐댔고,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정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실각한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칠레 역시 건국 이래 少數의 기득권층에게 富와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소수의 大지주들이 전체 농지의 5분의 4를 차지하고, 자신의 농지 안에서는 중세 봉건 영주 못지않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자기 땅을 갖지 못한 농민들은 도시로 흘러들어 빈민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칠레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는 硝石(초석) 생산으로, 그 후에는 구리 생산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이들 자원을 개발한 것은 영국과 미국의 자본이었다.
      1920년대 아르투르 알렉산드리 이후 역대 정권은 노동자들의 권리보장, 사회보장제도의 확충 등을 내용으로 하는 사회개혁을 추진했다. 1964년 개혁적 右派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민주당의 에두아르도 프레이(1994년부터 2000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에두아르도 프레이의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자유 속의 혁명」을 내걸고 광범위한 사회·경제 개혁들을 추진했다.
      그는 칠레에 진출한 銅鑛(동광) 회사의 주식 51%를 정부가 사들이고, 농지 개혁을 단행했다. 이러한 개혁 정책들은 당시 칠레로서는 필요한 것이었지만,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매년 물가상승률은 35%에 달한 반면, 경제성장률은 2.3%에 그쳤다. 全국민의 40%가 여전히 영양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한번 변화의 가능성을 맛본 민중들은 더 큰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한 변화 욕구에 힘입어 아옌데는 1970년 9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아옌데는 젊은 시절 의사로 일하면서 貧富(빈부) 격차 등 칠레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들을 목격했고, 이 경험은 그를 정치가의 길로 이끌었다. 
        
      세계 최초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 
        
      1952년 처음 大權에 도전한 이래 네 번째 출마한 1970년 大選에서 아옌데는 자신의 사회당과 공산당 등 左派 정당들을 망라한 「인민전선」의 후보로 나서 국민당(右派)의 호르헤 알렉산드리, 기독교 민주당(중도파)의 라도미르 토믹과 대결, 辛勝(신승)했다. 그는 전체 투표자의 36.6%의 지지를 얻어, 35.3%의 지지를 얻은 알렉산드리를 불과 3만9000표 차이로 눌렀다. 칠레 헌법은 후보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전체 투표자의 과반수를 얻지 못했을 경우, 上下 兩院(양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 당선자를 결정짓도록 되어 있었다. 政派(정파)들 간의 막후 조정에 따라서는 최고 득표자가 아닌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 칠레 의회는 전통적으로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 최고 득표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해 왔고, 1970년 당시 諸정파들도 그러한 전통에 충실했다. 당시 기독교 민주당 사무총장 벤하민 프라도는 『아옌데의 대통령 취임을 거부하는 것은 36%의 유권자들에게 「당신들은 투표에 참가할 권리는 있지만 승리할 권리는 없고 언제나 2등이나 3등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아옌데가 당선되자 미국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軍部와 右翼 정당·단체들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사주하는가 하면, 憲政 질서에 충성하는 참모총장 슈나이더 장군을 암살하도록 조종하기까지 했다. 이런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초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 아옌데는 체 게바라와 胡志明의 사진을 흔들면서 열광하는 군중들 앞에서 취임식을 가졌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제국주의적 착취를 타도하고, 독점을 없애며, 진정하고 충분한 농지개혁을 실행할 것이며, 은행 등 금융기관들을 국유화할 것』을 약속했다. 
        
      아옌데, 민중들의 욕구분출 통제 못해 
        
      아옌데 취임 후 1년 반 사이에 최저 임금은 35%가 오르고, 물가는 동결되었다. 빈민층을 위한 각종 복지·의료 제도가 확충되었고, 빈민들에게 우유와 의약품이 무료로 제공되었다. 농업노동자 조합 결성,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 농지개혁 등이 추진되었다. 공업생산은 14.6%로 증가한 반면, 실업률과 인플레율은 떨어졌다.
      그러나 칠레의 기층 민중들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옌데가 집권하자 「혁명의 滿潮期(만조기)」가 도래한 것으로 착각했다.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極左(극좌)단체인 MIR(혁명좌파운동)의 지도 아래 地主들의 땅을 무단 점유하기 시작한 도시빈민들의 행동은 아옌데 집권 후 더욱 고조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점유한 지역 내에 자치 행정기구와 인민재판소·무장 민병대를 설치하고 공권력에 맞섰다. 수도 산티아고 인근 공장지대의 노동자들도 MIR 등 극좌단체들의 지원을 받는 무장 민병대를 만들었다 (1973년 쿠데타 이후 군사정부는 이들 무장 민병대의 훈련에 쿠바·북한 요원들이 간여했다고 주장했다).
      度를 넘어선 기층 민중들의 행위에 대해 아옌데 정권은 일관성 있게 대응하지 못했다. 어떤 경우에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私有 재산을 침탈하는 행위를 단속하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이들 기층 민중들의 공동체를 인정하고 자금과 물자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들의 요구는 끝이 없었다. 정부가 학교건설을 위해 벽돌을 지원하면 더 질 좋은 벽돌을 요구했고, 교사들을 파견하면 부모 스스로 자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겠다며 어깃장을 놓았다.
      1971년 12월 산티아고에서 대대적인 反아옌데 시위가 벌어졌다. 「빈 냄비들의 행진」으로 알려진 이 시위에는 약 5000명의 중산층 주부들이 빈 냄비를 두드리면서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로 야기된 물자부족 사태에 대해 항의했다.
      1972년 봄에는 광산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10월에는 개인트럭 운수사업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발단은 정부의 새로운 국영운송회사 창설 계획 때문이었다.
      이 조치는 아옌데가 「트럭운수업은 國有化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뒤집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트럭운수업자들의 파업으로 칠레의 物流체계가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 파업은 이례적으로 「가진 자들의 파업」이었는데, 그 배후에는 美 CIA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파업과 상인들의 買占賣惜(매점매석)으로 물자부족 사태가 심화되자 기층 민중들은 규찰대를 조직해 物流 창고들을 접수, 물자들을 배급하는 것으로 맞섰다. 
        
