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注) 이 글은 북한에서 화폐개혁이 실시된 직후인 지난 12월7일 NK지식인연대에서 미디어부장으로 근무중인 탈북자 김대성씨가 ‘趙甲濟의 현대사 강좌’에 나와서 강연한 내용이다. NK지식인연대 사이트는 북한의 화폐개혁을 가장 먼저 보도한 매체이다.

    난리가 난 북한

    저는 2004년 2월 脫北(탈북)해, 2005년 대한민국에 입국했습니다. 그 후 자유북한방송 기자, 국장을 거쳤고 지금은 대학원 공부를 위해 자유북한방송을 휴직하고 NK지식인연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씨가 상당히 추운데, 북한은 며칠 전부터 메가톤급 한파가 들이닥쳤습니다. 화폐개혁 때문에 북한은 지금 난리가 났는데, 이 화폐개혁을 저희(NK지식인연대 정보센터)가 가장 먼저 보도했습니다. 오늘도 저희가 새로운 소식을 홈페이지에 올려놨습니다.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어제 6일까지 북한이 화폐개혁을 끝냈습니다.
    그럼 북한이 왜 화폐개혁을 했는지에 대해 저희들(탈북자)과 남한의 여러 전문가들이 여러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시장 세력을 소멸시키고, 실추된 김정일 정권의 권위를 찾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저희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강연)에 오기 전에 2008년에 내려오신 한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교수님과 만나 이번 화폐개혁과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교수님이 2008년도에 (남한에)왔는데, 오기 전 친구에게서 부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부탁이 친구의 시어머니가 일생동안 저금한 돈 60만원을 은행에서 찾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선 60만원이 굉장히 큰 돈 입니다. 일반 노동자들이 평생을 모아도 모을 수 없는 돈입니다. 이 돈을 찾기 위하여 은행을 찾아갔는데 북한 은행은 돈이 없다며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가 이 교수님의 인맥을 이용해 시어머니의 돈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교수님이 함경남도 은행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60만원이 필요하니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은행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지금 돈을 줄 수 없다"며 거절을 했습니다. 이 교수님은 은행장으로부터 거절당한 후 "약발이 약해서 안 먹히는 구나"라고 생각해 함경남도 道黨(도당) 고위 간부로 있는 친척을 찾아가 부탁을 했습니다. 이 교수님은 도당에서 압력을 넣으면 돈(저금한 60만원)을 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친척인 고위 간부가 은행장에게 전화를 넣은 후 이 교수님이 다시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이 교수님은 은행장에게 "돈을 달라"고 하자 은행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은행 금고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함경은행 금고 속에 8만원이 全재산

    이 교수님은 속으로 "아 돈을 주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은행장이 금고문을 열자 그 안에 북한 돈이 딱 8만원 있었습니다. 이 교수님은 놀라 "아니, 왜 이것밖에 없냐"라고 하자 은행장은 "이것이 함경남도의 全(전) 재산입니다. 저희가 주기 싫은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못 주는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은행장은 이 교수님에게 "이 돈도 5개 구역의 시장에서 거둬들여 비상용으로 대비한 돈이라 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교수님은 충격을 받고 은행을 나왔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북한 당국이 그만큼 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북한의 돈이 지금 다 어디 있느냐? 거의가 시장에 있습니다. 북한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들과 일반 주민들이 돈을 다 갖고 있습니다. 북한이 92년도에 화폐개혁을 할 당시엔 200원만 바꿔줬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17년 전)엔 북한 주민들이 화폐개혁을 환영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 돈이 너무 낡았기 때문입니다. 북한 돈이 얼마나 낡았냐면, 여기(남한)에서 쓰는 휴지조각 정도로 낡았었습니다. 돈이 세 조각, 네 조각으로 나뉘어 이것을 풀로 붙여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17년 전 화폐개혁 당시에는 새로운 돈을 쓸 수 있어 반겼습니다. 92년도에는 장사(시장)가 활성화되지 않았기에 화폐개혁을 해도 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없었기에 그 영향력이 적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 사망 후 북한의 식량 배급체제가 완전히 끊기고 너도나도 시장에 나가게 되면서 시장이 확대돼 북한 사회가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1990년대 초) 북한에서 市場(시장)이 확대될 즈음에 북한주민들은 직장 나가는 사람을 1등 머저리, 2등 머저리는 집에서 돼지 기르는 사람, 제일 똑똑한 사람은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 인식에 "장사하는 사람이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라는 인식이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간부도 그렇고 공무원도 일반 학생도 군인도 누구든지 장마당에 나갔습니다. 이로 인해 장마당(시장)에 물건보다 사람이 더 많았던 현상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때(90년대 초)가 북한 시장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돼 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북한 당국이 아무리 통제하고 싶어도 배급을 줄 수 없기 때문에 통제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10년 동안 지속되다 보니 북한 시장에 나가 꾸준히 장사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돈을 모으게 됐습니다.
    북한 당국이 2002년 7·1경제조치를 취하면서 구역을 정하여 시장을 합법화시켰습니다. 자릿세를 받는 방식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어느 정도 도입했습니다. 이를 통해 북한 주민들이 어느 정도 돈과 재산을 모으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하게 되니 화폐개혁을 갑자기 해버렸습니다.
    북한은 이번 화폐개혁을 통해 한 가정 당 15만 원을 한도로 100대 1의 비율로 바꿔주고 있습니다. 100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머지 돈이 모두 휴지조각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 들어온 소식통에 의하면 평양에서 도매로 백승담배(군용담배)를 사 신의주로 넘기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북한 돈 800만 원을 高利貸金業者(고리대금업자)에게서 빌린 후 3시간 만에 화폐개혁이 이뤄지는 바람에 빚더미에 앉아 결국 자살을 시도했었습니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 5층에서 뛰어내렸는데, 다리만 부러지고 다른 곳은 괜찮다고 합니다. 지금 여기저기서 소요사태가 일어난다는 소식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이 이러한 반발을 막기 위해 한 달 치 배급을 줬다고 합니다.

