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동 감방 벽은 특수구조인 2중벽으로 되어있어 감방 안은 영원히 햇빛을 받을 수 없는 침울한 곳이었다. 울퉁불퉁 거친 콘크리트 바닥은 아주 지저분했고, 방 모퉁이에 뻥 뚫려있는 변기에서는 역한 냄새가 났다.

    형무소에서 지급받은 얇고 낡은 거적때기를 깔고 앉으니 한심한 생각과 함께 북한노동당 3호 청사를 직접 통제하는 김정일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그리고 그들에게 동조하여 국제 법을 어기는 베트남공산정권이 하는 짓도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내 잘못으로 인한 업보라 여겨, 앞으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일편단심 지조를 지키며 죽을 때 까지 투쟁하기로 했다.

    北으로 자의 망명을 유도하기 위한 첫 번째 신문
    "총살형에 처하겠다" VS "비엔나협정을 명심하라"

    1975년 10월 10일 아침 식사를 끝내자, 간수 두 명이 굳게 잠긴 감방 철문 자물쇠를 덜커덩 열고 나오라고 했다. 나는 그들을 따라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가서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신문대 책상이 놓여 있었으며, 한가운데 광대뼈가 권총을 차고 앉아 있었다. 그의 오른편에는 튀기라는 별명을 가진 즈엉징 특이 사복차림으로 앉았고, 광대뼈 왼쪽에는 힘깨나 쓸 만한 탄탄하게 생긴 군복차림의 사나이가 권총을 차고 앉아 있었다. 나를 체포할 때 본 낯익은 안닝노이찡 경찰들이었다.

  •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이대용 전 주월공사 ⓒ 자료사진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이대용 전 주월공사 ⓒ 자료사진

    맞은편에 준비된 피의자 자리에 그들의 지시대로 가서 앉았다. 광대뼈는 독사같은 차가운 눈초리로 나를 한참 쏘아보더니,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나도 힐끔 보았더니 일곱 가지 항목이 월남어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적혀있었다. 나에 대한 신문내용인 모양이었다. 신문이 시작되었다.

    광대뼈가 우선 성명, 생년월일, 주소, 직책 등을 월남어로 물었다. 통역은 튀기 즈엉징 특이 했다. 그의 유창한 한국말에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나는 이름과 생년월일, 사이공 주소를 대고, 직책은 주월 한국 대사관 경제공사이며 서열상으로는 부공관장이라고 했다. 광대뼈가 왜 체포되었는지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전혀 모른다고 대답했다.

    광대뼈가 언성을 높이며 남쭈띤(남조선) 박정희 집단은 맹호사단, 백마사단, 청룡여단 등을 베트남에 침략군으로 보내 수많은 베트남 양민을 학살하여 천인공노할 큰 범죄를 저질렀다는 말을 길게 하더니 “그대는 총살형에 해당 한다”고 외쳤다. 그 다음 언성을 다소 가라앉히고 “그러나 지금이라도 과거를 청산하고 진보적 민주주의(그들은 공산주의를 이렇게 부름) 편에 가담해서 인민들을 위해 일하겠다면 과거를 관대하게 용서하고 인도적인 대우를 해 주겠다”고 은근히 말했다.

    그는 또 미국정부는 반동이지만 미국인 중에는 진보적 민주주의 편을 드는 인사가 많다고 했다. 나는 이에 대항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1961년 유엔이 주관하여 제정하고, 유엔 회원국 뿐 아니라 비회원국까지도 모두 초청하여 서명을 받아 확정시킨 외교관 치외법권(면책특권)을 규정한 비엔나협정의 보호를 받는 외교관이라 당신들의 신문에 답할 의무가 없으므로 신문에 응하지 않겠다. 또 비엔나협정 이전에도 현대 세계 외교사를 통해 볼 때,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외교관이 외국 정부관리에 의해 신문받는 일이 없다. 더군다나 대사나 공사 같은 높은 지위의 외교관이 그렇게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이는 비엔나협정에 앞서는 불문율이다.”

    광대뼈는 남조선과 베트남은 외교 관계가 없기 때문에 남조선 외교관을 인정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남조선은 미제침략군과 함께 침략군을 파월해서 큰 범죄를 저질렀으니 총살형에 해당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나는 외교관계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며, 전쟁 당사국 간에도 외교관은 제3국을 통해 안전하게 본국으로 돌려보내준다고 지적해주었다. 그러면서 현재 미국과 베트남은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으나 베트남 딘바치 대사가 옵서버로 뉴욕에 가있지 않느냐, 만약 외교관계가 없다고 해서 미국 수사기관이 딘바치 대사를 구속해서 신문할 수 있는지 한번 답변해 보라고 몰아세웠더니 광대뼈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리고 내가 죽어서 한국에 돌아가지 못할 때는 할 수 없지만, 만일 살아서 귀국하게 되면 아마도 유엔에서 베트남 정부가 외교관에 대한 취급을 어떻게 했느냐고 조사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할 텐데 당신들이 유엔이 제정한 국제 법을 준수하고 외교관에게 잘해주어야 당신들에게 유리하게 말할 것이 아닌가, 베트남의 국가이익을 위해서도 나에대한 신문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의 외교관 신분에 의문이 있다면 유엔에 문의해 보라, 외교관이 틀림없다는 회신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까지 말한 나는 튀기에게 통역하라고 했다. 나는 베트남 공산당 레준 서기장, 팜반동 수상, 쭝찐 국회의장 등의 수뇌부가 유엔 가입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베트남 정부가 유엔 가입신청서를 이미 제출해놓고 그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중이라는 사실도 잘 알았다. 베트남 공산수뇌들의 갈망을 광대뼈인들 모를 리가 없었다.