      軍部, 아옌데에게 충성하는 참모총장 불신임 
        
      가톨릭 대학 학생들과 「조국과 자유」 등 右翼 청년단체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아옌데 정권을 비판하면, 노동자들도 몰려나와 『아옌데! 아옌데! 우리가 그대를 지켜주리라!』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거리를 누볐다. 아옌데 역시 이러한 집회·시위장에 얼굴을 내밀고 「중단 없는 혁명」을 외쳐대곤 했다. 반면 의사·변호사·금융인 등 전문직 종사자들은 아옌데 정권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정권으로부터 마음이 떠나가는 右翼·중도층을 달래기 위해 아옌데는 프라츠 장군 등 현역 장성 세 명을 각료로 기용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경제면에서 아옌데는 사회주의화를 강력히 추진했다. 집권 후 2년 남짓한 기간 중 산업시설의 35%, 농지의 40%가 국유화되었다. 銅鑛(동광) 회사들은 「이미 칠레에서 과도한 富를 수탈해 갔다」는 이유로 보상 없이 지분을 몰수당했다. 이러한 「혁명적」 조치는 아옌데로서는 합리적인 것일지 몰라도 시장경제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자, 국제법상으로도 불법적인 것이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칠레에 제공되는 세계은행 차관 등을 차단했고, 이는 칠레의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경제·사회 혼란이 계속됨에 따라 1972년 말부터 경제 지표들이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희망이 있는 것으로 보이던 칠레 경제는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칠레 총 수출액의 80%를 차지하는 구리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진 것도 경제 위기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1972년 말 인플레는 160%였고, 1973년 전반기에만 300%에 이르게 되었다.
      미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반면, 아옌데는 쿠바·중국과의 관계를 증진시켰다. 1971년 카스트로가 칠레를 방문, 아옌데와 함께 反帝 투쟁과 사회주의의 승리를 외쳤다. 중국과 정치적·경제적 관계도 증진되었다. 중국 수상 周恩來(주은래)는 아옌데에게 서신을 통해 「혁명을 서두르지 말라」고 조언할 정도로 동지적 유대를 보여 줬다.
      1973년 6월29일 산티아고 제2기갑연대 병력 100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 대통령관저를 포위했다. 이 쿠데타는 3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이때 40여 일 후 쿠데타의 주역이 되는 피노체트 장군은 현장에 나가 진압군을 지휘한 장군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해 8월22일 300여 명의 장교 부인들이 국방장관 겸 참모총장 프라츠 장군의 집 주변으로 몰려가 아옌데에게 충성하는 프라츠를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는 軍部가 프라츠, 더 나아가 아옌데를 불신임한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했다. 다음날 프라츠는 사임했고, 아옌데는 후임 참모총장에 피노체트 장군을 임명했다.
      위기가 계속 심화되자 1973년 9월 초 아옌데는 자신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 그 결과에 따라 국회를 해산하고 總選을 실시함으로써 정국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軍部가 행동을 결심한 다음이었다. 피노체트 육군참모총장, 구스타보 레이그 공군참모총장, 호세 토리비오 메리노 발파라이소 해군기지 사령관 등은『칠레에서 공산주의의 癌(암)을 일소』하기로 결의했다. 軍部의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실패한 대통령의 장렬한 최후 
        
