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 본명(本名)은 '유리 일쎄노비치 킴'  
      
     김정일의 어린 시절 이름은 ‘유라’. ‘유라’는 ‘유리’라는 러시아 이름의 애칭.
    金泌材  기자
     
     북한에서는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점찍고 그를 민족적 지도자로 부각시키는 작업을 오래 전에 착수했다. 이 때문에 북한의 지도층 간부들은 김일성을 민족의 수령으로 만든 것처럼 김정일을 북한의 새로운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근거 없는 일들을 조작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설’이다.

    북한은 김정일이 1942년 2월 16일 백두산 밀영의 한 귀틀집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근교 브야츠크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당시 소련극동군의 정찰부대가 주둔하던 곳으로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소속 동북항일연군에 배속돼 빨치산 활동을 벌이다 1940년경 하바로프스크의 소련군 영내로 옮겨왔고, 이곳에서 1945년 광복 직전까지 머물렀다. 이 때 김정일이 태어난 것이다.

    김정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브야츠크’ 태생

    어린 김정일은 1945년 해방 전까지 4년간 연해주 지방을 전전하며 병영의 탁아소에서 성장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김정일을 알고 지내던 아우구스타 세르게예브나(여·73·브야츠크 거주)에 의해 밝혀졌다. 세르게예브나는 “김정일이 태어난 순간부터 떠난 날까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서 “그는 1941년 2월 16일에 태어났으며 어릴 때의 이름은 ‘유라’였다”고 증언했다. (조선일보 2002년 8월 23일자 보도)

    ‘비극의 항일 빨치산’의 저자인 작가 김찬성은 김정일 탄생시기인 1942년 당시 88독립특별보병여단 소속 소련인 통역관 스테판 니콜라야비치 등의 증언을 토대로 김정일의 브야츠크 출생설을 입증했다. 김찬성은 김정일이 브야츠크에서 남쪽으로 500킬로미터 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와 불로시로프 중간지점인 남(南)야영지 하마탄 부근의 소련 병원에서 의사 왈야(당시 65세)의 도움을 받아 태어났다고 말했다.

    남한에 망명한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도 저서에서 “1930년대 말에 김일성이 소련으로 넘어가 99특별교도여단에서 생활할 때 김정일이 출생해 그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유라’라고 불렀으며, 둘째 아들도 ‘슈라’라고 불렀던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황장엽, “김정일은 1945년 9월 처음으로 평양에 들어와”

    황 전 비서는 “이 사실은 기억도 생생하다. 김일성이 어느 날 빨치산 출신들을 불러 백두산 밀영자리를 찾아보라는 지시를 내리자 어느 누구도 찾지 못했다. 그러자 김일성이 직접 나서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내 ‘여기가 밀영지 였다’고 지적하고 그 뒷산을 ‘정일봉’이라고 이름 지어 주었다. 그 뒤에 거대한 화강석 바위를 구해다가 거기에 엄청나게 큰 글자로 ‘정일봉’이라고 새기고 그것을 산봉우리에 올려다 붙이는 큰 공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또한 북한을 소련의 붉은 군대가 아니라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가 해방시켰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그 유명한 ‘구호나무’(김일성 휘하의 부대원들이 항일투쟁을 하면서 김일성을 찬양하고 김정일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글을 먹물로 새겼다는 나무)가 발견되었다는 선전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 황 전 비서는 “김일성이 1940년 말에 소련에 들어갔다가 1945년 9월에 처음으로 평양에 들어왔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인데 어떻게 1942년에 백두산 밀영에서 김정일을 낳았단 말인가?”라며 이것은 역사위조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자료는 날조된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황당한 언어로 적고 있다.

    “친애하는 지도자가 성산 백두산의 초라한 통나무집에서 태어났을 때 하늘에는 밝은 별과 쌍무지개가 떴으며 천상으로부터는 한 마리 제비가 내려와 ‘전 세계를 다스릴 장군’의 탄생을 알렸다.”

    이와 함께 북한의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과 정부기관지인 민주조선은 1982년 2월 15일자 1면에 김정일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한다는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실었다.

