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카다피, 미사일로 맺어진 '뜨거운 사이' 
      
     北, 2000년 리비아에 '노동 미사일' 수출, 6억 달러 벌어
    金泌材    
      
     북한의 김정일 독재 정권이 2009년 한 해 동안 미사일 발사에 들인 돈은 3억3000만 달러(약 4200억 원)에 이른다. 같은 해 4월 5일 발사한 장거리 로켓 발사에만 3억 달러 가량이 투입됐다는게 정부 당국의 분석이다.
     
     북한이 로켓 발사에 쓴 비용은 북한의 식량부족분 1년 치를 메울 수 있는 돈이다. 북한 공산 독재집단을 우리가 붕괴시켜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북한이 2009년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발사한 ‘스커드-C형’ 미사일과 ‘노동’ 미사일은 한 기에 각각 300만 달러와 500만 달러이다. 이날 하루 발사한 미사일(스커드 5기, 노동 2기) 값어치만 2500만 달러 안팎이다.
     
     미사일은 북한의 주요 외화벌이 수단이기도 하다. 북한은 이란을 비롯한 중동 국가들에 핵심 부품과 기술을 수출해 왔다. 일례로 2000년 리비아 독재자 카다피는 50개의 중거리 ‘노동’ 미사일을 수입하는 데 6억 달러를 지불했다.
     
     벼랑 끝에 몰린 카다피가 시위대를 겨냥해 화학무기를 사용할 경우 북한으로부터 수입한 노동 미사일이 운반체로 사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통일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1987~92년까지 이란 또는 시리아 등에 미사일 약 250기(5억 8천만 달러 상당)를 매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란은 1992년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150기를 일괄 구입(3억2천만 달러)했는데 당시 대금의 70%를 원유로 지불했다.
     
     이란과 북한의 관계는 1993년이 되면서 더욱 긴밀해져, 3월에는 혁명방위대 미사일 부대의 장교들로 구성된 대규모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다. 또 같은 해 6월에는 이란혁명방위대 최고사령관의 재방문, 12월에는 푸르선디 이란 국방군 수상의 방문도 있었다.
     
     1994년 1월에는 군총정치국장의 자리에 있던 조명록 공군 사령관(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대표단이 이란을 방문해 ‘신군사·핵협력강화협정’을 체결했으며, 이란은 북한으로부터 50억 달러 상당의 미사일을 구입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당시 미국의 유력 시사주간지인 ‘뉴스위크’(Newsweek)는 당초 이란의 대표단이 노동미사일의 구입을 위해 평양을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북한 측의 요청으로 중지됐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당시 회자되기 시작한 북한과 이란간의 ‘노동 미사일 공동개발’의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이처럼 양국의 긴밀한 연계에 의해 탄생된 것이 1998년 7월 시험발사가 실시된 이란산 중거리 미사일 ‘샤하브-3’(Shahab-3)이다.
     
     이 미사일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란판 ‘노동 미사일’이며, 이때의 발사 실험은 북한 노동 미사일의 대리시험 발사라는 성격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북한산 미사일은 제3국을 경유해 이라크에도 흘러들어가 지난 걸프전 당시에는 이라크가 이스라엘 공격용으로 북한 미사일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1995년에는 아프리카의 자이르공화국에도 미사일을 팔았다는 정보가 있다. 프랑스의 주간지 ‘르 뽀엥’(Le Point)은 북한이 자이르와 94년 12월, 스커드-C 18기를 1억 달러에 팔기로 계약 했다고 보도했다.
     