      9월11일 새벽 발파라이소 주둔 해군병력들이 발파라이소市의 左翼 인사 3000여 명을 체포하는 것을 시작으로 행동을 개시한 칠레 軍部는 순식간에 칠레 전역을 장악했다. 아옌데는 쿠데타軍의 해외망명 종용을 묵살하고, 대통령 관저인 모네다宮으로 달려갔다. 여기서 그는 對국민 고별연설을 남겼다.
      『이것이 내가 국민 여러분들에게 연설하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이 순간 나는 인민에 대한 충성을 목숨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칠레의 군인으로서 맹세를 배반한 자들에게는 도덕적 형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그들은 힘이 있고 나를 부술 수도 있지만, 사회의 전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본인은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누군가 이 암울하고 쓰라린 순간을 극복해 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좀더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 여러분들과 함께 믿습니다. 칠레여, 영원하라!』
      방송연설을 마친 아옌데는 카스트로가 선물한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쿠데타軍에 저항했다. 쿠데타軍의 전폭기가 모네다宮을 폭격했다. 정오가 조금 지나 쿠데타軍이 모네다宮에 진입했을 때 아옌데는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옌데를 지지하는 무장 민병대들이 간헐적으로 쿠데타軍에 저항했지만, 곧 분쇄되었다.
      칠레의 右派 정치인들은 과거 1930년대 초 칠레 軍部가 그랬던 것처럼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위기 극복을 위한 軍部의 일시적인 출동으로 이해하고, 쿠데타를 환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군사정권의 정치적 후견인 내지 자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짧은 기간 동안의 軍政 뒤에는 자신들이 정권을 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빗나갔다. 軍部는 左翼 세력뿐 아니라 右翼 정파들도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 이후 16년간 鐵拳(철권) 통치와 자유주의 경제를 접목시킨 독재정치를 펴나 갔기 때문이다. 
      
        1914년 1인당 GNP는 독일 수준 
        
      일반적으로 國富를 무분별하게 대중에게 「퍼주는」 「포퓰리즘(大衆迎合주의)」의 대명사로 불리는 「페론주의」는 1946∼1955년 대통령으로 재임한 후안 도밍고 페론의 통치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페론 이전부터 아르헨티나 사회는 이미 「퍼주기식 포퓰리즘」으로 흐를 가능성을 보이고 있었다.
      19세기 말 이래 아르헨티나는 肉類(육류)와 곡물 수출에 힘입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1869년 이후 아르헨티나는 연평균 6.9%의 경제성장률을 자랑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대서양 연안국의 도시들 가운데 뉴욕 다음 가는 대도시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시 아르헨티나의 1인당 GNP는 스페인·이탈리아·스웨덴·스위스보다 높았고, 독일이나 베네룩스 3국과 같은 수준이었다. 경제성장에 따라 이탈리아系 移民(이민)들이 다수 유입되었는데, 이때 사회주의·아나키즘 등도 함께 아르헨티나로 흘러들어 왔다. 사회주의자·아나키스트들의 영향으로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민중들은 본격적으로 「富의 再분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916년 집권한 급진 시민당의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은 최저 임금제 실시·최대 노동시간 제한 등 소외계층을 위한 복지제도의 확충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몫을 요구하며 파업을 일삼았다. 그러나 정부는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사태에 대해 「사회적 정의를 요구하는 정당한 행위」라며 방관했다. 
      
        페론의 등장 
        
      1943년 6월4일 「통일장교단」이라고 자칭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군부內 少壯派 장교들이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이 쿠데타 주모자 가운데 후안 도밍고 페론 대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페론은 일찍이 1930년대 이탈리아 주재 武官으로 근무하면서 파시즘의 대중 동원력에 매료되었던 인물이었다. 군사 정권 내부에서도 수차 대통령이 교체되는 가운데 페론은 국방부 장관·노동부 장관·부통령 겸 노동복지 장관 등을 거치면서 사실상 대통령을 능가하는 실권자로 성장했다. 노동부 장관·노동복지 장관을 역임하면서 노동자들의 정치적 잠재력을 인식한 페론은 이때부터 포퓰리즘 정책을 펴면서 그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전쟁 중 아르헨티나 군사정부의 親獨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 反정부 진영을 고무하면서 民政 이양을 강요했다. 그 결과 파렐 발카르세 정권은 民政 이양을 약속하는 한편, 1945년 10월 초 페론을 구금했다. 페론의 부인 에바 페론을 비롯한 페론의 추종 세력들은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페론 석방운동을 벌였다. 10월17일 노동자들은 대통령宮 앞에서 페론의 석방을 요구했고, 정부는 이에 굴복했다.
      페론은 이듬해 2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54%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페론은 기존의 지배 세력이던 軍部·교회는 물론 노동조합의 지지까지 확보함으로써 집권 초기 강력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취임 후 5개년 계획을 수립, 공공사업·교육 개혁·사회 개혁 등을 추진했다. 勞組를 비롯, 부문별 이익집단의 대표들이 각료로 기용되었다.
     
