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이 정권재창출에 위기감을 느끼다보니 느닷없이 노선변경을 선언했다.
    정당에 있어서 노선변경이란 일종의 ‘극약처방’이다. 이제 한나라당은 그동안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알고 있던 한나라당이 이미 아니다. 종래의 지지자들은 이제 다른 정당을 선택하거나, 다른 인물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아예 선택도 기대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됐다.

    우선 한나라당은 노선변경을 한 이상, 앞으로 아무리 급한 사정이 발생해도 ‘보수대연합’이니 하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했다. 그렇지 않아도 역대 최대의 ‘병역회피자’ 정권이 보수연합이라고 나서봤자 설득력도 없겠지만, 연합대상이 될 만한 세력 역시 자제 병역문제로 곤욕을 치룬 적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발상은 당초부터 설득력이 없을 것으로 예상은 됐었다. 그런 판국에 이제 한나라당 스스로 보수를 이탈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아무튼 한나라당이 선거를 걱정해서 노선을 변경했다면 그 득실을 잘못 계산해도 한참 잘못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자해행위를 한 셈이다.

    첫째, 한나라당의 노선변경은 지난 대선 지지자들의 다수를 드디어 배반한 것이다. 지지자 중에는 여러 부류가 있겠으나 그 주류는 좌파정권이 더 이상 계속 되어서는 대내외적으로 곤란하다는 위기감 때문에 집결했었다. 그들은 한나라당이 이 사회에 구조적으로 뿌리내린 종북 혹은 좌파 메커니즘에 대해 보다 확고한 조치를 취해주길 바랬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노선변경 이전에도 이에 대한 아무런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노선변경까지 했으니 그 결과는 보나마나일 것이다. 결국 한나라당은 종전 지지자들의 대종(大宗)을 잃게 된 것이다. 특히 지난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지지했던 노장층의 이탈은 심각한 것이다. 그들이 노선상 야당과 별 구별이 되지 않는 한나라당을 위해 투표소를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둘째, 한나라당의 노선변경은 차기 후보결정에 있어 자기족쇄가 될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극심한 당내분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후보 중에는 신노선추구형도 있고, 신노선부인형도 있을 수 있다. 또 부인형 후보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런 후보가 유력하지 않을 것이라는 법도 없다.
    실제로 지난 선거 때에 이명박 후보는 추종형이 아니었다. 집권 후에도 ‘실용주의’를 내세웠지만 사실 그는 본질적으로 노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실 보수정치의 묘미는 노선을 교조적으로 신봉하기 보다는 응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에 있는 것이다. 대통령중심제의 선거는 어차피 노선적이라기 보다 인격적 대결이 되는 수가 종종 있다. 그것은 Beauty Contest(미인대회)와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노선이 좌우하는 내각책임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지난 대선을 유의해볼 필요가 있다. 그 대선은 한국정치사에서 중대한 일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다수의 유권자들은 그때까지 한국정치의 중심이었던 직업정치인 보다는 경제실무경력이 있어 보이고, 또 구체적 실적(청계천 복원 등)이 있는 이명박을 선택했다. 유권자들은 막연한 이데올로기나 노선추종이 그들의 생활향상과 구체적으로 직결되지도 않는 한편, 때로는 그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는 감각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지금 대통령의 인기와 한나라당의 지지도가 엄청난 격차를 보이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이 대통령은 원전 수주, G20 유치 등으로 슈퍼 세일즈맨같은 인상을 국민에게 심어줬다. 또한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비교적 확고한 자세를 보여줬다. 이 모든 것은 지지층을 확대하였고, 특히 대북정책은 보수층의 생각과 그런대로 일치하고 있다. 대통령의 액션은 근본적으로 노선적 발상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대북정책만 하더라도 노선이라기보다는 결과 없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비즈니스 마인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통적 보수정치에서는 별문제가 아니던 문제가 대선후보 결정과정에서 변경된 노선의 엄격한 적용을 받을 경우, 문제는 예민해질 수 있다. 그럴 경우에 당은 노선 내홍에 휘말릴 수 있으며 이는 엄청난 당력의 소모를 수반할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그와 반대로 노선이라는 것이 허공에 뜰 수도 있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한나라당의 ‘중도…’라는 어정쩡한 노선변경은 지지층만 잃는 것이 아니라 당의 정체성을 허물고 통합성과 진취성까지도 크게 해칠 것이다.

    셋째, 한나라당은 지금도 야당이 정치적으로 이미 선점한 아젠다를 계속 따라가고 있다.
    노선변경도 사실은 그 같은 선상에 있으며 이 같은 현상은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이다. ‘친서민…’이 나쁠 것은 없지만 그것은 이미 야당이 정치적으로 선점했다. 또한 한나라당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따라서 이 부문에서 기존의 야당 지지층을 빼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선거는 실제상황이다. 그때 가봐야 알 수 있다.
    사회 제 분야와 비교해 한국정치를 편성한다면 단연 열등반에 속한다. 그러나 열등반에서도 1등은 있기 마련이다. 특히 요즘 보이는 야당 후보들은 대개 ‘고만 고만’해 보인다. 거기다 선거의 특수상황이란 것도 있을 수 있다. 여기에 지역세가 가담한다면 꼭 한나라당이 패배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상대적이고 상황적인 얘기다.

    지금 분명한 것은 한나라당이 노선변경을 통해 기존 지지자들로 부터 외면과 의심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정당의 존립기반이 소멸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당의 회생을 바란다면 새로운 세력이 당을 재창당 하든가, 아니면 당외에서라도 대체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김철 /객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