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기천 조선일보 논설위원 
    ▲ 김기천 조선일보 논설위원 

    2000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부시 후보는 '온정적 보수주의'를 내세우며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주도해왔던 교육과 빈곤, 보건문제를 공세적으로 제기했다. 그는 집권 초기 '낙제학생 없애기(no child left behind)' 법안을 통해 저소득층 지역의 공립학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65세 이상 노인들을 위한 메디케어의 약값 보조도 늘리는 등 빈곤층과 약자를 배려하는 정책을 폈다.

    영국 차기 총선에서 집권이 유력시되는 보수당의 캐머런 당수도 '현대적인 온정적 보수주의' 기치를 내걸고 환경과 사회정의 분야에서 노동당 못지않게 적극적인 공약을 내놓고 있다. 클린턴 전(前) 미국 대통령이 세금 감면과 범죄 퇴치 같은 공화당의 어젠다를 받아들이고,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대처리즘의 계승을 선언한 것처럼 우파 지도자들이 좌파 정당의 정책을 수용하면서 '중도화'하는 게 요즘 추세다.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실용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중도노선은 정치적 지지기반을 넓힐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전략이다. 그러나 경제 성적을 포함한 종합평가는 엇갈린다. 클린턴과 블레어,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을 비롯해 좌파 지도자들 중에는 중도노선으로 성공한 사례가 적지 않다. 반면 '따뜻한 보수'나 '온정적 보수'를 내걸고 성공한 우파 지도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부시의 온정적 보수주의도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온정적 보수주의 자체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기보다는 성과를 재는 잣대와 기대치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좌파 정권이 우파적 정책으로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는 게 우파 정권이 좌파적 정책으로 분배와 복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보다 쉽다. 좌파 정권은 성장친화 정책을 내걸어 기업과 투자자들의 불안감을 덜어주는 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은 기대할 수 있다. 경제가 성장하면 복지 문제의 해결도 한결 수월해진다. 반대로 분배와 복지 정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그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분배'를 잡으려다 '성장'마저 놓치게 될 우려도 있다.

    이명박 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중도 강화' '중도 실용' 노선도 그럴 위험을 안고 있다. 우리 사회가 극단적인 좌우 이념대립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대통령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수긍할 부분이 있다. "좌파 정책이라도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좋은 게 있다면 배워야 한다"는 말도 맞다.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서민을 배려하겠다"는 데 대해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다만 대통령의 친(親)서민 행보에 맞춰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 '맞벌이 부부 보육비용 지원', '기숙형 고교 기숙사비 경감' 등 복지성 예산 사업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은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그 하나하나는 나름대로 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사업들을 한꺼번에 추진하겠다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글로벌 경기침체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지출 확대로 올해 재정적자는 51조원에 이른다. 내년에도 수십조원의 적자가 예상된다.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3%대로 떨어진 상태다. 세수가 늘어날 여지는 점점 줄어드는데 복지 지출을 마냥 늘릴 수는 없다. '생계형' 불법과 탈법은 눈 감아줄 수 있다는 식의 정책이 나오고 있는 것도 문제다. 최근 뉴라이트 계열 시민단체의 토론회에선 "중국집에서 스파게티를 내놓는 것 같다"며 원칙 없는 포퓰리즘의 부작용에 대한 경고가 나오기도 했다.

    로버트 배로 하버드대 교수는 온정적 보수주의를 비판하면서 "빈곤 문제에 대한 최상의 해결책은 소득 불균형을 줄이는 게 아니라 평균 소득을 늘리는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파이(pie)를 먼저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다. 정치적 계산을 떠나 진정으로 서민을 위한다면 이 정부가 애초 내걸었던 '활기찬 시장경제'에 대한 신념을 잃지 말아야 한다.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해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게 중요하다. 그게 흔들려서는 중도실용 노선도 표류하기 십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