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 한국영화는 우리만의 영화학으로 완성된 영화사조가 아닌 서구의 사조로 된 영화학에 의해 결론지어지고 구체화되었고, 그건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생각해보라.
    한국만의 영화사조를 만들어 놓은 한국영화학은 존재하는가? 없다.
    있어봤자 시대적으로 일제시대와 독재시대, 군부독재의 시대, 민주화 시대 등 시대적으로, 정치적인 시각으로 나눠지다 보니 왜곡된 문화 사대주의와 함께 피해의식에 휩싸인 채 스스로 자신들의 영화사조 만들기를 포기하고 그간의 한국영화에 대한 부정성을 내포한다.
    이런 상태에서 던져진 ‘다양성영화’라는 생소한 단어는 이런저런 영화계의 문제점들을 드러내는데 톡톡한 몫을 하고 있다.

    혹자들은 ‘다양성영화’가 독립영화를 죽이고, 독립영화를 상업영화로 변절시킨다고 목에 핏대를 세운다.
    과연 그런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다양성영화’라는 말은 단지 형체가 없이 던져진 말이고, 지금 그 말의 영화적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들이 여기저기서 펼쳐지고 있다.
    ‘비상업영화’라는 단어의 조합이 나오고 있고, 나 역시 이 칼럼을 통해 ‘다양성영화’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 중이다.
    ‘다양성영화’라는 것은 여전히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지, 어떤 규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영화계에서는 이 ‘다양성영화’라는 말에 그토록 목에 핏대를 세우며 달려드는 것일까?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전의 서구영화학에 근거한 이론적 사상에 기반한 영화에 대한 첫 저항이거나 몸부림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역사가 10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한국영화만의 영화학에 의한 영화사조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으로 던져진 화두가 어쩌면 ‘다양성영화’일지도 모른다.
    영화사 100년에, 영진위 홈페이지에 떡 하니 ‘세계 5대영화 강국실현’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나라에서 자신들만의 영화학에 의한 사조 하나 없다는 것은 오히려 창피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독립영화의 말살이나, 상업영화로의 변질 운운하는 것일까?
    동의를 하든 안 하든 발생하지도 않을 상황에 대한 그런 피해의식은 문화사대주의와 서구영화에 대한 열등의식의 발현이라고 밖에는 내게 인식되지 않는다.
    전두환 정권의 3S정책에 의해 에로물이 창궐하던 80년대의 영화들은 과거를 부정하고 창피해 하는 이들에 의해 90년대 들어 비디오로 전락하고, 이젠 그마저도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 시대에도 수많은 걸작들이 있었음에도 단지 군사정권시대의 희생양으로만 시대적 구분을 통해 영화인들 스스로 한국영화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점철한다.
    가까운 일본에서조차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에로영화 시대의 영화들을 ‘로망포르노’라는 기가 막힌 영화사조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그 안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와 새로운 감독들을 재발견하는 멋진 작업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저 과거의 그런 영화들에 대해 피해의식만을 가져야 하는가?
    과연 이게 옳은 것인가?

    어쩌면 ‘다양성영화’라는 말은 이런 한국의 영화학과 영화인들의 의식에 돌멩이 하나를 야무지게 던진 것과 같다.
    이제 영화인들은 쓸데없는 피해의식에 쌓인 공포감 조성이 아닌 이 것이 무엇이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되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형식을 만들어 한국만의 영화학과 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비상업영화’라고 불러도 좋고, ‘한국형독립영화’라고 해도 좋고, ‘저예산상업영화’라고 불러도 좋고, 그냥 ‘다양성영화’라고 하면 더 좋겠다.
    어찌되었든 영진위에서 던진 이 재미난 화두는 서서히 한국영화의 영화학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의식을 요구하고 있고, 그 요구를 수용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혹자는 굳이 기존의 영화학과 사조를 기어이 한국이란 이유로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
    참 답답하다. 그렇다면 홍상수의 영화적 형식을 얘기하면서 우리나라의 영화적 기준이 아닌 프랑스의 누벨바그니, 누벨이마쥬니 하는 말로 하면 좋은 것인가?
    맞지도 않은 서양의 옷을 가져와 자기 몸을 그 옷에다 맞추는 것과 뭐가 다른가?
    21세기는 문화전쟁의 시대라고들 한다.
    자신들만의 문화적 성립은 전쟁터의 총알과 같다.
    총알이 없다면 그 전쟁은 패하는 것이고, 당연히 문화식민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자.
    한국영화는 무엇인가?
    단지 한국말로 하고, 한국의 자본으로 만들어지면 한국의 영화인가?
    툭하면 한국영화는 문화의 주체, 문화의 혼이 담겨있다라고 말을 하면서 문화적 주체가 되기 위한 한국의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영화학이나 사조 하나 없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919년 단성사에서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김도산 감독)’가 상영된 이후로 이제 한국영화사 100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아직 한국의 영화학이나 사조 하나 없이 그저 서구의 사조로만 한국영화를 재단해야 한다면 그건 이미 의식적 식민지 상태라고 봐도 하등 극단적인 표현이라고 보기조차 어렵다.
    이건 아니지 않은가?