     외교통상부 산하 외교안보연구원 윤덕민 교수가 최근 발표한 ‘북한의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평가’ 보고서를 통해 현재 이란이 개발 중인 ‘사하브-4’와 파키스탄의 ‘가즈나비’는 북한의 대포동 1호와, 이란의 사하브-5는 대포동2호와 각각 동일한 모델이라며 “대포동 2호 개발은 이란과의 밀접한 협력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고 판단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보고서는 북한의 노동미사일과 파키스탄이 1998년 4월에 발사한 ‘가우리’ 미사일, 그리고 이란이 1998년 7월에 발사한 ‘사하브-3’ 미사일은 거의 동일한 모델로 보이는데, 북한이 단지 한차례의 실험발사에도 불구하고 약 50기의 노동 미사일을 실전배치할 수 있었던 것은 동일 모델의 실험발사에 따른 데이터를 서로 교환·공유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보고서는 또 “이집트·이란·파키스탄·시리아 등 제3세계의 탄도미사일 개발은 북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서 “북한은 약 500기에 달하는 ‘화성5호’와 ‘화성6호’ 미사일을 이란과 리비아·시리아·이집트·예멘 등에, 그리고 50-100기의 노동 미사일을 이란·파키스탄·리비아 등에 수출했다”고 지적했다.
     
     북한은 탄도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부품을 얻기 위해 소위 암시장도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1984년 10월 이란인과 소련인 사업가가 미국의 미사일 유도 및 야간조준장치 전자부품을 북한에 밀수하려고 한 죄로 뉴욕에서 기소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조총련 산하단체인 ‘재일조선인과학기술협회’(과협)는 IC와 컴퓨터 등의 첨단기술개발에 관련 있는 재일 조선인 과학자와 첨단관련기업의 재일 조선인 경영자로부터 연구개발 자료를 입수해 북한으로 보내는 일을 해왔다.(日 월간지 ‘JADI’ 96년 7월호 인용)
     
     [관련기사] 김정일, 걸프전 당시 연합군 봉쇄망을 뚫고 '미사일' 수출
     
     제1차 걸프전 당시 북한의 노동당 작전부 소속 요원들은 다국적군의 봉쇄망을 뚫고 스커드 미사일을 이라크로 수송한 적이 있다. 전쟁이 터지자 이라크 정부는 비공식 루트를 통해 김정일 정권에 미사일 판매를 제의했고, 당시 미국 등 국제사회의 경제봉쇄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던 북한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시 이라크에 대한 군사·경제적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걸프지역의 해상과 공중은 다국적군에 의해 철저히 봉쇄되고 있었다. 따라서 정상적인 해상수송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에 김정일은 당 작전부장 오극렬에게 당의 명예를 걸고 미사일을 운반하라고 지시했고 작전부는 이를 위한 비상작전 체제로 돌입했다.
     
     작전부는 당시 4천 톤 급부터 4만 톤 급까지의 대형무역선 20여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침투활동을 비롯한 각종 비밀활동에 동원되는 선박으로 대외적으로는 그냥 무역선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이 지시를 내린지 3일후 작전부는 두 척의 배를 선정해 분해한 개량형 스커드 미사일을 선적한 뒤 원산항을 출발해 태평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수출 첩보를 사전에 입수해 놓고 있었다. 다국적군은 이 선박을 저지하기 위해 군함과 항공기를 띄우는 등 대대적인 나포작전을 펼쳤다. 이에 작전부 공작선 선장은 원래 항로였던 이라크 항구로부터 직항노선을 버리고 시리아 쪽으로 돌아가는 항로를 택했다.
     
     다국적군은 두 선박의 신속한 항로변경을 포착하지 못하고 결국 놓치고 말았다. 두 선박은 시리아에 미사일을 내려놓고 곧바로 북한으로 되돌아 왔고, 북한제 스커드 미사일은 시리아를 거쳐 이라크로 전달됐다. 최첨단 장비로 대대적인 나포작전을 펼쳤던 다국적군으로서는 어이없는 실책이었다.
     
     김정일은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온 두 척의 작전부 선원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역시 당의 결사대는 다르다”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일은 “이런 일은 오직 나만의 전위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작전부장 오극렬을 통해 이들에게 ‘영웅칭호’를 주라고 지시했다.
     
     김정일 정권은 지금 이 시간에도 분쟁지역에 대한 무기 수출을 계속하고 있다. 수십 년간 축적된 이 방면의 경험 때문에 북한은 미국의 감시망을 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북한의 무기 공장과 과학자들은 세계의 비밀무기거래상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김정일 정권이 이 같은 무기밀매 네트워크를 통해 북한의 핵 기술, 핵물질, 심지어는 핵폭탄까지 거래 대상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다.
     
     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