    “김정일 동지는 항일의 피어린 나날 백두산 밀영에서 탄생하여 혁명의 준엄한 시련을 체험하며 성장하였으며, 일찍이 주체의 혁명위업을 끝까지 수행할 큰 뜻을 품고 혁명 활동을 시작하여 조국과 인민 앞에 불멸의 공적을 쌓아올렸다...(중략)”

    북한, 1982년부터 김정일 출생지 ‘백두산 밀영’으로 선전

    북한은 1982년부터 김정일의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으로 선전하고 있다. 1995년에 출간된 ‘김정일의 약력’에서도 출생지를 ‘양강도 삼지연군에 있는 백두산 밀영으로 구체화해 놓았다. 김정일이 이처럼 1980년대 들어 느닷없이 자신의 출생지를 언급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80년대는 김정일의 어린 시절을 아는 사람들이 상당수 세상을 떠난 시기로 김일성과 빨치산 활동을 같이 한 사람들 중에서 중국과 소련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대체로 이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또 1980년대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권력기반을 완전히 구축한 시기이기도 하다.

    한편,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설’은 김일성이 만주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여 국내에서 싸웠고, 중국 공산당의 지도에 의거해 싸운 것이 아니라 조선혁명을 위해 투쟁했다는 사실을 선전하기 만들어낸 것이다.

    김정일의 출생일도 실제보다 1년 늦은 1942년 2월 16일 생으로 되어 있다. 이 역시 1982년에 슬그머니 발표한 것이다. 그 전에는 1941년 2월 16일 생으로 사용했다. 이 때문에 조선중앙방송은 1981년과 1982년 2월 초순경 2년 내리 ‘지도자 동지의 40회 생일을 맞이하여’라는 기사를 내보내는 등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출처: 손광주 저, 김정일 리포트-북한 최고 권력자 김정일의 모든 것)

    김정일, 남산고중 졸업 무렵 자신의 개명 사실 급우들에게 알려

    앞서 언급했듯이 김정일의 어린 시절 이름은 ‘유라’다. ‘유라’는 ‘유리’라는 러시아 이름의 애칭이다. ‘유라’는 하바로프스크의 러시아 사람이 지어주었다. 러시아에서는 이름이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이름, 부칭, 성 순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이반’이면 아들의 부칭은 ‘이바노비치’, 딸의 부칭은 ‘이바노브나’로 된다.

    이 원칙에 따르면 김정일의 러시아식 풀 네임은 ‘유리 일쎄노비치 킴’이다. 그의 이름이 ‘김정일’로 불려지기 시작한 것은 남산고중 졸업 무렵인 1960년 여름부터다. 북한에서는 당시 신학기가 가을이었다. 졸업을 앞둔 그는 “이제 내 이름은 김유라가 아니라 김정일로 고쳤으니 앞으로 김정일로 불러 달라”고 급우들에게 선언했다.

    ‘김정일’로 이름을 고친 것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1953년 소련에서 스탈린 사망 후 3년간의 권력투쟁 끝에 흐루시초프가 정권을 잡으면서 스탈린 개인숭배에 대한 격하 움직임이 일어났고, 흐르시초프는 서방국가들과의 평화공존을 내걸었다. 이는 김일성의 대내외 정책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김일성은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흐루시초프를 수정주의자로 몰고 나가는 한편, ‘주체’를 내세우며 중·소 이념분쟁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 이름이 소련식의 ‘유라’라는 사실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 이름을 ‘김정일’로 고쳐 부르도록 한 것이다.

    김정일, “백두산은 나의 고향, 나는 백두산의 아들” 주장

    김정일이라는 이름도 처음에 ‘正一’로 썼다가 뒤에 ‘正日’로 바꿨다. 어머니인 김정숙의 ‘正’과 김일성의 ‘日’을 합성해 직접 만든 이름이다. 이는 김정일 자신이 김일성의 유일한 적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그의 이복동생인 ‘평일’과 ‘영일’은 모두 ‘한 일’(一)자를 쓰고 있다. 정일(正日) 바꾼 것은 1980년 10월이다. 이해 10월 10일 김정일은 당 내 3대 권력기구에 모두 선출된다.

    1974년 2월 김일성의 공식후계자로 등장한 김정일은 이후 30년간 북한의 2,300만 주민 위에 군림해왔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의 증언처럼 김일성과 김정일의 기록날조와 신격화 작업을 처음부터 진두지휘한 것은 다름 아닌 김정일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김정일은 1972년 5월 간부들과 백두산 산행을 다녀오면서 “백두산은 나의 고향, 나는 백두산의 아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정일의 고향이 백두산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만천하가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민족과 역사 앞에서 행해지는 김정일의 새빨간 거짓말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조갑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