    이런 상태에 처음 던져진 말이 ‘다양성영화’라는 말이고, 이 것은 과거종결형이 아닌 미래지향형의 단어다.
    그러므로 아직 완전한 형체가 없다.
    영진위에서조차 다양성영화에 대한 하드웨어적인 형식은 만들어가는 듯 하지만, 아직 소프트웨어적인 의식의 형태, 즉 영화학이나 사조로의 형식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이 상황에서 ‘비상업영화’든, ‘다양성영화’ 그 자체의 언어든, 담론을 만들고 한국의 영화학을 발전시키고 사조화하는 작업은 시작되어야 한다.
    쓸데없이 독립영화를 상업영화로 변질시킨다는 한심한 발언 따위를 할 시간이 아닌 것이다.
    맞아 죽을 각오로 한마디 한다면 지금의 한국 독립영화를 본질적으로 변질시킨 것은 단체를 만들고 그 단체를 무소불위의 권력화를 만들어버린 바로 그 모체들이다.
    어차피 독립영화라는 단어도 프랑스의 미술혁명 ‘앙데팡당’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영어적 이름이야 그렇다 쳐도 한국의 영화학적으로 새롭게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그럼 쓸데없는 공포심 조장하면서 피해의식 갈취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자신들도 한국의 영화학에 근거한 사조를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떨까?
    이번에 시작된 다양성영화에 대한 담론은 여기서 그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한국의 고전영화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영화학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한국영화에도 얼마든지 외국의 영화사조 따위와는 확연히 다른 좋은 영화들이 많고, 그런 영화들을 찾아 사조화하면 숨겨져 있던 좋은 감독들도 발굴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국영화의 뿌리 찾기를 시작하는 것이 지금 현재 영화인들이 할 일이다.
    우리의 영화를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형식으로, 우리만의 영화학으로 만들어 놓는 것.
    그럼으로 해서 서구의 영화사조에서 벗어나 100년이 되어가는 역사에 맞는 가오를 좀 세워보는 것은 어떤가?

    폼 나잖아? 그게 과연 잘못된 것인가?
    ‘다양성영화’라는 논제에 대해 의미 없는 비판을 할 것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우리만의 영화학을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떤가?
    언제까지 칸에서 상 받은 것이 엄청난 뉴스가 되어야 하고, 오스카 시상식에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기 위해 우리들끼리 별 짓 다하는 한심한 짓거리를 계속 봐야 하는가?
    그렇게 해서 후보에 한번이라도 오르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생각만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쪽팔림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이번 기회에 ‘다양성영화’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영화인 스스로가 던져보고, 그 영화사조를 만드는 것이 어떤가?
    그리고 이게 시발점이 돼서 90년에 빛나는 한국의 영화들을 우리만의 언어로 재발견해서 한국의 영화학을 새로이 정립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영화가 영진위 캐치프레이즈처럼 세계 5위안에 들거나, 지속적인 발전을 하기 위해서라도 이건 기본이자, 필수조건 중 하나인 것은 확실할 것이다.

    그럼, ‘다양성영화’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다양성영화는 이런 것이다.
    컴퓨터의 발달로 인한 1인 미디어 시대에 맞는 무궁무진한 아이디어 발굴과 다양한 형태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한국영화의 새로운 도전.
    그 원동력은 기존의 고정화된 상상력을 뛰어넘는 창의적 의식이며, 다수가 아닌 소수의 새로운 관객 창출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한국영화의 시도가 바로 ‘다양성영화’라는 것이다.
    이미 의식의 고정화가 이루어진 한국 독립영화의 한계를 넘고, 상업영화와는 그 차별성을 두며 새로운 중간단계의 형식을 이루어야 한다.

    무수히 많은 컨텐츠를 필요로 하는 시대에 맞게 초저예산의 제작비를 가지고 다양한 소스를 가진 스타일의 컨텐츠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고, 상업영화의 의식적 활로를 모색한다.
    그렇게 상업영화의 다양한 영화 제작에 밑거름이 된다.
    다큐니, 단편이니, 장편이니 하는 형식의 규제도 받지 않고, 각 개인의 풍부한 상상력을 집결시켜 마음껏 영화적 의식의 확장 작업을 실험하는 것으로 ‘다양성영화’는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 한국영화에 절실하게 필요한 부분이 난 그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마침 그 안에 ‘다양성영화’라는 단어가 던져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라는 질문은 나에게 던질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그건 영화인들이 같이 고민해야 할 문제고, 논제이지 나 혼자 주절거린다고 해서 될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싸우지 말고 다같이 힘을 모아 이번 기회에 한국의 영화학을 제대로 한번 세워서 말 그대로 한국의 스필버그니 뭐니 하는 서구의 기준에 맞춘 말이 아닌 제 2의 하길종 감독이니, 제 2의 누구니 하는 말이 들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야 한국에서는 스스로를 거장이라 말하는 감독이 외국의 감독 앞에서 ‘헐리웃 가면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뭣 같지도 않은 말도 나오지 않을 것이고, 일본의 감독이 한국의 관객 앞에서 이젠 지긋지긋해 자기도 안 찍는 영화를 한국은 왜 계속 찍어대는지 모르겠다는 비아냥도 듣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