      페론의 경제부문 정책은 對外 自立·공업 발전·사회 정의로 요약된다. 농축산물 수출에 의존하는 아르헨티나 경제의 체질을 개선, 공업을 발전시킴으로써 경제 自立을 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페론은 외국인 소유의 철도·전화 회사들을 國有化하고, 1947년 7월에는 「경제독립」을 선언하면서 모든 外債(외채)를 청산했다. 노동자들의 지위를 대폭 강화시키는 노동입법들이 이루어진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소득 향상을 통해 內需를 진작시켜 공업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페론 집권 초기에는 戰後 세계 식량 수요 증가로 농축산물의 수출이 늘어나면서 벌어들인 외화 덕분에 공업 발전에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수입 대체 전략에 기초한 페론의 공업 건설은 소비재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본재 수입의 증가를 유발했고, 그 바람에 아르헨티나의 外換 사정은 다시 악화되고 말았다.
      1948년에 접어들면서 페론은 자신의 정치이념을 「正義主義(Justicialismo)」로 포장하면서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헌법을 개정,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고 임기를 6년으로 연장했다. 그에게 비판적인 언론은 탄압받기 시작했고, 반대 세력에게는 유·무형의 압력이 가해졌다. 1951년에는 「正義主義학회」라는 것을 만들어 정권 홍보에 앞장서도록 했다. 
        
      「正義主義」 미명 아래 독재의 길로 
      
      페론은 1951년 大選에서 유권자의 67%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再選되었지만, 그의 앞길에는 차츰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우선 노동자총연맹 등이 페론의 부인 에바 페론을 부통령 후보로 옹립하려다 軍部와 마찰을 빚었다. 그해 9월 軍部 일각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자 페론 정권은 반대파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면서 보다 독재화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美·英 등이 아르헨티나産 농축산물의 수입을 제한하고, 자본재 수입 증가로 인해 외환 사정이 나빠지면서 페론 정권의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도 주춤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번 단맛을 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몫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952년 그동안 자선단체를 만들어 소외계층에게 施惠(시혜)를 베풀면서 사실상 「페론주의」의 「상징」 역할을 하던 부인 에바 페론이 사망하자, 그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內政이 어려울수록 外治에서 살 길을 찾으려드는 지도자들이 있다. 페론도 그런 부류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아르헨티나와 갈등관계에 있는 영국과 가까이 지낸다는 이유로 소원하게 지냈던 이웃 우루과이와의 관계를 개선했다. 1952년 5월엔 「라틴아메리카 노조기구(ATLAS)」를 결성, 正義主義(페론주의)를 이웃 나라로 확산시키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내부의 敵」을 찾아나섰다. 그가 선택한 敵은 가톨릭교였다(계몽주의 시대 이래 기독교, 특히 가톨릭의 세력이 강한 歐美 국가에서 정부가 국내의 정치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政敎 분리를 내세우며 교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영향력을 제한하려드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페론은 가톨릭교가 노동 문제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反개혁 음모집단으로 비난하는 한편, 정부에 비판적인 성직자들을 체포했다.
      1955년 경제난에 직면한 페론 정권은 종래의 경제 自立 노선을 포기하고, 광공업에 대한 적극적인 外資유치 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外資가 들어올 경우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한 노동자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해군 항공기가 대통령宮을 폭격하는가 하면, 지방 주둔 軍부대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軍部마저 페론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결국 그해 9월 페론은 로나르 장군의 쿠데타로 失脚(실각),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페론은 좋았던 과거의 상징 
        
      페론은 失脚했지만, 그것으로 페론주의가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아르헨티나의 역사는 페론주의의 흔적을 지우려는 세력과 페론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세력 간의 다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페론이 실각한 직후부터 軍部와 일부 文民 정치인들은 「페론주의」를, 의회정치를 무시하고 대중에 직접 호소하는 類似(유사) 全體主義 체제로 규정짓고, 기회 있을 때마다 페론주의를 탄압했다.
      軍部가 反페론주의적 입장을 견지한 것은 그 자신 軍 출신이면서도 대통령 관저의 경비를 노동자들에게 맡길 정도로 軍部보다는 노동자 계층을 믿고 의지한 페론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론주의」는 페론 시대의 功過와는 관계없이 「좋았던 과거」의 환상으로, 페론은 그 시절에 대한 상징으로 국민들의 뇌리에 남게 되었다. 특히 노동자 등 소외 계층들에게는 「聖女 에비타」에 대한 기억과 함께 페론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선 軍部 정권들이 개발독재를 펴면서, 사회적 형평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관심이 줄어든 것도 페론주의에 대한 환상을 지속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 164년 브라질 군사정권의 출현과 그들이 거둔 경제적 성공은 전통적으로 브라질에 대해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던 아르헨티나 軍部를 자극했다. 1966년 집권한 軍部는 개발독재를 표명하고 나섰지만, 비전 있는 지도자의 不在, 산업기반의 취약, 그리고 성장보다는 분배를 먼저 요구하는 페론주의자들의 발호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데는 실패했다.
      한편 1960년대를 거치면서 「페론주의」마저도 舊시대의 유물로 간주하는 과격 공산주의자들이 등장했다. 게릴라 집단 「몬테네로스」는 前 대통령 에우헤니오 아람부루를 납치, 살해했다. 쿠바의 카스트로를 모방하여 軍·警 부대들을 습격하는 게릴라들이 속출했다. 
        
