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처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오천 김석진 선생 선정일제 침략 후 관직 마다하고 낙향해 은거 중 을사늑약 듣고 자결
  •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 5적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경술국치 때 일제의 작위와 뇌물 제안을 거절하고 음독 자결한 오처 김석진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 ▲ 오처 김석진 선생의 묘비.
    ▲ 오처 김석진 선생의 묘비.

    김석진 선생은 1843년 1월 21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860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 사헌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 일제 침략에 분노하며 경기 양평군 강상면으로 낙향해 ‘사안당(思安堂)’을 짓고 은거했다. 

    한편 일제는 러일전쟁 승리와 제2차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포츠머스조약 등을 통해 서양 열강으로부터 한반도에서의 ‘지위’를 용인 받은 후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우리나라를 뺏았다.

    이에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송병선 등 애국지사들이 자결순국 했다. 김석진 선생에게는 이들 애국지사들의 자결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홍만식 선생은 함께 시류를 논하던 사이였고, 민영환, 조병세 선생은 국정을 함께 했던 사이였다.

    선생도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즉각 서울로 올라와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을 처단할 것과 각 공관에 성명을 내어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할 것을 상소하는 등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미 일제는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는 등 대한제국을 착착 식민지로 만들고 있었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사라졌다. 일제는 여기다 식민지 정책 강화를 위해 ‘조선귀족령’을 만들어 김석진 선생과 같은 고위 관료와 사회 지도자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뇌물로 회유하고자 하였다. 

    선생은 일제의 작위수여 제안을 거절하고 1910년 9월 8일 서울 오현(現 서울 강북구 번동 북서울 꿈의 숲 공원 내)에 있는 조부모 묘소의 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에서 음독 자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