    북한 당국은 "이번 화폐개혁은 우리가 가장 잘 살았던, 남조선보다 잘 살았던 60, 70년대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기에 화폐개혁에 불만을 갖지 말라고 주민들에게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반발을 막기 위하여 북한 당국이 북한 주민에게 배급을 준 것입니다. 90년대 배급이 끊긴 이후 처음 배급을 했습니다. 월급도 올렸습니다.

    힘 있고 빽 있는 자녀들은 국경경비대로 입대

    이러한 조치들의 밑바탕은 북한 내부에 만연한 시장화의 흐름을 차단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세력(시장)들이 너무 커지다보니 북한 당국의 말을 안 듣게 되고, 북한 정권에 대항하는 유일한 사람들이 시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일반적으로 보위부나 안전원과 노동당에 함부로 토를 달 수 없지만 시장에 있는 사람들은 당국의 정책을 비판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이번 화폐개혁이 단행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반 북한 주민뿐만 아니라 군대 또한 의식이 변하고 있습니다. 북한 군대에는 "국경경비대에 가려면 북한 돈으로 1500달러를 내야 하고, 호위국이나 더 좋은 곳으로 가려면 북한 돈 3000달러를 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비싼 돈을 내서 군대에 가는 이유는, 일단 국경경비대에 가면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밀수를 하든 뭐를 하든 입대시 1500달러를 냈으면 제대할 때는 적어도 만 달러는 벌어서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든 힘 있고 빽 있는 자녀들은 국경경비대 같은 곳으로 갑니다. 제가 군부 쪽에서 일했기에 군부대의 생각 변화를 알고 있습니다. 과거 군대는 조국을 지킨다는 자부심과 영예를 갖고 10년 동안 복무 했는데 이제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군대의 사정이 어려우니 그런 생각은 없고 돈 버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외화벌이를 하면서 겪은 일입니다. 저희 회사 근처에 7총국 산하 외화벌이사업소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저희 회사에 와 1년 기한으로 2만 달러를 빌려갔습니다. 그런데도 갚지 않자 직원들을 보내 갚으라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는 특무부대(특수부대) 중대장을 이용했습니다. 중대장에게 “2만 달러를 받아오면 그 중 2000 달러를 주겠다”고 하니 중대장은 “알았다”고 했습니다. 중대장이 그 날 저녁 병사 20명을 데리고 그 사업소 사장 집으로 가 그 사장의 차와 재산을 다 몰수했습니다. 그 후 사장이 겁을 먹고 저희에게 빌려간 돈 2만 달러를 갚고 저희는 몰수한 차와 재산을 돌려줬습니다. 북한 군대도 돈만 주면 해결사 역할도 하고 뭐든 합니다.
    2001년도에 있었던 일입니다. 10일 동안 북한 돈 100만원을 주고 유조차를 군부대에서 빌려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불법적인 일들이 벌어졌음에도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고 오히려 잘 되도록 만들어 줬습니다. “이거 불법 아니냐?”고 물어도 “상관없다. 돈 준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말을 했습니다. 또 일을 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해 자신들이 아는 관계자에게 전화를 해 “우리 차 들어가니 잘 협조 해 달라”며 에스코트까지 부탁했습니다. 덕분에 아무런 검문검색도 받지 않고 무사히 일을 끝냈습니다. 북한 군인들도 10년 동안 청춘을 바쳐 남는 게 없는 것을 알고 제대 후 어떻게 살지에 대한 생각으로 의식이 변화했습니다. 북한 군인들은 ‘지금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것인가?’에 몰두돼 있습니다. 제가 私席(사석)에서 군 간부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 군 간부들이 “형님, 돈만 주면 김정일 모가지도 따다 줄 수 있어요”라고 합니다.

