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무소에서의 부축 : 남 대위의 보살핌
  • ◆ 끔찍한 지옥의 문턱, 마음의 평안을 찾아 준 남 대위

    1977년 5월 19일, 나는 B동 2층 3호 감방으로 이감됨으로써 옹바오가 일하고 있는 A동을 떠났다. 그로부터 이틀 후, 나는 다시 D동 2층 12호 감방으로 이감되었다가 D동 2층 4호 감방을 거쳐, 1977년 6월 26일에는 D동 2층 1호 감방으로 이감되었다. D동은 사형집행 예정수인들이 많이 수감되는 곳이었다.

    사형집행을 앞둔 남월 반공 게릴라들인 와하우교 군위관급 장교들이 이곳 D동에 수감되었다가 사형되었다. 나는 D동 2층에서 D동구 대장을 위시하며 여섯 간수들의 통제를 받았다. 그중에서 나를 직접적으로 제일 많이 통제한 간수는 D동 2층 담당 남 대위였다. 남 대위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였으나 착한 사람이었다. 키는 1미터 70센티쯤으로 컸다. 그는 권총의 명사수여서 호치민의 경호원이었으나, 호치민이 죽은 후에는 이리저리 밀려다니다가 치화형무소 간수로 내려왔다.

  • ▲ 치화형무소 수감 당시 이대용 전 주월공사
    ▲ 치화형무소 수감 당시 이대용 전 주월공사

    1977년 6월 24일 새벽부터 나는 고열의 열병을 앓기 시작하여 6월 26일 오후부터는 물 한모금도 못마시고 혼수상태에 빠지곤 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은 6월 30일까지 이어졌다. 나는 거적때기 위에 누워서 온몸이 쑤셔대는 가운데 펄펄 끓는 체온을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정신이 이따금씩 혼미해지면서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가 거꾸로 되는 것을 느끼며 끙끙 앓았다. 남 대위는 혹시 내가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남 대위는 퇴근도 하지 않고 형무소 안에 대기하면서 나를 돌봐주었다.

    6월 28일에 남 대위는 여의사와 여간호원을 데리고 와서 누워서 고열에 시달리는 나를 진찰케 하고 약을 지어주었다. 7월 4일에 가서야 열이 떨어져 정상 체온으로 돌아왔고, 일어나서 죽을 먹을 수 있었다. 러닝셔츠와 팬티를 갈아입으려고 벗었더니 많은 피가 끔찍하게 뒷부분에 묻어 있었다.

    살펴보니 내가 전혀 모르는 사이에 둔부 양쪽과 허리 뒤편에 각각 손바닥 크기의 커다란 상처가 나있었다. 피부껍질은 모두 없어지고 시뻘건 살덩어리 위에 피가 뒤엉켜 있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을 1주일간 계속 앓으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고열에 신음하면서 정신을 잃었다 차렸다 하며 조잡한 콘크리트 방바닥에 얄팍한 거적때기와 담요 한장을 깐 채 고통을 이겨내려고 이리저리 몸부림 치다가 그렇게 된 것일까. 참으로 알 수 없는 큰 상처였다. 그 후 며칠 있다가, 남 대위는 경비원에게 취사장에서 끓인 더운물 한 양동이를 길어오게 하여 나에게 특별히 주면서, 이 물을 식수로도 쓰고 목욕 물로도 쓰라고 했다.

    치화형무소 격리 감방에 있는 수감자에게는 하루 2리터의 끓인 식수를 급수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마음 나쁜 경비원은 정량의 반정도만 떠주고 끝내기도 한다. 이렇듯 식수는 귀중했다. 격리 감방에 있는 수감자에게 끓인 물 한 양동이는 대단한 특혜였다. 남 대위는 경비원에게 내일부터는 매일 오전, 오후에 각각 한 양동이씩의 끓인 물을 취사장에서 받아다가 나에게 주라고 했다. 하루에 한 양동이가 아니라 오전, 오후에 각각 한 양동이씩 하루에 두 양동이의 특혜였다. 이 특혜는 내가 D동을 떠날 때까지 4개월간 지속되었다. 남 대위가 나를 일광욕 시켜줄 때는 15분간인 시간을 두배인 약 30분간으로 늘려주었다. 그러나 이 고마운 남 대위와도 이별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1977년 11월 2일 오전 6시경, 만난지 불과 4개월 밖에 안된 남 대위가 영어 통역원을 데리고 와서 나에게 다음과 같은 정중한 인사를 했다.