      死後까지 무책임했던 페론 
        
      더 이상 국가통합의 자신을 잃게 된 軍部 정권은 1972년 11월 페론 前 대통령의 귀국을 허용했다. 78세의 페론이 귀국하던 날 50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다. 페론은 이듬해 9월 대통령 선거에서 62%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권좌에 복귀했다. 그가 스페인 망명 기간 중 얻은 後妻(후처) 이사벨 페론은 부통령이 되었다.
      페론의 권좌 복귀는 국가의 안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집권 기간 중에도 左翼 게릴라들의 준동과 그에 맞선 右翼 테러는 계속되었다. 1974년 7월1일 페론이 사망하고,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 이사벨 페론은 단지 「페론」이라는 남편의 姓을 가진 한 여성에 불과했다.
      그녀를 페론주의의 「상징」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부패 정치인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아르헨티나가 직면한 모순들을 극복하기에는 너무 무기력했다. 일찍이 포퓰리즘으로 나라를 멍들게 했던 페론은 무능한 아내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움으로써 또 한번 무책임한 짓을 저질렀던 셈이다.
      좌익 게릴라들의 도전과 그에 따른 사회적 위기를 軍部는 「병든 사회」의 징후로 해석했다. 軍部는 病理의 근원을 1945년 혹은 1930년까지 추적하여, 아르헨티나가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병균과 대항하기에는 너무 허약하다는 진단을 내렸다(마셀로 카바로치). 1976년 라파엘 비델라 장군이 이끄는 軍部는 쿠데타를 일으켜 이사벨 페론 정권을 전복시켰다.
      군사 정권은 1978년경까지 좌익 게릴라들을 분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군사정권 기간 중 살해, 실종된 사람은 최소한 1만명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 정권이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의 패전의 여파로 1983년 무너진 후 아르헨티나에서는 文民 정부가 들어섰다. 1989년에는 개혁파 페론주의자인 사울 메넴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페론주의가 여전히 아르헨티나 정치의 한 軸임을 보여 주었다. 메넴은 한때 전통적인 페론주의의 틀에서 벗어나 과감한 경제개혁을 실시하는 듯했으나,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페론주의의 舊態(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민들의 협조를 받지 못했던 것이 그 한 원인이었다. 페론의 망령은 그가 사망한 지 4반세기가 지나서도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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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레의 아옌데는 蘇 KGB의 공작금으로 당선
     45만 달러가 역사를 바꾸었다!
     趙甲濟
     
      1970년 선거를 통하여 정권을 잡은 세계최초의 공산주의자,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은 南美의 모범적 민주국가를 사회주의 체제로 변혁시키려다가 우파의 저항을 부르고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경제가 무너졌다. 1973년 9월 피노체트 육군참모총장이 이끈 全軍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는 자살하였다.
     
      보수분열을 틈타 소수파로 집권한 그는 소련 정보기관 KGB와 협력한 이였다. 1992년 영국으로 망명한 KGB의 비밀자료 담당 간부 바실리 미트로킨은 방대한 자료를 갖고 왔는데, 여기에 아옌데에 대한 KGB의 공작 내용이 실려 있었다. 1970년 선거 때 아옌데는 멕시코 주재 KGB 요원을 통하여 선거 자금을 요청, 소련으로부터 45만 달러를 받았다. 미트로킨의 자료를 분석한 영국학자 크리스토퍼 앤드류는 이 돈이 아옌데의 좌파연합이 집권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당시 아옌데를 대통령 후보로 민 좌파연합은 3만9000표 차이로 1위(지지율 36.3%)를 차지, 국회에서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뽑혔다. 아옌데는 KGB측에 정권을 잡은 뒤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전하였다고 한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아옌데는 KGB 요원 쿠즈네초프를 통하여 소련과 협조하였다. 정치정보도 건네주었고, 親蘇的 정책도 추진하였다. 칠레와 소련 정보기관 사이의 협조도 모색하였다. 소련도 反美로 돌아선 칠례에 정치적 지원과 경제적 원조를 하기 시작하였고 그에게 레닌상을 주었다. KGB는 아옌데에게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성공시키려면 권력기관을 장악한 뒤 폭력적 방법을 써야 한다고 충고하였지만 아옌데는 듣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도 쿠바에 이어 南美에서 두번째로 등장한 칠레 공산정권을 뒤엎기 위하여 다방면의 공작을 하였다. 칠레 군부는 우익 세력과 협조, 아옌데 정부를 괴롭히는 사보타지를 하다가 全軍 쿠데타로 공산정권을 타도하였다. 칠레 군부 안에서도 合憲的 정부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파와 공산당은 안된다는 파가 나뉘어 갈등하였다. 쿠데타 지도자 피노체트를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한 이는 아옌데였다. 이 쿠데타는 미국 CIA와 직접 관련성이 없다.
     [ 2012-02-26, 1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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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의 쇠망과 一流복귀
     전성기에 상공업을 기피하고, 전쟁 문화 예술에 과잉 투자. 착취와 반발의 악순환. 독재자 프랑코가 국가再建의 길을 열다.
     趙甲濟
     