    희망이 없으니 마약에 넘어가

    북한 사회를 말하는데 마약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언론에도 많이 보도가 됐습니다. 함흥에서 150리 떨어진 신흥이라는 곳에 김정일이 아편 밭을 만들었습니다. 아편이라고 하면 듣기 거북하니 백도라지 꽃이라고 불렀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아편 진을 흥남에 있는 흥남 지하 공장에서 흔히 알려진 헤로인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을 다시 기술이 좋은 함흥 약학대학의 실험공장으로 옮겨 3차 가공을 통해 순도가 높은 마약을 만듭니다. 제가 잘 아는 친구들과 교수들이 거기서 마약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마약을 외화벌이사업 하는 제게 맡겨 중국에다 팔아달라고 부탁도 했습니다. 그래서 갈 때마다 10kg, 20kg을 가방에 담아오기도 했습니다. 북한 당국이 마약 통제(단속)를 심하게 하면 자신들이 제조 기술을 알기에 집에서 기구를 마련해 마약을 제조합니다.
    교수들, 학생들, 연구원들이 마약을 만드니 함흥이 냉면으로 유명했는데, 이제는 마약 소굴이 돼버렸습니다. 북한 마약의 70%가 함흥이 原産地(원산지)입니다. 이 마약들이 북한 전역, 중국, 남한으로 들어갑니다. 이 정도로 북한사회가 부패했습니다. 북한이 마약에 무너지게 된 이유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간부들 자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이 없습니다. 북한의 중견급 간부들이 모이면 “우리(북한)가 이렇게 가면 침몰하는 타이타닉호가 된다”라고 합니다. 북한에 ‘타이타닉’이라는 영화가 돌아서 북한 주민들이 ‘타이타닉’이 뭔지를 압니다. 북한을 걱정하는 북한 사람(간부, 주민)들은 김정일의 정책이 잘못됐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남한에 와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북한에선 북한이 그렇게 잘 못됐다는 것을 간부들조차 알고 있으면 왜 개혁·개방을 못하고 폭동을 일으키지 못하느냐?”라고 합니다. 여기(남한)는 反旗(반기)를 들면 그렇게 써줄 언론이라도 있지만 그곳(북한)은 한 마디라도 하면 바로 잡혀서 수용소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갑니다. 하루아침에 혁명이 일어나 북한 정권이 뒤집어지면 몰라도 남한식의 민주화 운동이나 폭동은 불가능합니다. 

