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특혜 논란,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와 허술한 법망정권 초기 경찰서 달려가던 대통령 임기 말 “힘 빠졌나?”
  • “청와대에 석궁이라도 들고 가야겠다.”

    지난 7일 밤 여의도 역 인근 한 포장마차. 40대 남성 4명이 모여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앞에 놓인 테이블에 세 병의 빈 소주병과 “한화가 대체 뭐가 그리 대단하기에”를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분함을 넘어선 증오가 묻어 있다.

    4명의 남성은 모두 주식거래를 하다 상장폐지를 당해 그동안 모아온 ‘목돈’을 날린 이들이다. 종목은 달랐지만, 목소리는 하나다. “왜 우리가 투자한 중소·벤처 기업들은 상폐를 당했는데 대기업은 특혜를 받느냐”는 것이다.

    2010년 분식 회계가 문제가 돼 상장폐지된 네오세미테크에 투자한 김모(43.자영업)씨는 알뜰살뜰 모아온 8천만원을 고스란히 날렸다.

    “네오가 상폐 당할 때 허탈하긴 했지만, 억울하지는 않았다. 투자자들을 속이고 공시의무를 다하지 않은 회사 경영진이 원망스럽기는 했지만, 내가 투자에 실패한 것이지 않는가. 하지만 이번 한화 사태를 보며 마음이 바뀌었다.”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이나 모두 평등한 줄 알았는데, 결국 ‘대기업은 열외’였다는 얘기다.

    한 때 지식경제부 선정 '차세대 세계일류상품'에 이름을 올릴 만큼 견실한 코스닥 기업이었던 태양광 업체 네오세미테크는 우회 상장 이후 경영진의 분식회계 혐의가 속속 드러나면서 퇴출의 길을 걸었다. 공시만 믿고 투자했던 개인 투자자들은 발을 뺄 틈도 없었다.

    하지만 한화는 달랐다. 김승연 회장의 횡령 및 배임 혐의를 1년이나 숨겼음에도 아무런 재제도 없었다. 오히려 홍역을 치른 뒤인 지난 8일 한화의 주가는 550원이 오른 3만7천700원으로 장을 마감하는 기현상을 보였다. 지난 금요일(3일) 장 마감 이후 슬그머니 이를 밝혔고, 한국거래소는 일요일까지 출근하는 열의(?)를 보이며 지난 5일 ‘정상 거래 재개’를 선언하는 이례적인 ‘촌극’을 보여준 결과다.

  • ▲ 한국거래소 앞에서 상폐된 벤처.중소기업의 구제를 촉구하는 한 개미투자자의 1인시위 모습. 이들은 대기업에게만 특혜를 주는 관례를 지적하고 있다. ⓒ 뉴데일리
    ▲ 한국거래소 앞에서 상폐된 벤처.중소기업의 구제를 촉구하는 한 개미투자자의 1인시위 모습. 이들은 대기업에게만 특혜를 주는 관례를 지적하고 있다. ⓒ 뉴데일리

    ◆ 거미줄(법)에는 곤충(약자)만 걸려, 새(강자)는 걸리지 않아

    이번 한화 특혜 논란은 분명히 양비론적인 부분이 있다. “왜 대기업은 봐주느냐”는 개미 투자자들의 절규도 “시장에 미칠 파장을 고려해 부득이한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거래소의 변명도 모두 설득력은 얻고 있다.

    시가총액이 3조원에 육박하는 대형 그룹 ‘한화’는 소액주주 4만명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거래정지나 상장폐지가 될 경우 파급력은 코스닥 벤처 기업과 비교할 수 없다. 여기에 20%에 달하는 외국인 지분율은 국가 이미지와도 연관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대기업 특혜를 누리지 못하는 중소 벤처 기업에 투자하는 우를 범한 개미 투자자들에게는 최소한의 안전망도 없다.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 이후 네오세미테크와 같은 ‘개미 무덤’은 수십차례나 반복됐다. 주식 투자로 전세금을 고스란히 날린 가장의 자살 소식은 심심찮게 들려왔다.

