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에 동아일보 객원대기자인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가 쓴 '대통령이 의리를 지켜?'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속설에 노인이 지켜야 할 세 가지 금칙(禁飭)이 있다. 첫째, 넘어지지 마라. 둘째, 감기 들지 마라. 셋째, 의리를 지키지 마라. 첫째 둘째 사항은 자명한 상식이다. 그러나 의리를 지키지 말라는 셋째 금칙은 무슨 뜻인가 했더니, 가령 눈길이 미끄러운데 또는 황사가 심한데 괜히 친지에 대한 의리 때문에 문상을 가거나 혼례식에 갈 건 없다는 것이다. 노약자는 무엇보다도 건강을 우선해야 된다는 뜻인 듯싶다. 이것은 사사로운 개인의 내 몸보신을 위해서 나온 말이다.

    요즈음 정국의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위 세 가지 금칙은 정치를 하는 공인을 위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특히 새로 권좌에 오른 대통령을 위해서도.

    첫째, 정치의 세계에서는 상대방을 넘어뜨리려는 비방 비난이 다반사이다. 그렇대서 그럴 때마다 반대당을 향해 “그건 정치 공세다” 또는 요즈음 더 흔한 말로 “그건 발목잡기다” 하고 비난한다는 것은 “숯이 새까맣다!” 하고 새삼 소리치는 것만큼이나 싱겁고 바보스러워 보인다. 마치 링에 올라간 복서들이 주먹질하는 걸 보고 “그건 폭력이야” 하고 소리치는 것만큼이나…. 따라서 정치 공세와 발목잡기가 일상화되고 있는 정치의 세계에서는 넘어지고 떨어지고 다치고 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고 조신하고 수신하라는 것이 첫째 금칙의 타이름이다.

    낙상 조심, 감기 조심, 의리 조심

    MB(이명박) 새 정부의 장관으로 기용된 15명 중 3명이 청문회장에 나가기도 전에 이미 낙마했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썩 잘된 일 같지는 않다. 발목을 잡혀도 부디 더는 넘어지지 않도록!

    둘째, 대통령도 감기는 조심해야 된다. 원래 삼각산록의 청와대는 모진 바람이 불어 닥치는 곳이다. 어제까지는 바람을 업고 순풍을 타고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에 입성한 뒤부터는 맞바람을 맞게 된다. 순풍은 역풍이 된다. 그 역풍을 견디지 못해 대통령이 콜록콜록하면 나라가 감기에 걸린다. 물론 바람의 가장 거센 발원지는 언론이다. 그렇대서 이른바 ‘진보적인’ 대통령이 그걸 못 참아 언론사에 세무조사단을 보내고 발행인을 구속하고 기자실에 대못질까지 하게 되면 그땐 나라가 독감에 걸린다. 어제까지 언론자유를 주창한 민주투사가 오늘은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자로 전락한다는 것은 당자에겐 비극이요 관중에겐 희극일 수 있다. 감기 조심!

    권력을 장악하고 나면 특히 인사에서 가장 난감한 것이 의리의 문제다. 어떤 거인도, 덕망가도 대선 승리를 혼자 낚아 올릴 수는 없다. 거기엔 수많은 사람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새 대통령의 주변에는 대선 승리의 1등 공신들이 넙죽하게 대기하고 있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셋째의 금칙이 힘을 얻는다: 의리를 지키지 마라.

    다 알다시피 개인적으로 이번 대통령 당선에 1등 위의 특등공신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의 재임 중 한계에 접근한 실정, 실태, 실(失)인심이 없었더라면 대선 기간 내내 각종의 풀리지 않은 의혹에 둘러싸인 MB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MB가 이 특등공신에 대해 의리를 지킬까? 그건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건 다만 MB에게 몰표를 몰아준 영남지방에 대해선 거침없이 그가 의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련한 사람은 이런 경우 다른 길을 걷는다. 가령 한민당에 대해 이승만이, 김종필에 대해 김대중이 의리를 저버린 것처럼.

    국가원수는 국익을 바라볼 뿐

    한편 노무현은 그를 대통령이 되게끔 해 준 김대중에 대한 의리를 무시하고 대북 송금을 수사토록 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집권 초기에 높은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MB는 지금 영남지방에 대해 나이브하리만큼 의리를 챙김으로써 새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부터 지지도가 떨어지고 있다. 어떤 면에선 새 정권이 발도 떼기 전에 넘어지고 외출도 하기 전에 감기를 앓는다는 것은 필경 의리를 지키지 말라는 셋째의 금칙을 무시한 때문이라 여겨진다.

    국가원수의 자리란 사사로운 것(res private)을 챙기기엔 너무도 엄중한 공적인 것(res publica). 대통령이 지켜야 할 것은 사사로운 의리보단 공동체(republic)의 국익이요, 국가이성(raison d'etat)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