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이 10여일 앞으로 다가온 현 시점에서 범여권의 정당들은 아직도 후보단일화를 명분으로 짝짓기 파트너를 찾기 위해 몰두하고 있다. 자신의 정책과 공약을 널리 홍보하고 수권정당으로서의 면모를 입증할 시간도 부족한 상황에서 각 정당의 후보들이 단일화 작업에만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비상식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이 정치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 같다.

    지난 7일 민주평화회의 등 32개로 구성된 시민사회단체 모임인 약칭 “비상시국회의”는 대통합민주신당, 민주노동당, 민주당, 창조한국당이 이념과 정파의 이해관계를 넘어 후보단일화를 통한 민주대연합을 결성하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시민단체의 모임이 공정한 절차를 통해 선발된 각 정당의 후보들에게 그 동안 이루어진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무시하고 하나로 통합된 정치세력을 형성해 한나라당에 맞서는 단일 전선을 구축하라는 궐기문을 내놓은 것이다.

    단기간에 걸친 경제개발과 압축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권위주의 정부는 시장의 성장에 따라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는 시민사회의 등장을 억제하거나 이들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대표적인 예로 산업화 과정을 통해 등장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전형인 노동조합이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조직되기 보다 국가의 필요에 의해 위로부터 동원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개발독재 기간 국가의 산업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노동조합에게 독점적인 지위와 이익을 부여해주는 대신 이들의 지지를 통해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조합주의가 노사관계의 지배적인 틀을 형성해 왔던 것이다.

    국가주도의 경제발전 전략하에서 노동자의 경제적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자율적인 시민사회의 등장은 지체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시민사회의 부재로 인해 소외 받는 사회적 약자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시민단체가 출현하게 되었다. 복수노조가 허용되기 이전까지 이들 시민단체는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한다는 명분하에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주창해 왔으며 급진적인 사회사상을 광범위하게 유포시켰다. 결국 산업화시기 노사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노노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던 원인 중 하나가 급진적인 정치노선과 실천사상으로 무장한 시민단체가 시민사회의 자리를 대체하며 영향력을 급속히 확산시켰기 때문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시민단체의 결성을 주도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 구성원과 활동가그룹은 대부분이 고학력 출신의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시장의 팽창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익집단간의 대립을 조절하는 시민단체의 본연적 기능을 외면한 채 국가에 저항하며 반자본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유포시키는 정치사회단체로서의 역할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들 시민단체들이 대선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범여권의 후보단일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인 의사표현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보장되어 있다. 따라서 시민단체의 집합체인 비상시국회의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이들 시민단체가 간과하고 있는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자유로운 의사결정과 선택을 통해 스스로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율적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참여정부로 대표되는 민주세력을 거부하는 국민들의 정치의식에 대해서는 퇴행성 치매라는 중증의 진단을 내리는 반면 참여정부의 허물을 기억하는 국민들에게는 기억상실증에 걸릴 것을 강요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사고의 괴리는 대통령 선거가 5년마다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정치적 행위이며 표심을 결정하는 중요한 판단기준이 재임기간 정부의 업적과 성과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거에서 투표권자를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최상의 후보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차선의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투표행위에서 발견되는 오래된 관행이며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견고한 지지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자구적인 노력이 만들어 낸 합리적 선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시민단체는 민주화 과정에서 다양한 정당에 신진인물을 충원해주는 파이프라인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시민단체가 각 정당에 새로운 인물을 수혈하는 보급부대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민주화 과정에서 시민단체가 보여준 헌신성과 개혁세력으로서의 도덕성을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혁세력의 화신으로 자처하던 참여정부와 이를 떠받치던 386세대의 몰락은 구세대적 이념과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민단체에게도 새로운 도전과 사명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술은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하듯 시민단체 또한 구시대적 운동방식과 이데올로기적 편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규율과 시대정신으로 무장할 것을 요구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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