    “부대사님(나는 정식으로는 공사였으나, 부공관장님으로 불러주었다)께서 오늘 이곳을 떠나 AH동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조금만 가계시면 석방되어 귀국하게 될 것입니다. 비품(양동이, 식기, 숟가락)은 이곳에 그대로 놔두고, 개인 짐만 가지고 가셔야 합니다. 짐 운반은 두 명의 경비원이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부디 행운을 빕니다.”

    치화형무소에서 이미 2년이 넘도록 있었지만 간수로부터 이렇게 공손하고 친절한 말을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남 대위의 이야기처럼 나는 곧 석방되지 않고 기나긴 세월의 옥고를 더 치러야만 했다. 2년 1개월간 격리 감방에 수감되어 있다가 50여명이 함께 수감되어 있는 일반 감방인 AH동으로 이감되니, 말동무도 많고 철창 사이로 하늘과 땅이 내다 보였다. 공기의 유통도 밀폐된 격리 감방과는 달리 잘 되어 퍽 좋았다. 그리고 내가 곧 석방되리라는 남 대위의 말도 있고 해서, AH동으로 이감되어 가서 몇달 동안은 나의 치화형무소 생활 중 가장 마음의 평정을 가질 수 있는 기간이었다.

     

    ◆ 치화형무소 수감 4년 7개월, 단 한번도 면회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 신변에 위기를 알리는 징후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불안요소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1978년 1월 하순, 치화형무소장은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모든 수감자들에게 음력 명절을 경축하는 특별 가족 및 친지 면회를 허용했다. 면회는 형무소 각동 각층별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가족 및 친지들이 식품과 일용품, 의약품들을 가지고 와서, 시골장터처럼 일정한 장소에서 간수들의 감시하에 수감자들과 먹고 이야기 하며 즐기다가, 약 1시간 반의 면회시간이 끝나면 차입품을 둘러메고 감방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AH동 2층 수감자들의 가족 및 친지 면회는 1월 21일 오전 8시부터 약 1시간 반에 걸쳐 실시되었다. 외국인 수감자들에 대한 면회는 당사국 교민회장 및 교민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내가 있는 AH동 2층 2호 감방에는 한국인 4명, 홍콩인 1명, 캄보디아인 1명, 대만인 1명 등 외국인 7명과 월남인 49명 등 합계 56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면회시간이 다가오자 오직 나 한 사람만을 제외한 55명 전원이 문을 나서 복도에 정렬한 후, 간수들과 경비원들의 호위 하에 면회 장소로 향했다. 모두들 가버리자 텅빈 감방은 죽은듯이 적막에 싸였다. 외톨이 신세가 되어 홀로 우두커니 선 나는, 왜 나만 면회를 시키지 않는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지난 1977년 2월, 음력 명절 때도 내가 수감되어 있던 A동 수감자 전원의 면회가 허용되어 모두 면회를 실시했다. 그때 바로 내 옆방에 수감되어 있던 말레이시아인 림센핀도 면회를 하고 차입품을 잔뜩 받았었다. 그외의 A동 모든 수감자들이 그랬다. 그러나 그때도 유독 나만은 면회가 금지되어 독방에 무료하게 홀로 앉아 있어야 했다.

    1977년 9월 공산 베트남 국경일에도 치화형무소 수감자들은 모두들 가족, 친지들과 면회가 허용되어 내 옆방에 있던 록신부, 탄신부 등 격리 감방 수감자들도 전원 면회가 허용됐다. 그때도 수일 후에 사형을 집행 당할 D동의 와하우 교반공 게릴라 청년 장교 5명과 나만은 면회가 금지 되었었다. 왜 치화형무소 수감자 수천명 가운데 나만 이렇게 두고두고 면회가 한번도 허용되지 않을까? 계급이 높아서 그런 것일까? 그러나 그것도 아닐 것이다. 국무총리와 반공연맹이 사장을 지낸 환휘꽈트도, 문교부 장관을 지낸 고깍딘도, 귀순성장관을 지낸 호반찬도, 모두 여러차례 가족 및 친지 면회를 했다. 그들은 나보다도 계급이 낮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외국인이어서 그런 것일까? 그것도 아니다. 대만인 유일승, 홍콩인 한민, 말레이시아인 림센핀, 캄보디아인 킴쏘판, 그리고 외교관들도 모두 몇번씩 면회를 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나만 이렇게 따돌려놓고 있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내가 소위 그들이 강요하는 인민(공산주의자) 편으로의 전향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어, 내가 지치고 지쳐 굴복 할때까지 심적 고통을 끈질기게 가하는 수단의 하나로 면회 금지를 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한번도 면회를 못하는 진기록을 남기고 옥사하던가, 아니면 반 송장이 되어 출옥하게 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훗날의 일이지만 나는 치화형무소에 수감돼 있는 4년 7개월 동안, 단 한번도 면회를 해보지 못하고 온갖 병에 걸린 몸으로 옥문을 나서게 된다.

