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6월 서울 서교호텔 뒤 맥줏집에서 젊은 판사 4명이 5공이 임명한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하기로 결의했다. 그 후 판사 430명이 연판장에 서명했고 대법원장이 물러나고서야 가라앉았다. 이 2차 사법파동을 주도한 판사들이 모여 매달 한 번 세미나를 하기로 한 것이 법원 내 판사들의 사조직인 우리법연구회의 시작이다.

    1993년 4월 우리법연구회 소속 판사가 법조전문 신문에 사법개혁을 요구하는 글을 투고했지만 당국에 의해선지 글이 실리지 않았다. 그러자 우리법연구회의 다른 판사 주도로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 40여명이 사법개혁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채택했다. 또 대법원장이 사퇴해야 했던 3차 사법파동이었다. 한 판사는 "(우리법연구회가)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 움직임과 수원지법을 비롯한 각급 법원 간의 긴밀한 교감 내지 연락을 취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됐다"고 평가했다.

    2003년 역시 이 단체가 주도한 4차 사법파동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이 단체와 비슷한 성향의 정권이 들어선 뒤 이 단체 초대 회장인 박시환 판사가 "대법관을 연공서열로 임명해선 안 된다"는 글을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렸다. 사법파동까지 번질 일이 아니었다.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박 판사는 "법원에 실망했다"며 법복을 벗고 뛰쳐나갔다. 그러자 이 단체 소속 판사들이 연판장을 돌려 사법파동을 만든 것이다. 대법원은 다음 인사에서 판사들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약속하며 판사들에게 굴복했다. 실제 2004년 여성 대법관이 임명된 뒤 2005년 박 판사가 대법관이 됐다.

    이 단체 판사들은 이미 사법권력의 한 축이 돼 있었다. 이들은 2005년 이용훈 대법원장 체제를 만드는 데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대법원과 법원행정처의 요직은 이 단체 판사들이 차지했다. 일부 간부들은 인사와 사법행정을 손에 쥐고 흔들어 다른 판사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뀐 지난해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요직에 있던 간부들은 물러났다. 대법원장과 우리법연구회의 밀월관계가 끝났다는 말도 돌았다. 이번 '신영철 대법관 파동'은 공교롭게도 그런 역학관계 속에서 불거졌다. 이번에도 우리법연구회 판사들이 주도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13일 대법원장이 신 대법관의 '재판 개입'을 엄중 경고한 이후 법원 내부통신망에 "조치가 미흡하다"며 잇따라 글을 올린 판사들 대부분이 이 단체 소속이었다. 법원마다 판사회의를 조직하고 회의를 주도한 판사들도 이 단체 소속이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후배 판사들이 움직이자 이 단체 원로인 박시환 대법관이 언론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는 5차 사법파동"이라고 했다. "절차와 규정은 안 지켜도 된다"며 집단행동을 부추기는 말까지 했다.

    우리법연구회는 자신들은 판사들의 집단행동에 관련이 없고 특정 이념과도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정말 순수한 판사들의 모임이라면 묻고 싶다. 우리법연구회는 왜 소속 판사들의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가. 이 단체는 회원이 160여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지만 막상 판사들조차 누가 그 단체 소속인지 모른다. 법원행정처도 명단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인터넷 홈페이지는 회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넣어야만 접속이 되도록 폐쇄돼 있다. 회원들이 주로 활동하는 홈페이지까지 공개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봐도 떳떳하지 않다.

    이 단체가 사법의 민주화를 위해 어느 정도 공헌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요즘 이 단체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순수성을 잃은 것 같다. 너무 정치화돼 있다는 말도 안팎에서 듣는다. 내부의 많은 판사가 등을 돌렸고 대한변협까지 "우리법연구회는 해체돼야 한다"고 성명을 낸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법연구회는 그 소속 판사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정말 순수 학회 모임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게 안 된다면 해체하는 게 사법부를 위해 바람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