      필립 2세의 功過
     
      한국의 국가적 목표는 자유통일을 이룩하여 북한지역까지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고 一流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一流국가는 西유럽의 나라들, 유럽이 개척한 식민지에서 생긴 네 나라(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일본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스페인은 한때 一流국가였다가 쇠망하기 시작, 수백년간 유럽의 落後지역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선 左右內戰을 겪었고, 이를 수습한 프랑코의 독재가 오래 계속되었다. 프랑코의 死後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30여년 만에 一流국가의 반열에 복귀하였다. 현재 一流국가로 분류되는 나라들은 거의가 과거 一流국가였던 적이 있다. 一流국가였던 나라가 쇠망의 길을 선택는 과정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에 대하여서도 他山之石이 될 것이다.
     
     
      서양사에서 16세기는 ‘스페인의 세기’라고 일컬어진다. 17세기는 新해양강국 ‘네덜란드의 세기’, 18세기는 ‘英佛의 세기’, 19세기는 ‘英獨의 세기’, 20세기는 ‘미국의 세기’, 21세기는 아마도 ‘美中의 세기’가 될 것이다.
      1492년 스페인 남부의 그라나다가 기독교軍에 함락됨으로써 770년에 걸친 스페인의 이슬람 시대가 끝났다. 이 해에 스페인 王家에서 후원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이 이뤄졌다.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함께 ‘대항해 시대-식민지 개척시대’를 열었다. 스페인의 모험가들(피사로, 코르테츠)은 南美의 아즈텍, 마야, 잉카 文明을 파괴-접수했다.
      신대륙에서 채굴된 은이 스페인으로 흘러들면서 거대한 國富가 쌓이기 시작했다. 1556-1598년 사이 42년간 왕위에 있었던 펠리페(영어로는 필립) 2세가 스페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508년에 그는 포르투갈의 王位까지 차지하여 서양의 2大 해양국을 통합했다. 그의 治下에서 스페인은 지금의 포르투갈, 베네룩스 3국, 南美, 中美, 플로리다 지역, 멕시코, 캐러비안 海 주변지역을 차지했다.
     
      그는 신교도와 터키 군대로부터 카톨릭을 수호하는 챔피언을 自任했다. 1571년 스페인-베니스 연합함대는 지중해의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세계의 챔피언 오스만 터키 해군을 격퇴하여 지중해 制海權을 지켜내고 이슬람의 東進을 저지했다. 1588년에는 스페인의 無敵함대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를 징벌하러 갔다가 거의 전멸하여 스페인의 衰亡期(쇠망기)를 열기도 했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진압하는 데도 실패했다.
      스페인이 짧은 전성기를 뒤로 하고 유럽의 후진국으로 전락하는 데는 약 400년이 걸렸다. 스페인의 地主와 귀족들은 전성기 때도 商工業을 기피했다. 아메리카 대륙과의 무역은 외국인에 의해 이뤄졌다. 스페인의 지배층은 아메리카 경영으로 생긴 國富를 주로 전쟁과 건축에 썼다. 펠리페 2세가 지은 궁전 에스코리알은 마드리드에서 車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데, 화강암으로 만든 ‘여덟 번째의 불가사의’라고도 불린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여온 銀(은)을 돌로 바꿨다는 평을 듣는다.
     
      유태인 축출의 부작용
     
      스페인의 17세기는 건축과 예술의 세기였다. 국가 소득의 약 5%를 매년 건축(교회, 기념물), 그림, 조각 등에 썼다고 한다. 요사이 보통나라의 국방비 비중보다 더 많은 돈이 문화, 예술에 투자됐다. 이렇게 생긴 문화유산들이 지금 스페인을 세계 1등가는 관광 大國으로 만들고 있다.
      17세기 스페인의 地主, 귀족, 교회는 국가 생산물의 약 10%를 차지하여 부유한 생활을 누렸으나 농민들과 평민들은 그러지 못했다. 이슬람 세력을 추방하고 스페인을 수복한 기독교 세력이 잘못한 게 있었다. 유태인과 이슬람 교도를 박해한 것이다. 당시 이 두 세력은 유럽 사람들보다 開化되었고 돈과 기술이 있었다. 스페인은 종교 재판소를 만들어 개종하지 않는 유태인과 이슬람 사람들을 추방했다. 약 100만 명의 알짜배기 人力, 즉 당시의 전문층-중산층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간 뒤 스페인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착취와 반발의 관계로 대립하게 되었다.
     
