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구(倭寇)는 일본판 해적이다.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을 노략질하던 도적이었던 것이다. 섬진강의 이름에 '두꺼비 섬(蟾)'자가 붙은 연유는 왜구가 하동 일대에 들이닥쳤을 때 수 만 마리의 두꺼비들이 강으로 몰려나와 우는 바람에 혼비백산(魂飛魄散), 달아났다는 설화에 기인한다. 또 조선시대에 쌓은 낙안과 해미의 읍성들은 왜구를 막느라 세운 토성이었다.
    이처럼 왜구는 역사상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남긴 나쁜 인상의 첫 번째나 다름없다. 하지만 수천 년 역사에서 한일관계는 나빴던 적보다 좋았던 때가 훨씬 많았다. 어떤 학자들은 유사 이래 한일관계가 틀어진 적은 딱 두 번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바로 조선조 선조 임금 때의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과 36년간의 일제 강점 시기이다. 자, 그러면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4백여 년 전의 임진왜란으로 역사 여행을 떠나기로 하자.
    만약 이순신 장군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난세에 영웅이 태어난다지만 이순신 장군이야말로 왜란과 더불어 탄생하여 큰 발자취를 남기고 나라를 위해 스러져간 별이었다. 그에 비해 이순신 장군의 무적함대 거북선에 박살난 왜군의 최고 우두머리는 풍신수길(豊臣秀吉), 일본 발음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자료사진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자료사진

    도요토미는 찢어지게 가난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나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린 나이에 떠돌이 행상을 하며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던 가련한 신세였다. 작달막한 키에 요상한 생김새로 인해 '원숭이'라는 놀림을 당하고 살았다. 그러나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돌아갔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지배계급은 무사였다. 우리로 치자면 무사가 곧 양반이고, 장사꾼이나 농부는 상민이었다. 빈털터리 도요토미는 출세를 하려면 번듯한 무사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려면 우선 지체 높은 무사의 부하가 되어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물론 그 무렵에는 일본에도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었다. ‘한 번 양반은 영원한 양반’이기라도 하듯이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는 여간해서 입신출세가 어려웠다. 그 점, 도요토미는 윗사람을 잘 만난 행운아 중의 행운아였다.
    도요토미보다 나이가 두 살 많았던 그의 상전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라는 이름의 용장(勇將)이었다. 성격이 잔인하고 불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파격적인 면모를 가진 리버럴리스트였다. 그는 출신 성분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당사자만 똑똑하면 과감하게 발탁하여 중용했다. 아마 오다가 없었더라면 도요토미라는 이름도 결코 역사에 남지 않았으리라.
    주군(主君)인 오다가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고 암살당한 뒤를 이어 권력을 차지한 도요토미가 일본 전체를 손아귀에 쥔 것은 1590년이었다. 그로부터 도요토미의 빗나간 행각이 벌어진다. 첫째, 워낙 어렵게 자라난 과거의 기억이 억울했던 탓인지 최고 권력자가 되자 극도의 사치를 부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거처로 지은 오사카 성(城) 곳곳을 금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는데, 심지어는 화장실까지 온통 순금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요즈음의 벼락부자들처럼 큰 집을 마련하면 거기다 그림이니 조각품을 장식하고 싶어지는 게 예나 지금이나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도요토미 역시 미술품에 잔뜩 눈독을 들였다. 게다가 고상한 귀족 취미에 속했던 다도(茶道)까지 즐기면서 거드름을 피웠다. 그로 인해 일본에서는 도요토미의 집권기를 미술사에서 ‘아쓰지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라고 부른다.
    둘째는 해외 영토 확장의 망령에 사로잡혔다. 명나라를 굴복시킨 뒤 거대한 동아시아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남가일몽(南柯一夢)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우익 인사들이 ‘세계를 향한 웅지(雄志)’였다며 극찬하는 도요토미의 이 같은 야욕은 사실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기 이전부터 생겨났다. 어쩌면 이 또한 원숭이로 놀림 받으며 자랐던 유년기 콤플렉스의 산물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명나라를 정복한답시고 15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얕잡아 본 조선 땅에 불세출의 영웅이 버티고 있을 줄 꿈엔들 알았으랴. 거북선이라는 최신예 전함이 나타나리라고 상상이나 했으랴. 그 바람에 임진년과 정유년의 두 차례에 걸친 한반도 침공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도요토미도 허망하게 병사하고 말았다. 더구나 어린 아들에게 권좌를 물려주라는 그의 유언은 씨알이 먹히지 않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라는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했다.
    이제 이쯤해서,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친 사실에 쾌재를 부르기 전에,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뜻에서 침략 자체를 미리 막을 수 없었나 한 번 돌이켜보기로 하자. 다들 잘 알다시피 일본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선 조정에서는 사실 확인을 위해 황윤길을 정사(正使), 김성일을 부사(副使)로 일본에 파견했다. 그것이 임진왜란 2년 전이었다. 그런데 당파 싸움 탓에 두 사람의 귀국 보고가 정반대였고, 최고 지도자가 하필 그릇된 견해 쪽을 택함으로써 사전에 대비할 찬스를 놓치고 말았다.
    또 한 가지는 왜군의 막강한 무력을 너무나 도외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포르투갈 사람에 의해 일본에 화승총(일명 조총) 두 자루가 전해진 것은 1543년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10년 만에 일본인들은 30만 자루의 총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중국 외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조선 왕조에 견주어 일본은 한쪽으로는 동양문화의 진수를, 다른 한쪽으로는 서양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였음을 드러낸다.
    그러니 육지의 전투에서는 총을 앞세운 왜군에 당할 길이 없었다. 그들의 결정적인 취약점은 수많은 병력이 바다를 건너오느라 전함이 아닌 어선까지 닥치는 대로 긁어모은 것이고, 내키지 않는 전쟁에 동원되어 사기가 떨어진 자들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눈 밝은 이순신 장군이 그걸 놓칠 리 없었다.
    도요토미는 헛된 꿈 탓에 제 명을 재촉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의 헛된 꿈이 물거품이 되도록 만든 이는 이순신 장군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일본 최고의 권력자 도요토미로서는 이순신 장군이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였다. 충무공 만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