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택, 2~3년내 실세로 등장한다"당-개인자금으로 120만 군 통솔
  • 김정일의 38호실과 39호실이 권력의 열쇠

    화수분 38호실과 39호실을 장악한 자가 굶주린 120만 군대도 좌지우지할지 모른다.

    최성재


      권력의 3요소는 인사권(조직)과 사상과 경제력이다. 군미필자 김정일은 1964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노동당으로 들어가 인사권을 장악하려고 덤볐다. 그러나 거기에 성주 동생 영주(김정일의 삼촌)가 터줏대감으로 버티고 있었다. 노동당의 조직지도부가 바로 북한의 인사권(군 인사 포함)을 쥐고 있는데, 거기서 파리장군 김정일은 과장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교활한 김정일은 우회작전을 편다. 사상으로 외곽을 때리는 방법이었다. 북한에서 사상은 선전선동부가 담당한다. 여기선 거짓과 진실은 굳이 구별하지 않는다. 예술적 감동으로 얼을 빼앗고, ‘받아쓰기’ 신문과 ‘앵무새’ 방송으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을 반복하여 국가 노예들의 뇌를 세척하면 된다. 6의 3승(216) 새끼 악마는 영화와 가극으로 항일투쟁을 조작하고 봉건타파를 선전하고 반미를 선동하여 ‘공화국’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데 성공한다. 동시에 김일성 우상화로 북한의 지배체제에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을 제공한다. 김일성 우상화로 북한 노동당은 누구나 이득을 보았기 때문에, 최소한 콩고물이라도 얻었기 때문에 이를 누구도 싫다고 할 수 없었다. 이미 남로당 포함 김일성의 모든 정적이 처단된 상황이라 이에 콧방귀라도 뀌면 바로 반동으로 몰렸다. 강제수용소의 수감자 20만 명 중 약 절반이 말반동이다.
     
      1974년 마침내 김정일은 김영주를 몰아내고 ‘당 중앙’으로 떠오른다. 새끼 악마는 선전선동부에 이어 조직지도부도 장악한다. 그 다음에 착수한 일이 경제력 장악이다. 독재자의 장남은 노동당에 39호실을 설치한다. 39호실은 수령경제(조선시대의 왕실경제인 내탕고)의 본부로서 은행과 무역회사 100여개를 통솔한다. 구상무역이든 무기장사든 금 반출이든 아편장사든 위폐발행이든 충성자금 접수든, 하여간 외화는 모두 39호실의 진공청소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에 김대중과 정주영이 직접 바친 달러뿐만 아니라 금강산과 개성공단에서 90% 이상 갈취한 달러도 고스란히 39호실로 들어갔다. 누군가 끌어들일 미래의 중국 원조금도 그럴 것이다.
     
      이해에 김정일은 김일성의 비호하에 3대혁명소조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것은 북한판 문화혁명으로 ‘사상, 기술, 문화’ 3분야의 혁명을 내걸고 기존의 조직을 모두 뛰어넘어 청년을 중심으로 관료주의와 나태함을 타파한다며 천방지축으로 날뛰었다. 무소불위! 국가보위부도 사회안전성(인민보안부)도 손을 못 댔다. 김일성은 1976년에 끝날 6개년 경제개발계획이 실패할 게 뻔해지자, 그 책임을 면하는 동시에(모택동이 대약진운동에 실패하고 비판을 받아 일선에서 밀려나자 문화혁명을 일으킨 것과 거의 똑같음) 새로운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한다며 김정일을 내세워 ‘70일 전투’를 벌여(김정일은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정하면서 ‘150일 전투’를 벌임) 정상적인 경제의 기반을 완전히 절단 낸다. 경제는 모든 분야가 골고루 발달해야 하는데, 전시적인 일회성 성과를 위해 인력과 자원과 자본을 집중시키면 그것은 전체적으로 마이너스 경제성장을 가져오고 이윽고 성장 잠재력마저 거덜 낸다. 공산경제는 크게 보면 이런 무식한 정책 때문에 절단난다. 중국에선 등소평이 4인방과 홍위병에게 철퇴를 가했지만, 북한에선 4인방에 해당하는 김정일이 2세 독재자가 되고 홍위병에 해당하는 3대혁명소조도 요소요소에 뿌리박는다.
     
