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초대받은 저녁식사', 반찬은... 콩나물국과 콩나물무침, 그리고 시금치

    그러나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기는 했다. 월급이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월급은 매년 초에 올랐다.  최초 몇 개월은 그런대로 세끼 밥은 먹을 수 있었지만, 인플레이션이 살인적으로 격심해서 매년 하반기에는 배를 곯아야 했다.

    어떤 교관의 아버지는 환갑이 넘었는데도, 지게에 새우젓이 든 독을 지고 다니면서 행상을 하여 가난한 살림에 보탬을 주었다. 나는 어두울 때, 낫을 들고 산에 가서 썩은 소나무 가지나 곁가지를 잘라다가, 여러 날을 냉방에서 지내는 어린 젖먹이 자식의 겨울날 밤잠을 따뜻하게 해주는 불을 지펴주기도 했다.

  • ▲ 결혼 직후 12사단 정보참모 시절의 이대용 전 주월공사와 부인
    ▲ 결혼 직후 12사단 정보참모 시절의 이대용 전 주월공사와 부인

    이러한 경제적 궁핍이 장기화되자, 어떤 교관들은 돈 많은 부패 학생들에게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주고 돈을 받는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정행위가 발각되면, 이종찬 중장은 관련된 교관과 학생들을 모두 징계 처분하여 군에서 추방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탁곡(濁曲)의 무리들은 목숨을 걸고 신성한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군인의 지휘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이종찬 중장의 지론이었다. 이러한 총장의 뜻에 충실히 따르는 교관들이 꽤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이희성(李熺性) 중령이었다. 그는 육사 8기생이며, 육군대학 학생 때 1등을 한 수재였다.

    나의 아내가 첫 아이를 출산하기 위하여 서울 친정에 가 있을 때, 그가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밥상이 들어왔는데, 반찬은 콩나물국·콩나물무침·김치·시금치·미나리·두부찌개·생선자반 이었다. 부정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라 그런 줄은 짐작했으나, 손님을 초청해놓고 고기 한 점 없는 것이 특이해서 말을 꺼냈다.

    “이 중령, 요새 월급가지고 살기가 아주 힘들지요?”
    “생각할 탓이지요. 저는 우편저금을 하면서 삽니다.”
    “어떻게요? 정희와 원배, 애들이 둘씩이나 있는데 그게 가능합니까?”
    “월급을 타면, 그저 눈 딱 감고 일부 돈을 뚝 떼어서 무조건 저금을 합니다. 허리를 졸라매고 반찬으로는 풀이나 먹고사는 거지요.”
    나는 그가 비쩍 마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머리가 우수해서, 육군대학 과목 중 가장 점수가 많은 400점 만점인 ‘군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학생이 그 시험문제를 빼서 사전에 알게 되면 단숨에 성적을 크게 올릴 수가 있다. 하루는 부정축재로 돈이 많은 어떤 학생장교가, 남몰래 이희성 중령의 관사에 찾아가서 중령의 1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돈뭉치를 생활비에 보태 쓰라면서 놓고 달아났다. 시험 문제를 며칠 안에 알려달라는 암시였다. 이 중령은 남의 눈을 피해가며 그 돈뭉치를 돌려주었다. 입이 무거운 이 중령은 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나, 약 1년 후에 나는 부인들로부터 그 이야기를 소상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 육군대학 '정보판단' 교재, 한국지형으로의 전환

    당시 우리 육군대학은 미국 육군지휘참모 대학의 해묵은 교재들을 얻어다가 번역하여 교육시키고 있었으며, 지도는 유럽지도나 미국지도를 사용했다. 총장 이종찬 중장은 우리 현실에 알맞은 전술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결혼 직후인 12사단 정보참모 시절 부인과 함께 지도를 가지고 독자적인 교재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발상을 하게 되었으며, 이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총장 주재 하에 전체 교관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한국군은 정식으로 창군된 지 9년밖에 되지 않아 유치기(幼稚期)를 겨우 벗어나서 아동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종찬 총장은 외국군 장교 경험도 많고 미국육군지휘참모 대학을 졸업하여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었으나, 교관들은 그런 발상을 꿈속에서 조차 해 본적이 없었다. 너무도 어려운 과제라서 대부분의 교관들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몇 명의 대령급 교관들이 일어나서, 한국의 지형은 주로 산악지대로 되어있고 도로망이 미흡해서 기동력이 제한되기 때문에 전술의 원리원칙을 교육시키는 데는 부적합하고, 특히 사단급 이상의 대부대 전술개발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현재와 같이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의 교재를 복사해서 유럽지도와 미국지도로 교육시키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종찬 총장은 우리 국군이 앞으로 임무를 수행할 주전장(主戰場)은 유럽도 아니고 미국도 아닌 우리나라 국토인데, 우리나라 지형을 외면하는 전술 개발은 잘못된 것이라고 설득력 있게 강조했다. 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을 끌다가 2주 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해산했다. 제 2차 회의를 하루 앞둔 날, 이희성 중령이 나에게 말했다.

    “이 중령님, 내일 회의 때 정보판단 과목을 한국지도를 가지고 만들겠다고 총장 각하께 말씀하십시오. 제가 적극 보좌해 드리겠습니다.”
    “글쎄, 그런데 현재 교관단 분위기로는 모두 부정적 시각으로 그 문제를 말하고 있지 않소.”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 둘이 한번 해보지요. 이 중령님이 책임자가 되시고 제가 보좌관을 하면 됩니다.”
    나는 겸손한 수재인 이희성 중령과 손잡고 그 일을 해내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제 2차 회의 날이 왔다. 육대총장과 참모들, 그리고 교관들 모두 합하여 30여명이 교수단 강당에 모여 회의가 열렸다. 제 2차 회의도 제 1차 회의의 재판이었다. 이종찬 총장의 설득을 교관 대부분은 현실문제가 아니라 꿈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회의는 오래 끌었으나 양쪽의 견해차가 좁혀지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찬성하는 교관은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총장의 목소리는 침통하게 들렸다. 이때 이희성 중령이 나에게 눈짓을 했다. 발언할 시기라는 뜻이었다. 나는 “각하” 하며 손을 든 후 일어섰다.
    “총장각하, 저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3개월간의 여유를 주시면, 모든 전술작전의 기본이 되는 ‘정보판단’ 교재를 한국지형에서 만들어 내겠습니다. 단, 이희성 중령을 보좌관으로 지명해 주십시오.”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내 의견은 받아들여졌고 회의가 끝났다. 나와 이희성 중령은 손이 달려 도중에 조창대(曺昌大) 중령을 또 한 사람의 보좌관으로 받아들였다. 한반도 전역의 5만 분의 1 지도를 훑어 본 후, 경기도 오산-평택 지도를 가지고 오산읍, 발안장, 진위천 일대의 산악·도로·하천·촌락·논밭들을 군사적 측면에서 분석, 연구하여 정보판단 교재를 만들어 냈다.

    총장 이종찬 중장은 매우 흐뭇해했다. 이것이 전진의 신호탄이 되어, 육군대학 30여명의 교관들은 총력을 기울여 한국지형으로의 교재 전환 작업에 들어갔으며, 약 2년 반 후에 이 사업을 성공리에 완료했다.

     

     

  • ▲ 결혼 직후 12사단 정보참모 시절의 이대용 전 주월공사와 부인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도서 출판 기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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