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영수 조선일보 산업부장 ⓒ 뉴데일리
    ▲ 김영수 조선일보 산업부장 ⓒ 뉴데일리

    노태우 대통령 재임 시절 청와대에서 폭탄주 파티가 열린 적이 있다. 노 대통령이 재벌 총수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한 것이다. 대통령이 "오늘은 한번 툭 터놓고 이야기하자"고 제안하고, 직접 폭탄주를 만들어 돌렸다. 폭탄주 몇 잔이 돌아가자 긴장이 풀리면서 회식 분위기가 고조됐다.

    술기운이 오르자 대통령에 대한 아부성 발언이 쏟아졌다. 그 와중에 평소 바른말 하기로 유명한 모 그룹 회장이 술기운에 대통령에게 "이런 환경에서 기업하기 너무 어렵다. 차라리 농사짓는 게 낫겠다"고 한 것이 말썽이었다. 대통령은 그 말을 듣자 벌떡 일어나 문을 세차게 닫고는 나가버렸다. 그 그룹은 한동안 노 대통령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비용을 들였다.

    또 같은 대통령 시절, 모 그룹 회장은 5장(50억원)을 정치자금으로 상납하라는 지시를 5억원으로 잘못 알았다가 크게 혼났다. 청와대 실세에게 돌아가면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치명적인 불이익은 간신히 모면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해피엔딩에 속한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의 눈 밖에 난 기업은 졸지에 생사가 갈리기도 한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은 청와대 모임에 불참한 뒤, 그룹이 공중분해되는 비운을 겪었다. 다른 경영상 이유도 있었겠지만, 부산발 서울행 항공편이 폭설로 취소되는 바람에 행사 시간을 맞추지 못한 것이 비극의 출발이었다.

    정권이 강제로 기업을 빼앗은 사례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가장 많았다. IMF 금융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김대중 정권은 대기업을 다른 곳에 넘기는 작업을 많이 했다. 대우그룹 해체가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다. 김우중 회장은 "김대중 정부가 지원을 해주었으면 그룹이 공중분해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대우그룹이 김대중 정권에 타살됐다"고 믿고 있다.

    신동아그룹의 최순영 회장도 최근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정권 실세가 이리 떼처럼 달려들어 20조원짜리 회사를 뜯어먹었다"며 "1997년 대선에서 선거자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신동아그룹 주력사인 대한생명은 한화그룹에 넘어갔다.

    LG그룹도 김대중 정권이 단행한 속칭 '빅딜'의 피해자였다. 당시 LG그룹 구본무 회장은 LG반도체를 현대그룹에 넘기도록 강요받았다. 구 회장은 마지막까지 거부했지만, 정권은 막무가내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함께 대북지원 사업을 열심히 추진할 때였다.

    정권이 직접 나서서 기업을 빼앗아 다른 곳에 넘겨준 경우에는, 뒤끝이 항상 좋지 않았다. LG반도체는 현대전자 반도체와 합쳐진 다음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은행관리 기업으로 전락했다. 지금은 다시 주인을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대우그룹의 경우, 대우 때문에 발생한 손실보다 나중에 정부가 대우그룹을 팔아치워 얻은 이익이 훨씬 많았다.

    이명박 정권도 현재 금호·동부 등 9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지난 4월 30일, 이명박 대통령이 "대기업도 옥석을 가려서 구조조정할 기업은 빨리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구조조정에 있어 정치색을 배제하고 지역 연고 같은 정치적 요인이 절대로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일부 공무원들은 대통령의 발언을 '특정 기업 손봐주기'로 오해하고 있다. 심지어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인수·합병을 통해 '잘 나갔던 기업'들에 보복하라는 뜻으로 읽고 있다. 이 대통령은 분명 한국 경제 체질을 강화하기 위한 순수한 의도에서 '지역색·정치색을 배제한 구조조정'을 강조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기업의 생사가 좌우된다는 점에서 구조조정 관련 발언은 신중해야 한다. 구조조정은 채권단과 기업의 자율에 맡겨두고, 조정이 안 되면 법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 이명박 대통령의 새로운 기업 구조조정 모델을 기대해본다.
    <6월4일자 조선일보 태평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