      여기에 정치 불안과 內戰(내전)의 씨앗이 뿌려졌다. 스페인 지배층은 귀족층, 軍 장교, 교회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상공업보다는 종교, 문화에 탐닉했고, 농민, 평민층은 열심히 일할 동기를 찾을 수 없었다. 16세기에 벌어놓은 國富를 까먹으면서 스페인은 政變, 전쟁, 내란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고, 그 클라이맥스가 1936년~1939년의 스페인 內戰이었다.
      1701년 합스부르그 王家의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 왕위를 프랑스 계통의 부르봉 王家 펠리페 5세에게 넘겨주자 유럽의 열강들이 개입하여 11년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 대혁명 직후에는 스페인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편이 되어 두 나라 연합함대가 영국을 치려다가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했다. 이로써 300년에 걸친 스페인의 해양강국 시대는 막을 내린다. 
      
        內戰의 나라  
      
      스페인 지배층은, 18~19세기 유럽이 산업혁명과 부르조아 혁명을 거치면서 혼란 속에서도 발전을 계속하고 있을 때 이런 新사조에 눈과 귀를 닫고 中世的 침체 속을 헤맸다.
      나폴레옹이 1807년에 스페인으로 군대를 보내 왕을 밀어내고 동생을 앉히자 스페인 민중은 오랜만에 지배층과 손잡고 게릴라戰으로 대항했다.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이 對프랑스戰을 승리로 이끌어 나폴레옹의 몰락을 재촉했다.
      그 뒤 스페인은 王位 쟁탈전에 휩싸인다. 1830년대와 1840년대 그리고 1870년대 세 차례 12년간의 內戰이 일어났다. 두 번째 內戰 끝에 스페인은 공화국이 되었으나 지방의 반란으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군대가 다시 알폰소 1세를 복위시켰다.
      스페인 內戰에서는 귀족, 왕가, 地主, 군대가 항상 한 편이 되고, 농민, 지식인, 노동자, 사회주의자, 분리주의자가 반대편에 섰다.
      19세기 말부터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의 사상이 스페인 노동자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착취만 하는 정부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회주의도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러시아 공산당식 계급혁명을 반대했다. 동시에 바스크와 카탈루니아 지방(바르셀로나가 수도)에서 분리운동이 일어났다. 스페인은 계급적으로, 지역적으로(인종적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지금의 모로코 주민들이 독립전쟁을 일으켜 스페인 군대는 苦戰했다. 1923년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뒤 6년간 온건한 독재를 했다. 알폰소 王은 1931년 지방선거에서 공화파가 압승하자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제2공화국이 들어섰다.
      정권은 좌파와 우파 사이를 오고갔다. 파시스트 정당이 생기고 노동자들이 경찰과 군대를 공격했다. 카탈루니아는 독립을 선언하고 암살, 테러가 사회를 휩쓸었다. 스페인은 左右로 갈라졌다.
     
      1936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앞장선 좌파연합 인민전선이 근소한 차이로 민족전선(우파연대)을 꺾고 승리했다. 폭력 사태는 계속됐다. 무정부주의 회원이 100만 명을 넘었다. 농민들도 반란을 준비했다.
      1936년 7월 17일 봉기한 것은 군대였다. 북아프리카 주둔 스페인 군대가 좌파 정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본토 군대도 동조했다. 다섯 장군이 주동한 군사반란의 지도자는 키가 작은 프랑코였다.
      프랑코 세력은 스스로를 ‘국민(민족)세력(Nationalist)’이라고 불렀다. 스페인의 국가적 통합과 존립을 위해 싸운다는 명분 아래서 붙인 이름이었다. 반대편 좌파는 ‘공화파(Republican)’라고 불렸다.
      미국과 서구의 지식인들, 사회주의자들은 의용군을 보내 공화파를 지원했다. 소련도 공화파에 군대와 장비를 보냈다.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프랑코 군대를 지원했다. 좌파 편을 민 국제의용군은 약 2만 명, 이탈리아는 약 7만 5000명, 독일은 약 1만 50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스페인 내전은 국제전쟁으로 변질됐다.
      세계의 좌파 지식인(헤밍웨이 등)이 공화파를 편들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프랑코는 惡, 공화파는 善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여기 스페인에서 듣는 여론과 사실은 다르다. 공화파는 약 7000명의 성직자(수녀, 신부 등)를 학살했다.
      공화파 내의 암살, 처형은 더욱 참혹했다. 1937년 5월에 공화파의 거점 바르셀로나에서는 소련의 앞잡이들이 좌파 內 무정부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숙청하기 위한 시가전을 벌여 수많은 동료를 학살했다. 공화파 편에서 참전했던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이 좌파의 실상을 목격한 뒤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스트보다 더 악질이라고 판단하여 스탈린주의를 고발한 ‘동물농장’과 ‘1984년’을 썼다.
     
