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9일자 오피니언면에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쓴 <‘PD의 공국’엔 공영방송이 없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을 고수라고 한다면, 이들의 싸움에는 도가 있다. 그래서 멋있다. 황야의 총잡이들이 결투하는 장면에 잡소리가 끼었던가. 강호의 무림이 일 합을 겨룰 땐 덤불의 미물도 소리를 죽인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은 그래서 고수가 아니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야 겨우 보따리를 싸게 만든 청와대와 집권당 사람들도 고수가 아니다. 국민의 눈과 귀를 관할하는 공영방송의 사장이라면 내공이 출중한 고수다. 그런데, 마이너리그 대기선수보다 유치하고 치졸하다. 지켜낼 명분이 뭐 그리 많은지, 감사원과 KBS이사회의 결정에 무효소송을 냈다. 떠나라는 여권의 압박에 정권의 방송 장악 음모를 저지한다는 비장한 각오도 다졌다. 그런 자신은 오 년 전 정권의 총애를 받아 발탁됐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는 노무현 정권의 애완견이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즐겨 그랬듯 굵직굵직한 사건마다 이념 시비를 걸었던 KBS가 한없이 대견스러웠을 것이다. 정권이 바뀌자 갑자기 공격견으로 변했다. 그게 아무리 방송학 원론에 맞는다 해도, 아무 때나 짖고 사납게 물어뜯는 도사견을 어느 집권당인들 너그러이 봐주겠는가. 한국 최대의 공영방송이라면, 적어도 편향성 물의는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그게 최대 주주인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공정보도를 저버리기는 MBC도 하나 다를 게 없다. 촛불시위대를 광우병 공포로 도핑했으니까. 국민들은 되묻기 시작했다. KBS와 MBC가 ‘국민의 소리’임을 잊은 지 오래고, ‘직원들의 방송’ ‘노영(勞營)방송’으로 불리게 된 연유에 대해서 말이다.

    지난 오 년간 편파성 논란을 끊임없이 빚고도 재발 방지 조치를 취하는 공영방송은 없었다. 양대 방송사 모두 검찰이 나서기 전에 자체 조사위원회를 꾸려 문제점을 검토했어야 했다. 조작이나 의도적 실수를 했다면, 적어도 영국 BBC방송처럼 법석을 떨어야 한다. 작년 8월, 영국의 BBC 방송은 프로그램 조작 스캔들이 터지자 사장이 직접 출연해 들끓는 비난을 감수했다. 그리고, 6500명 전 직원을 대상으로 제작과 방송윤리 규정을 재교육하고, 내부 심사 시스템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직원 비리나 방송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일본 NHK 회장들은 군소리 없이 사임을 택했고 고강도의 감시기제를 도입했다. 그런데, 해임과 체포라는 저급한 수단을 동원해야 하고, 사장이 바뀐들 조직을 분할 점령한 ‘PD의 공국’들이 여전히 건재할 한국의 방송 현실은 도나 공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 공영방송의 최대 문제는 누가 사장이 되든 독립정부를 자처하는 이 ‘PD의 공국’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거대한 방송백화점에 품목별로 진열대를 점거한 독립된 소사장들이다. 백화점의 품질 심사는 매우 엄격하지만, 공영방송의 심의 과정은 형식적이다. 반품 요구에 시달리는 백화점은 곧 망하지만, 공영방송에는 반품 요구가 없기 때문이다. 상품의 제작과 납품, 방영이 모두 ‘PD의 공국’ 소관이 된다. 그래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 ‘주저앉는 소’를 광우병 소로 상표를 붙여도 누가 말릴 수도 없다. 언제부턴가, PD들은 심층보도와 스토리를 결합한 신상품인 시사다큐를 출시해 톡톡히 재미를 봤다. ‘미디어포커스’ ‘PD 수첩’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같은 프로그램에는 가끔 돋보이는 계몽성에도 불구하고 검증되지 않은 논리, 선정적 영상, 편향적 해설이 자주 동원된다. 국민세금으로 게이트 키퍼 없는 팀 작업을 방치한 결과다.

    공영방송의 주인으로서 국민들은 이런 주문을 해야 한다. 우선, 강도 높은 조직개혁을 통해 PD저널리즘의 품격을 높여야 한다. PD들의 개별 견해를 자제하고, 사실의 정확한 전달, 균형적 취재, 다양한 목소리의 대변을 통해 시청자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공정성이자 객관성이다. 방송사 내에 PD들의 작품을 검토할 집단적 숙의기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둘째, 시사다큐물에 제작강령(production code)을 ‘엄격히’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KBS의 탄핵방송은 제작강령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지적이었다. 또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해서 공정성에의 긴장도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 MBC의 조작 사태에 겨우 4점을 감점했다면, 누가 징계를 두려워하랴. 정 사장 퇴진을 둘러싼 찬반시위는 사태의 본질을 흐린다. PD들이 한국방송의 발전에 공헌한 바는 많으나, ‘PD의 공국’이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한 공영방송의 미래는 어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