    ‘인민의 소리 방송’ 듣고 脫北 결심

    한 번이라도 외부의 소식이나 라디오를 듣게 된다면 “이 체제(북한)를 과감하게 변화시켜야겠다”, “개혁시켜야겠다”라는 의지가 생기고 사상이 바뀌게 됩니다. 저 같은 경우도 라디오를 듣고 탈북을 결정하게 됐습니다. ‘인민의 소리’ 방송이라고 한국측에서 진행하는 방송이었습니다. 북한 체제전복을 유도하는 농도가 상당히 짙었습니다. 북한 체제를 노골적으로 전복시키라고 방송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방송(인민의 소리 방송)이 북한 주민들의 마음에 가장 와 닿습니다. 제가 KBS의 사회개혁방송도 들어보고, 일본의 NHK 한국말 방송, 연변 조선어 방송 등 많은 것들을 들어봤지만, 제일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인민의 소리 방송’이었습니다.
    그 인민의 소리 방송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탈북자 출신들도 많이 출연하고 남한의 유명한 분들이 많이 나와 북한체제의 불합리성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하고 어떤 것이 민주주의인가에 대해 강연하는 것을 듣고 저희의 생각이 바뀌게 됐습니다. 저희 친구들끼리 모여 結社(결사)도 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라디오를 들으며 “남한이 민주화를 했으니 민주화 투사들에게 가서 노하우를 전수받아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친구 세 명과 탈북을 했습니다. 당시 노무현 정권 시절이었는데, 중국으로 넘어가 한국 영사관에 가니 영사가 “무슨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 게시냐”고 했습니다. 그때 “아 이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실망을 하고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공학도였기에 이곳(남한)에서 다른 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북한에서 라디오를 들어 사상이 변했고, 북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제가 여기서 3년간 자유북한방송 일을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외부세계의 정보를 북한으로 들여보내는 것’과 ‘북한 내 親韓(친한)세력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이 한때 韓流(한류) 열풍이라고 해 마치 일부사람들이 지난 10년간의 남북교류의 업적으로 돌리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북교류 전부터 북한 주민들이 중국을 통해서 남한 영화나 미국 영화, 홍콩 영화를 봤습니다. 그것이 남북정상회담 이후 꾸준히 더 들어갔을 뿐이지, 그 이전부터 韓流(한류)는 존재했습니다. 절대로 남북정상회담을 해서, 남북교류를 통한 화해협력을 통해 한류가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과거式 對北공작을 다시 시작해야 북한 내부가 변한다”

    북한 주민들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 당국이 이것을 통제하기 위해 탄압도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국경지대에서 라디오는 숨어서 들어 단속을 못 합니다. 저희(탈북자)가 한국의 휴대전화와 중국의 휴대전화를 북한으로 보내 북한 주민들과 연락을 합니다. 북한 당국은 이를 막기 위해 과거에는 전파탐지기를 사용해 위치를 感知(감지)한 후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주민을 잡는 방식으로 했습니다. 그러자 북한 주민들이 1분 통화 후 위치를 옮겨가는 식으로 방법을 바꿔 추적이 어려워지자 당국은 전파교란을 합니다. 저희도 전파방해가 심해 목소리도 제대로 듣기 어려워 정보를 어렵게 구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북한을 변화시킬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남한에 온 탈북자, 중국에 있는 탈북자, 북한 민주화를 바라는 북한 내부세력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과거 남한의 국정원이 했던 對北(대북)공작을 다시 시작한다면 분명히 북한을 내부에서 와해시킬 수 있는 조직들이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고, 북한의 변화가 하루 빨리 다가올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그러한 것들을 안 하기 때문에 북한에 있는 주민들이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도 同調(동조)세력이 없는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못 하고 있습니다. 간부들도 일어나고 싶은데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USB에 한국 콘텐츠를 담아 北에 들여보내

    저희(NK지식인연대)도 북한의 변화를 위해 USB에다가 한국 콘텐츠물을 담아 북한에 들여 보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해 북한을 변화시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북한에 200만대의 컴퓨터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상류층은 컴퓨터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요구하는 것들이 영화뿐만 아니라 다큐나 남한의 발전과정, 정치적 민주화 과정에 대한 정보입니다. 

    최근에 온 한 탈북여성은 저희에게 포르노를 많이 담아달라고 해서 놀란 적 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묻자 이것을 간부들에게 뇌물로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간부들이 이것을 봅니까?”라고 하니 이 여성은 “간부들이 인생이 무료해서 그런 것들을 돌려 봅니다”라고 하며 저희에게 많은 기술과 정보를 제공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토론해 보고 도와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북한 간부들이나 일반 주민들은 변화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소식도 알고 싶어 합니다.
    북한의 인권은 열악합니다. 감옥에서 獄死(옥사)해도 시체를 돌려주지 않습니다. 당과 국가에 죄를 저질렀는데, 죄를 씻지 못하고 죽었다며 더 큰 죄로 봅니다. 북한에서 제 친구가 공개 총살당했는데, 시체를 찾지 못하였다가 경찰에게 물어본 후 시체를 찾아 산에 다시 묻어줬습니다.
    여기(남한)에는 막연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평양에 2박3일 관광코스로 다녀와 북한이 살 만한 곳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을 트럭에 실어 북한에 보내 체험을 하게 해야 합니다. 제가 남한에 와서 좌절을 느꼈을 때가 지난 해 광우병 운운하면서 촛불시위 할 때였습니다.

