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독립운동가 이 갑(李 甲)선생(1877~1917)

그 같은 ‘군인’ 없었다면 ‘독립운동’ 있었을까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간부, 서우학회, 신민회 창립, 오성학교 설립 등대한제국군 복무 중에도 독립운동…평생 바쳤으면서도 ‘티’ 내지 않아

전경웅 기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1.12.31 09:58:38

대한제국군으로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했고, 서우학회, 신민회를 창립했으며, 오성학교와 서북협성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가 있다. 하지만 지금도 ‘친일파 청산하자’는 사람들은 그를 잘 모른다.

국가보훈처는 30일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갑 선생을 2012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이 갑 선생은 1877년 평남 숙천에서 이응호의 4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적 환경에서 성장했고, 상동교회 상동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이 선생은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자강의식과 함께 정치의식에 눈을 떴다. 독립협회 해산 후 일본으로 유학가 1903년 11월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대한제국 군부에서 일했다. 하지만 일본의 영향력이 급격히 커지는 걸 느끼면서 나라를 구할 방안을 모색했다.

1905년 일본이 을사조약을 대한제국에 강요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자 이 선생은 상동청년회의 애국지사들과 비밀리에 소통하며 애국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선생은 재산을 털어 서북학회를 조직하고 오성학교를 건립했다. 나중에는 협성학교 건축 비용을 대기도 했다. 또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다른 군인 출신 애국자들과 함께 참여했다.

이 선생은 1907년 군부 교육국 교무과장에 보임되었을 때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제가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자 이 선생은 황제 폐위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이 선생은 일제가 대한제국군까지 해산시키자 군부를 박차고 나와 일본육사를 졸업한 군인이었던 유동열, 김희선, 노백린 등과 함께 대한제국군 부활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신민회 인사들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했다.

1910년 신민회 인사들과 함께 망명을 단행한 이 선생은 독립운동 전략을 논의하여 러시아지역의 기지개척사업을 담당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강제병합의 소식을 들은 이 선생은 러시아 외교관, 정치가들과 교류하면서 정보를 파악하고 언론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페테르스부르그에 한인 청년양성소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선생은 과로와 압박감에 따른 건강악화로 반신 불구가 됐다. 선생은 건강의 악화로 활동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대한인 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 본부가 있는 치타로 가서 제2대 총회장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러시아 동포사회의 열렬한 환영과 지지를 받았으나 병마가 악화돼 요양차 블라디보스톡으로 거처를 옮겼다.

블라디보스톡에서도 선생은 이동휘 선생 등과 함께 광복군 정부를 구상하며 분열된 동포사회를 하나로 결속시키고 제2의 러일전쟁에 대비한 전선을 갖추어나갔다. 이런 선생의 헌신적인 활동에 재러한인 동포들는 의연금을 모집하는 등 선생의 활동에 대한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선생은 1917년 6월 13일 니콜리스크에서 41세로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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