    시모텍, 나이스메탈 등 현 정권의 자원 외교에 힘입은 벤처기업들에 몰린 투자자들은 부족한 정보와 허술한 당국의 관리에 희망을 잃어갔다. 하지만 한국거래소를 비롯한 정부가 나서는 일은 없었다.

    중소기업은 망하고 개인투자가는 상장폐지로 벼랑으로 몰렸다. 한해 상폐되는 종목만 60개에 이른다. 현 정권의 가장 큰 폐단으로 꼽히는 양극화가 주식 시장에서부터 뚜렷하게 표출되는 모습이다.

    이미 일부 시민단체와 소액주주들이 ‘재벌 봐주기’라며 집단소송을 준비하고 있어 논란은 앞으로 계속될 전망이다.

    한 개인투자자는 “같은 실수를 해도 중소기업은 상폐가 되고 대기업은 멀쩡하다는 것은 누구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며 “‘모두가 법 앞에 평등하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기준은 똑같아야 한다”고 말했다.

  • ▲ 한화 김승연 회장. 김 회장은 최근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기소된 뒤 재판 중이다. 사진은 김 회장의 법원 출두 모습. ⓒ 연합뉴스
    ▲ 한화 김승연 회장. 김 회장은 최근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기소된 뒤 재판 중이다. 사진은 김 회장의 법원 출두 모습. ⓒ 연합뉴스

    ◆ MB 정권 초기였으면, 한화 과연 살아남았을까?

    한화 사태를 바라보는 소수(?) 개미투자자들의 분노는 결국 정권을 향하고 있다. 당연하게 이어져온 ‘대기업 특혜’가 현 정권의 불신을 불러왔다는 얘기다. 직장인이자 40대 가장인 정모씨는 “이명박 대통령이 느슨해졌다. 정권 초기에는 이러지 않았는데…”라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달이 지난 2008년 3월 경기도 일산에서 어린이 납치·유괴 사건이 일어났다. 일산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한 초등학생이 뒤따라온 남자에게 폭행당하며 끌려가는 CCTV 장면이 전국에 보도됐다.

    하지만 경찰은 '단순폭행'으로 결론지었고 이를 ‘사건 은폐’로 본 국민들은 분노했다.

    이 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즉시 경찰서로 달려갔다. 형사과장을 비롯한 관련 경찰 6명이 직위 해제됐고, 이 대통령이 경찰서를 방문한 6시간 만에 범인은 잡혔다.

    대통령이 일선 경찰서를 방문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데다, 이 자리에서 경찰서장이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국민들의 분노를 식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 ▲ 지난 2008년 경기도 일산에서 벌어진 초등학생 납치.유괴 사건이 벌어지자 이명박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일선 경찰서를 찾았다. 당시 이 대통령의 방문은 여론의 큰 호응을 얻었다. ⓒ 뉴데일리
    ▲ 지난 2008년 경기도 일산에서 벌어진 초등학생 납치.유괴 사건이 벌어지자 이명박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일선 경찰서를 찾았다. 당시 이 대통령의 방문은 여론의 큰 호응을 얻었다. ⓒ 뉴데일리

    최근 이슈가 된 이 대통령의 ‘재벌 빵집’ 발언도 비슷한 맥락이다. 발 빠르게 ‘유감’을 표명하고 사업을 철수하는 기업들이 있는가 하면, 빈스앤베리즈와 같은 카페를 운영하면서도 조용히 여론이 수그러들기를 기다리는 한화 그룹 같은 기업도 있다.

    만약 정부가 사업 철수한 기업만 ‘바보’를 만든다면, 형평성 논란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이번 한화그룹의 특혜 논란은 친 대기업 성향의 현 정권의 또 하나의 안 좋은 선례이자 악습으로 비춰질 것”이라며 “단순히 상폐에 따른 기회비용을 논하기 이전에 ‘대기업은 열외’라는 형평성 논란에 대한 명확한 해명은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