     

    ◆ 슬픈 과거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고마운 이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나는 AH동에서 E동으로, 다시 BC 동으로 이감되었다. 1975년에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한국인 14명은, 하나씩 둘씩 석방되어 1978년 초에는 4명만이 남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모두 한 감방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노동당 3호 청사요원들의 신문이 있을 때는 각기 분리시켜 격리 독방에 가두어 놓곤 하였다. 온갖 험난한 시련에 시달리는 가운데 몸과 마음은 아프고 답답하고 지루했으나, 그런대로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 1980년 1월도 마지막인 그믐날이 되었다. 이날 아침 7시 30분경, 한국인 외교관 3명과 민간인 1명은 일광욕이 허용되어 ED동 구대본부 앞 형무소 높은 벽돌담을 끼고 원을 그리며 도는 내부순환도로가 있는 곳으로 인솔되어 나갔다.

    사이공을 포함한 메콩델타의 기후는 1년이 우기와 건기의 두 계절로 나뉜다. 예년 같으면 11월 초순부터 시작되어 다음 해 5월 초순에 끝나는 6개월간의 건기 중에는 비가 내리지 않으며, 특히 12월부터 3월까지는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이 해에는 60년 주기에 두 세번 찾아온다는 기상이변이 일어나, 1월 22일부터 며칠동안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말라붙었던 길가의 풀들이 단비에 잠을 깨고, 잘 자라는 풀들은 일주일 동안에 무려 30여센티나 자라났다. 과거 격리 감방시절에는 10분에서 15분간의 짧은 일광욕을 시켜 주었으나, 요새는 60분에서 70분 간의 긴 일광욕을 시켜주었다.

    길가에는 야생 비듬이 몇포기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싱싱한 채소가 하도 먹고싶어서, 나는 길 옆 돼지가 먹는 야생비듬을 뜯을까 말까 망설이면서 그 앞을 왔다갔다 했다. 약 30분간 생각하다가 그 비듬을 뜯었다. 오고가는 사람은 없고 감시하는 간수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며, 약 80미터 떨어진 채소 밭에서는 옹바오가 다섯 명의 활동죄수를 데리고 푸른 야채 비듬밭에 인분을 주고 있었다. 옹바오는 간수들의 눈에 들어 지금은 활동죄수들의 왕초가 되어 있었다. 옹바오는 내가 들어있는 ID동의 경비원은 아니었다. 우연히 이날 먼 발치에서 서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옹바오는 밭에서 일을 하면서 흘끗흘끗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또 어떤 때는 일손을 놓고 나를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옹바오는 내 성품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소나무나 대쪽같아 구차한 짓을 하지 않는 저 천하의 고집쟁이가 왜 돼지가 먹는 야생비듬을 뜯었을까? 옹바오의 눈치는 빨랐다. 약 5분 후, 옹바오가 채소 밭에서 자라고 있는 좋은 비듬을 뜯어 들고와서 주고 돌아가더니, 조금 있다가 이번에는 씀바귀 비슷한 야채를 뜯어와서 주었다. 세번째로 그는 씀바귀 비슷한 야채를 또 뜯어와서 간수의 허락을 받고 주는 것이니, 마음 놓고 감방으로 가지고 가서 먹으라고 했다. 이것이 옹바오가 나에게 베풀어 주는 마지막 호의였다는 것을 그때는 나도 모르고 그도 몰랐다. 그 날부터 2개월 11일 동안 나는 그를 만날 수 없었으며, 석방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미로에서 생명의 불빛이 꺼질락말락 깜박이고 있던 그 어두운 시절,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구 상위와 남 대위, 옹바오가 나를 부축해 주었다. 그 고마운 기억은 내 슬픈 과거와 함께 영원히 내 가슴 속에 남아있게 될 것이다.

     

     


  • ▲ 치화형무소 수감 당시 이대용 전 주월공사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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