    통역이 끝나자 광대뼈는 무엇인가 심각한 표정을 잠시 짓더니 “유엔에 물어볼 필요는 없다”고 간단히 말했다. 그의 음성은 기어들어가듯 저음이었다. 나는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를 잘못 다루다가는 유엔으로부터 베트남이 불이익을 받게 될지도 모르며,  그렇게 되면 베트남 공산수뇌부로부터 호된 질책을 듣게 될지 모른다는 근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나는 이 기회에 결정타를 하나 더 넣어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래서 최근에도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공산국이 비공산국이 되고, 비공산국이 공산국이 되기도 하는데 외교관만은 항상 안전하게 새로운 정권에 의해 귀국시켜 주는 것이 관례이다, 캄보디아에서 론놀 장군이 우익 쿠데타를 성공시켰을 때도 프놈펜에는 북한대사관 외교관, 중공대사관 외교관들이 미처 철수하지 못하고 잔류했으나 우익정권이 공산국 외교관들을 제3국을 통해 깨끗이 본국으로 귀국시켰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다음 당시의 주 캄보디아 북한 대사관 부공관장과 현재 나의 신분적 위치와의 국제 법상 차이점은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광대뼈는 또 무엇인가를 한참 궁리하다가 “캄보디아는 캄보디아고 베트남은 다르다”고 했으나, 기가 꺾인 듯한 소리였다. 그리고 잠시 후 “어쨌든 그대는 총살이다”고 했다.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총살, 총살 하는데 할 테면 하라. 그 따위 협박을 두려워 할 내가 아니다”고 맞받아쳤다. 이어서 “그러나 나를 총살하려면, 유엔주관하에 국제규모재판소를 설치하여 국제재판을 한 후 총살하여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절대로 북한에는 안 가겠다. 죽어도 안 간다”

    광대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책상위에 놓인 서류를 내려다 보는 시늉을 하더니 “오늘의 신문은 이것으로 끝내겠소. 곧 2차 신문을 하러 오겠소”라고 하더니 서류를 챙겨 넣고 일어섰다. 나는 안닝노이찡 광대뼈 일행의 경호를 받으며 신문실을 나와 간수에게 인도되었고,  간수는 경비원 한 명을 대동하고 외부와 차단된 복도와 계단을 걸어 올라와서 나를 감방에 집어넣고 돌아갔다.

    나는 곰곰 생각해 보았다. 외교관을 강제로 납치해간다는 것은 국제법상 위법이다. 그러나 자의에 의한 타국으로의 망명은 불법이 아니다. 내가 자의에 의해 북한으로 망명한다는 성명서를 작성하고 서명한다면, 그것으로 나의 평양행은 합법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북한노동당 3호청사 측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베트남 안닝노이찡과 협조하여 나에게 참기 어려운 굶주림, 육체적 고통, 공갈, 협박, 그리고 함정으로 몰아넣는 회유책을 쓸 것이다.

    광대뼈의 1차 신문은 의표를 찔러 잘 넘겼으나, 앞으로 계속적으로 수도 없이 많이 이루어질 2차, 3차..........10차 신문에서 어떠한 강압적인 변고가 일어날 것인가? 죽어야 할 시기가 오면 깨끗하게 목숨을 끊어야한다. 나는 결심을 더 굳게 다졌다.

    긴장 속에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10월 15일 새벽 두시 경에 눈을 떴다. 잠을 좀 잤는데도 머리는 어지럽고 피곤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정좌한 후, 두 손을 무릎위에 얹고 눈을 감은 뒤 명상에 잠겼다. 생자(生者)는 필멸, 갈 때가 되면 깨끗하게 가야한다. 나는 죽음의 검은 문앞 일보 전에 서있는 것이다.

    검은 문이 열리면 그 안으로 무아의 경지에서 들어가야 한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이다. 나는 그 검은 문 앞에서 합장하고 서서, 문이 이제나 열리나 저제나 열리나 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명상을 하고 있는 동안 마음은 깨끗하고 편했다. 어디선가 새벽 종소리가 울려 왔다. 눈을 뜨고 명상에서 깨어났다. 이때부터 나는 가슴을 에는듯한 아픔이 있을 때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정좌하고 명상에 잠겨 무아의 경지에 들어갔다.

    10월 20일경 부터 안닝노이찡 경찰로 추측되는 낯선 사람들이 수시로 나타나 복도에서 쪽문을 열고 나를 뚫어지게 들여다 보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간수는 가끔 북조선에 가지 않겠느냐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나는 단호히 “절대로 북한에는 안 가겠다. 죽어도 안 간다”라고 대답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광대뼈의 2차 신문이 곧 있을 것으로 예측하며 긴장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광대뼈는 나타나지 않았다.

     

  •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이대용 전 주월공사 ⓒ 자료사진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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