      프랑코는 독일의 도움을 받아 내전에서 승리자가 되었으나 2차 대전 때는 중립을 지켰다. 히틀러가 프랑코와 담판을 갖고 참전을 압박하였으나 프랑코는 말려들지 않았다. 2차 대전 이후 프랑코는 재빨리 親美노선을 선택, 산업을 발전시키고, 일찍암치 후계자로 현재의 카를로스 왕을 지명, 지도자 수업을 받게 하였다. 프랑코의 독재가 스페인이 다시 一流국가로 복귀하는 길을 연 셈이다. 스페인이 가진 위대한 역사와 전통과 문화의 힘이 정치를 一流수준으로 밀어올린 것인지도 모른다.
     
     스페인 紀行 ⑤ ‘게르니카’ 앞에서
     
      지난 19일 필자가 尙美會(상미회) 여행단과 함께 버스 편으로 마드리드 근교의 펠리페 2세 궁전 에스코리알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에스코리알 바로 옆 돌산 꼭대기엔 높이 140m의 세계최대 돌십자가가 박혀 있고 이 바위산 속으로 동굴처럼 생긴 스페인 內戰 희생자 묘지가 파여 있다. 우리 버스가 진입로로 우회전하는 순간 깜짝 놀랐다. 깃발을 흔드는 차량 행렬이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거의 젊은이들이었다. 다음날(20일)이 프랑코 사망 30주년인데, 그의 무덤이 있는 돌산 동굴로 몰려가는 지지자들의 행렬이었다.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를 응원하러 가듯이 독재자를 추모하러 가는 선진국의 젊은이들!
      이 며칠 사이 스페인 언론들은 프랑코의 유산을 다루는 특집 기사들을 내보냈다. 한 신문은 ‘그는 독재자인가, 국민 영웅인가’라는 제목을 달았다. 프랑코가 1936~1939년 사이 스페인 내전을 주도하고 수십만 명을 죽게 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한국에서 朴正熙에 대한 것 정도로 높다.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켜 좌파 정부를 타도하지 않았더라면 스페인은 공산화되고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에서부터, 프랑코가 生前에 지금의 카를로스 王을 후계자로 키워 死後의 민주화를 준비해 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요사이 스페인 언론은 특히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스페인이 독일, 이탈리아 편에 서지 않은 사실을 많이 다루면서 이 결단으로 오늘의 스페인 번영이 가능해졌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프랑코는 약 40년 간의 독재 기간 중 朴正熙처럼 ‘先경제 발전, 後민주화’ 전략을 밀어붙여 지금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스페인의 토대를 만들었다(올해 경제성장률이 유럽 최고). 그 비결은 미국과의 準동맹관계, 군부통제에 의한 정치안정, 성공적 산업화 정책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프랑코의 功過를 비교적 편안하게, 객관적으로 보려고 한다. 어떤 정치세력도 프랑코 시절의 사건들을 선동의 소재로 이용하지 않는다.
      지난 20일 나는 마드리드 소피아 미술관 2층 6호실에 있는 피카소의 명작 ‘게르니카(GUERNICA)’ 앞에 섰다. 이 흑백 大作은 反프랑코, 反戰의 상징적 그림이다. 피카소의 그림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마도 20세기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그림을 꼽으라면 이것이 뽑힐 것이다. 공산당에 입당했던 피카소는 스페인 內戰 때 공화파의 부탁을 받고 1937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 출품할 그림을 구상하고 있다가 나치 공군이 스페인 북쪽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마을을 폭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名作을 그렸다. 피카소는 생전에 스페인이 민주화 된 뒤에 이 그림을 조국 스페인에 가져가서 전시하도록 유언했었다. 그 사이 이 그림은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 ‘게르니카’는 1981년에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으로 왔다가 10여년 전 소피아 미술관으로 옮겼다.
      죽은 아기를 안고 부르짖는 어머니, 말, 소, 부러진 칼의 이미지가 보는 이들을 생각 속으로 밀어넣는 이 그림에 대해 이런 評이 있었다.
      “고야는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사실적으로 그렸으나 피카소는 전쟁의 본질과 의미를 추상화하여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 이미지를 만들었다.”
      스페인은 프랑코와 피카소를 다 포용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과거사 캐기, 조국의 약점 뒤지기를 하는 정치인들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 2005-11-23, 11: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