    우리는 미친 쇠고기를 먹고도 가만 있었다

    “북한은 썩은 소고기를 가져다 먹여도 별 말을 안 하는데, 이 사람들은 얼마나 배가 불렀으면 이럴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4년도 저희 부대에 쇠고기가 떨어졌습니다. 독일에서 200톤 정도가 들어왔는데, 후에 알고 보니 그것이 독일에서 광우병에 걸려 매장하려다가 북한으로 보낸 소였다고 합니다. 저희는 그렇게 먹고도 살았는데, 있지도 않은 공포를 조장하는 사람들은 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광화문에 탈북자들 1000여 명이 모여 촛불 시위 반대 시위를 했습니다.
    사실 두려운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5만 명 정도가 모여 깃발을 들고 서 있어 위압감을 느꼈습니다. 저희가 집회를 하고 있는데, 지나가며 야유를 퍼붓고 우리를 향해 ‘개××’, ‘배신자 ××들’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그런 사람들은 트럭에 실어 북한에 다 보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몇 달만 옥수수죽의 통강냉이를 먹으면서 김정일의 정치가 얼마나 혹독하고 가혹한지 경험해봐야 남한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한 세상인지 알 것입니다.
    탈북자들이 남한에 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지만, 1년, 2년 지나 3년 정도 되면 자아 정체성을 찾고 남한과 북한에 대한 비교를 확실히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자신의 가족들이 피해를 볼까 봐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목소리를 내고, ‘내 권리는 내가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현재 남한에 탈북자들이 1만7000여 명 정도 왔고, 탈북자 단체도 30여개 됩니다. 저희는 생각하기를 앞으로 10만 명 정도 더 오고, 북한의 고위층들도 탈북하고, 국회의원도 탈북자 중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탈북할 때 지도 한 장을 들고 왔습니다. 베트남을 거쳐 캄보디아를 통해 왔습니다. “탈북할 당시 나에게 정보를 알려주었다면 내가 좀더 편하게 왔을 텐데”라는 생각에 한이 맺혀 지금은 제가 인권단체와 교회를 통해 탈북자들을 직접 데려오는 활동을 합니다.

    “세계가 놀랄 脫北뉴스 만들겠다”

    회령의 人民軍(인민군) 1개 中隊(중대)를 西海(서해)상으로 탈북 시킬 계획을 했었습니다. 인민군대는 무장을 한 채로 탈북을 하고 우리는 길만 안내하기로 했습니다. 陸路(육로)를 통한 탈북은 안 되고, 배를 구하여 NLL을 통과해 한국으로 간다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중개인이 다른 일 때문에 중국 공안에 체포되는 바람에 이 계획이 무산된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북한군대를 탈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직된 무장병력이 탈북하면 북한정권에 큰 타격이 되고, 남한 내 좌파들의 기도 꺾일 것입니다. 더 많은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모습이 북한에 대하여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좋다는 것을 자연히 선전하는 것입니다. 저희(탈북자, 북한주민)들은 라디오(對北(대북)방송)를 들으면서도 “저기(남한)에 간 사람들(탈북자)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에 대해 항상 궁금해 하고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최근 탈북하신 어떤 분은 북한에서 라디오로 극동방송을 5년 동안 매일 들었다고 합니다. 이 분이 원래 기독교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고 상관도 없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극동방송을 왜 들었냐면, 극동방송 맨 끝에 10분간 탈북자 코너가 있는데, 이 10분짜리 코너를 듣기 위해 극동방송 2시간을 다 들었답니다. 이 분은 방송을 들었고 결국 기독교인이 돼 탈북을 했고 지금 남한에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북한 정권에 대항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반역이 탈북하는 것입니다. 탈북자를 북한에서 남한으로 데려오는데 500만 원이 듭니다. 함흥에서 출발해 중국에서 서류를 고치고 비행기를 타 남한에 도착하니 보름이 걸렸습니다. 500만 원을 주니 국경경비대 중대장, 정치지도원, 소대장들이 모두 고무바지를 입고 이 탈북자를 고무보트에 이고 중국까지 데려다 줬습니다. 중국에 넘어오니 중국 안전부 차가 대기를 하고 있었고, 이 차를 차고 대련으로 와 남한으로 들어왔습니다. 돈만 주면 북한은 군인이든 당·간부든 누구든지 다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한 활동을 해야 합니다. 탈북자 단체들이 이러한 활동을 하고 있으니, 이들을 지원해준다면 새로운 뉴스거리로 북한을 깜짝 놀래 킬 수 있는 것들을 만들겠습니다. 대한민국을 오늘과 같이 세계 10위권의 강국으로 만든 여기 계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