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대 대선이 성큼 다가왔다. 1987년 직선제 도입 이후 20년간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통해 국가 최고지도자를 선출해 왔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의 정치체제로 굳건히 자리잡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넘어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시기를 지나왔다. 비록 정치적으로 치장된 미사여구라 할지라도 문맥상의 의미로만 따진다면 대한민국의 정치가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중대한 진전을 이룩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약 보름 남짓 남은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정치상황은 한국의 정치가 후진적인 의식과 구태로부터 한발자국도 벗어나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생명수라 할 수 있는 정당정치의 뿌리마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당정치의 실종을 불러일으키는 주된 요인은 한국의 정치세력이 정책정당 결성을 통한 집권경쟁을 포기한 채 선거에서의 승리만을 염두에 둔 인물중심의 집권전략을 구사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치러진 대선 과정을 통해 무수히 많은 정당이 생성과 소멸, 이합과 집산을 거듭했던 장면은 권력획득의 목표는 사라진 채 권력쟁취의 당위성만이 난무한 한국정치의 상황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축제의 장인 대선을 코 앞에 둔 시점에서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을 불문하고 각 정치세력은 소속정파의 집단적 이익을 구현하기 위해 게임의 룰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이는 정치인의 사적인 권력욕구 앞에서 공공의 이익을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탈행위가 불러올 보다 큰 문제점은 게임의 룰을 지키는 것이 사적인 이익추구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인식을 대중적으로 확산시켰다는 점에 있다. 결국 정치인들의 잘못된 처신이 사회적 불신과 이에 따른 거래비용을 증가시켜 한국사회의 병폐인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당선을 위해서라면 게임의 법칙 정도는 무시해도 좋다는 발상은 정당정치의 실현에 중대한 도전을 제시함과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의 근원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다. 바로 한국에서 정당정치가 제도적으로 뒷받침 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어디로부터 유래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정당정치의 왜곡과 관련해 현재 여야를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무임승차의 근원을 살펴보면 위의 퍼즐을 풀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지지율 1위를 고수하며 상승세를 타고 있던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는 전 한나라당 총재이자 같은 당 소속으로 2차례나 대권 후보로 나섰던 이회창의 탈당과 무소속 출마라는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집권여당인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은 이미 경선을 통해 각 당의 후보를 선출한 상황에서 당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후보단일화라는 모험을 추진하다 좌초되는 꼼수를 부렸으며 이것도 모자라 정치신인인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후보와 단일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미 경선을 통해 공당의 대선후보들이 선출된 상황에서 탈당을 통한 독자출마와 후보단일화를 추진하는 것은 무임승차 논란을 야기함과 동시에 당원들의 의사결정 과정을 부정하는 반민주적인 행위로 규탄 받을 것이다.

    이와 같은 총체적인 경선불복종이 발생할 수 있었던 원인은 한국의 정당들이 탄생했던 정치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당정치는 정책과 비전을 달리하는 정당들이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 경쟁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인물을 중심으로 지역간 유대와 결속을 강화하는 방법을 통해 유지되어 왔다. 오랜 역사를 지닌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데 성공했던 한국의 정당정치는 인물과 지역에 의존하는 방법을 통해 ‘저비용 고효율’구조를 형성해왔던 것이다.

    한국의 정당정치가 인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은 이번 대선에 출마한 대선후보들의 연령대를 통해서도 잘 입증되고 있다. 이회창, 권영길, 이인제 등 주요후보는 이미 두 번의 도전에서 실패한 대권3수생들이다. 이는 능력 있는 신인의 발굴을 통해 대중에 대한 호소력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지도자를 육성시킨다는 민주주의의 원리가 아직 우리나라의 정당정치에 자리잡고 있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당정치가 지니고 있는 불안정성의 기원은 어디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역설적으로 산업화 시대의 개발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던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대통령의 공고한 지역적 기반에서 찾을 수 있다. 개발독재 기간 당시의 야당 지도자들이 의지했던 최고의 정치적 자산은 자신의 출신지역이었다.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릴수록 한국의 정당정치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단출한 비용 속에서도 최고의 효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확실한 지역적 기반을 지닌 정치인이 부재한 오늘의 상황에서 각 정당은 생존을 위한 활로확보에 고심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상황이 인물중심 정치라는 구태로 회귀하게 만들면서도 과거 정치지도자들이 지니고 있던 정치적 자산의 결핍이라는 장벽과 부딪히면서 결국 정당정치를 부정하게 되는 퇴행적인 행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대선의 결과가 어떠하든 정당정치와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간 원인에 대한 사회적 고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지역주의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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