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당이 서울광장 사용을 신청했지만, 이미 다른 단체에서 집회신고를 해놓아서…."

    머리를 염색한 서울경찰청장이 기자간담회에서 입을 뗐다. 피곤한 날의 연속인 그에게 한 가지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오늘 서울광장의 '합법적' 사용자는 자유총연맹이다. '승용차 요일제 자율참여 캠페인' 집회신고를 미리 해놓은 것이다. 이 단체의 총재는 3선 국회의원 출신으로 대통령의 중학교 4년 후배다. 물론 행사는 실제로 열리진 않는다.

    서울광장을 내주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지 모른다. 교수들은 릴레이로 시국선언을 하고, 대학가와 각종 사회단체·민노총·정치권으로 사발통문을 돌려 총동원령이 내려진 상태다. 작년 촛불시위의 '영광' 재현을 위해 이날을 벼르고 있었다. 전문시위꾼, 하늘이 두 쪽 나도 이 정권과 같이 못 가겠다는 세력, 이들의 '선동'에 넘어간 다수들이 모일 것이다. 이들이 도심을 제 안방인 양 날뛰도록 정권이 허락할 리 없다.

    그러니 자유총연맹의 '유령 행사'는 기발해 보인다. 그런데 효과가 있을까. 광장 사용을 불허해서, 이들이 고분고분 시위를 그만둘 리 없다. 어느 날보다 서울 도심은 더 '발작적인' 혼란에 빠질 것이다. 무엇보다 광장을 지켜보는 '관중'의 반응이다. 현 정권의 고충을 읽고 광장 선점 기술에 감탄하기보다는 '궁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얼마 전 광장에 32대 경찰버스로 차벽(車壁)을 쳤을 때 "민중의 지팡이는 이제 텅 빈 광장까지 보호하는군" 식의 조롱과 비슷하다.

    어느 정권이나 적대 세력은 늘 존재한다. 하지만 이 세력은 예상되기 때문에 크게 위험하지 않다. 진정 위험한 것은 친구들 및 심정적 방관자들의 변심이다. 정권이 동력을 잃는 것은 이들의 애정이 식고 등을 돌릴 때다. 요즘 그런 상황이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어 현 정권을 찍은 집사람도 냉정해졌고, 친(親)대기업 정책의 '혜택'을 받은 대기업 임원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친구인 고위공무원조차 "대통령은 아직 기업인 같다"고 사석에서 말한다.

    정말 대통령은 대기업에서 샐러리맨 신화를 만들었던 것처럼 밤낮없이 일하는 중이다. 외국 정상들에게 직접 구운 고기를 접시에 나눠주고 'MB' 실전영어로 대화도 한다. 우리 기업의 해외진출과 투자를 유치해낸다. 미국 등 우방과도 사이가 좋다.

    하지만 그는 오늘 같은 날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줄은 모른다.

    "광장에서 집회를 하라. 대통령을 성토하고 정권을 비판할 자유가 있다. 다만 차도로 나오거나 기물을 파손하는 등 불법에 대해서는 법대로 하겠다. 절대로 양보하지 않겠다. 내 임기 안에 법질서만은 꼭 바로 세우겠다. 국민도 도와줘야 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광장 쟁탈전이 아니라 떠나는 민심을 내 쪽으로 끌어오는 데 있다. 그런 그가 지도자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정위(正位)'를 잊고, 늘 잔기술을 찾는 격이다.

    작년 촛불시위 때 사람들은 용기 있게 광장에 나서는 그를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는 '청와대 뒷산에서' 광화문 일대가 촛불로 밝혀진 것을 바라보고, 함성과 함께 오래전부터 즐겨 부르던 아침이슬 노랫소리도 들으며 지냈다. 그래서 임기 첫해를 그냥 보냈다. 이런 얘길 하면 청와대 측근들은 수치에 떨지만, 그때가 교훈으로 남은 것 같지는 않다.

    특히 국론이 팽팽하게 갈리는 정책 현안에서 대통령이 앞에 나서 국민을 설득하거나 정면 돌파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대통령이 '오만과 독선'이라는 비판을 그렇게 받으면서도, 실상을 보면 국정의 핵심 목표 어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게 없다.

    국가의 앞날이 걸린 것처럼 요란 떨었던 미디어법도 여론의 반발에 놀라 슬며시 있는 듯 없는 듯해졌다. 아예 안 꺼냈으면 소모적인 분열은 없었을 것이다. 북한에 대한 PSI(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도 참여한다고 했다가, 반발하니 안 한다, 그러다가 다시 한다는 식이다. 개성공단 존폐도 열었다 닫았다 한다.

    22조원을 쏟아 붓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운명은 어떨까. 시중에는 '대운하설'이 파다하게 퍼져 있다. 아직 '미련'을 못 버린 대통령이 '할까 말까' 여론의 눈치를 보는 걸로 의심한다. 그는 "대운하를 해야 한다"고 국민과 국회를 설득해 정면 돌파한 적도 없고, "결코 대운하를 하지 않겠다"며 서둘러 불을 끄려고 하지도 않는다. 사회적 갈등과 분란이 폭풍으로 몰려올 때까지 그는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정권이란 늘 상황과 여론을 살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비즈니스 하듯 그때그때 정치적 '손익' 계산만 따져 옮겨가면, 이쪽은 돌아서고 저쪽은 비웃는다. 오늘 또 한번 그런 날을 맞을 것이다.

    (조선일보 10일 오피니언면 '최보식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