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교수. ⓒ 뉴데일리
    ▲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교수. ⓒ 뉴데일리

    글로벌 금융위기로 선진국이 입은 가장 큰 상처 중 하나는 '연금의 위기'일 것이다. 고령화에 따라 덩치가 커진 연금은 높은 수익을 찾아 전 세계의 투자처를 찾아다녔고, 이것이 신용 거품을 만들어내는 한 원인이 됐다.

    경기 회복이 늦어지면서 수십년간 일해 만들어 놓은 연금이 훼손된다는 것은 급격한 실업률 상승과 함께 경제운영에 어둡고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인구구성이 젊고, 연금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신흥국들이 '잃을 것이 없는' 상황과는 대조적인 구도다.

    최근 여러 가지 사회보장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한 한국은 선진국과 신흥국의 중간 정도 위치이다. 공적 연금으로서의 국민연금이 제대로 정비된 것이 1999년. 기업이 사외(社外)에 자산을 적립하는 방식의 퇴직연금제도가 개시된 것이 2005년 말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일정한 경제기반을 가진 사람들은 노후 대책을 위해 한 번도 무너진 경험이 없는 부동산 시장을 이용해 왔다.

    하지만 인구가 늘지 않는 사회에서 부동산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게다가 이대로는 연금에도 기대할 수 없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서는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동시에, 선진국조차도 크게 웃도는 속도로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다.

    젊은 노동자들이 감소하면 연금 급부를 유지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보면 제도 성립 시에 60세 이상이어서 연금 납부 대상이 아니었거나, 체납으로 연금을 받을 자격을 잃은 사람 등 공적 연금에 '사각(死角)'이 있다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노조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등의 이유로 퇴직연금제도는 기업이 퇴직 시에 퇴직금·연금의 액수를 보증하는 확정급여형(DB)이 압도적인 것 같다. 그런데 미국 GM의 예에서 보듯이, 이 경우 기업연금이 거액의 회사 채무로 연결되기 쉽다는 점도 불안정 요소이다.

    이미 경제성장에서의 '인구 보너스'에 기대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제도적으로도 장래의 안정성이 보증되지 않는 구조 속에서, 안정된 취업의 기회마저 제한돼 있다면 젊은 층이 아이를 가지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조로화(早老化)'의 악순환을 막을 수 없다.

    현재의 위기 속에서 정치의 관심은 비정규직 문제와 단기적인 고용창출 퍼포먼스로 쏠리기 쉽지만, 한국의 경우 아직 노동시장 전체의 효율성에는 큰 개선의 여지가 있다. 인구 면에서도 아직 30대는 그렇게 크게 감소하지 않았다. 더욱 포괄적인 개혁으로 젊은 세대의 취업문제를 완화하고 장래 불안을 줄여주면 인구감소 문제는 반전도 가능할 것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의 세계경쟁력 랭킹에서 한국의 순위는 고등교육 및 훈련과 기술수용 적극성 등에서 12~13위 수준이다. 그러나 노동시장에서는 해고비용에서 134개국 중 108위, 노사협력에서 95위, '고용경직성'에서도 65위로 참담한 수준이다. 외환위기 때에는 서구식의 고용·해고 유연성에 중점을 두었지만, 그 달성도가 높다고는 할 수 없다. 반면 임금유연성에서는 43위로, 실제로는 일본처럼 고용·해고보다 임금과 노동시간을 조정하고 있다.

    후자의 유연성을 우선하려면, 노사대화의 추진과 함께 임금피크제도 등을 도입하고, 직무급의 전제가 될 수 있도록 직무의 시장가치를 객관적으로 잴 수 있는 자격과 제도를 충실화해야 한다. 또 전자를 우선하려면 사회적 안전망과 함께 민간 부문에서 직업훈련, 인재 유동화 비즈니스를 진흥시켜야 하며,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으로의 이행을 추진해야 한다.

    금융 개혁과는 달리, 노동시장 개혁에는 이민(移民)의 비중이나 사회 관행의 차이, 노사대화의 역사와 정치성 등 각국 고유의 요소가 비교적 크다. '압축성장'을 이뤄낸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오랜 시간을 들여 성장한 선진국에는 없는 사회적 갈등이 존재하고, 노동부문은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금 등 시장제도는 노동시장의 모습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데, 타국의 제도를 베껴서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기는 어렵다. 한국이 스스로 설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고령화 사회까지 시간이 없다. '압축성장 사회의 안심설계'가 선진화, 또 지속적 성장을 위한 핵심과제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조선일보 7월3일 경제초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