      김정일은 3대혁명소조의 부장으로서 2세대의 인맥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한다. 어느새 김정일은 아비 시황제의 권력을 능가한다. 그때가 대략 1985년이다. 내각제에 비유하면, 총리가 김정일이었고 왕 또는 대통령이 김일성이었다. 1989년 장성택은 이 3대혁명소조의 부장이 된다. 2.5세대 내지 3세대의 인맥을 곳곳에 구축해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정일은 3대혁명소조의 생리와 조직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장성택이 그것을 책임진다고 해도 부처님 안의 손바닥으로 여겼던 것 같다. 장성택은 1995년에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된다. 2세대의 인사권도 반쯤 틀어쥔 셈이다. 김정일은 2004년에 장성택을 숙청해 버린다. 2006년 복권.
     
      김정일은 김일성이 죽은 해인 1994년에 38호실을 하나 더 만든다. 39호실은 당자금을 관리하고 38호실은 김정일의 개인금고를 관리한다. 이렇게 하여 수령경제는 더 비대해지고, 인민경제는 군경제와 당경제에 밀려 바짝 쪼그라든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경제총리니 경제부총리니 해 봐야 노동당 39호실이나 38호실의 실장에 비하면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 못한 허수아비다. 전일춘이나 김동운이 강성산이나 김달현 위의 실세란 말이다.
     
      2006년 핵실험으로 UN이 경제제재에 나서자 독재자 김정일은 2008년 38호실을 39호실에 통합한다. 그러다가 2009년 애송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목하면서 2010년 38호실을 독립시킨다. 스위스에서 이철이란 가명으로 1987년부터 김정일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1998년에서 2000년에는 김정은을 스위스에서 돌보던 이수용(리수용)이 2010년 북한으로 들어갔다. 전 북한 보험총국 대표였던 탈북자 김광진의 증언에 따르면, 장성택이 당경제와 군경제를 관리하고(39호실의 실장보다 높다는 말), 김정일의 비서 겸 4번째 부인 김옥이 김정일의 금고를 관리하는(38호실의 실장보다 높다는 말) 걸로 알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수용이 설령 최소 40억 달러(100억 달러가 넘을 수도 있음)의 비밀계좌를 김정은 앞으로 옮겼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이고 나머지는 대거 본인과 장성택 이름으로 옮겼을 수도 있다. 이런 것은 워낙 전문적인 일이라서 실지로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 권력의 말기에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한편 마카오와 홍콩과 중국 등의 비자금은 김정남이 관리하는 듯하다.
     
      어쨌거나 800만 명이 영실(영양실조)동무인 땅에서 이제는 김정일이 말한 군력(軍力)도 경제력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자유민주 국가에서는 경제를 살리지 못하면 대부분 실각하거나 인기가 바닥을 긴다.) 39호실과 38호실이 돈을 다 빨아들여 돈이 돌지 않아 북한에서는 대대적인 투자승수가 일어날 수 없다. 고난의 행군 시대 이래 인민군대는 군량미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여차하면 인민을 약탈하는 도적떼, 강도, 마적단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라도 38호실과 39호실을 장악하여 군경제에 은혜를 베풀면 군대를 장악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장성택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김정일 장례식에 별 네 개를 어깨에 단 걸로 보아, 이미 인맥에 이어 돈의 위력으로 군대도 상당히 장악한 듯하다.
     
      김정은은 기반이 지극히 취약하다. 모택동 사후 화국봉보다 훨씬 취약하다. 장성택이 머잖아, 늦어도 2년 내지 3년 안에 실세로 등장할 듯하다만, 그런 그도 공산당의 약탈경제를 자유민주의 생산경제로 바꾸지 못하면(그럴 능력이 있을까?), 아무리 39호실과 38호실을 장악하더라도 권력기반이 급격히 흔들릴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군사도발이나 전면 남침의 유혹은 이전보다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