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2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이진곤 주필이 쓴 'DJ 슬하에서…'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부인하는데 우리도 이제 할 말은 하자는 분위기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의 말이라며 조선일보가 어제 전한 내용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당을 버리고 대통합민주신당의 손을 들어준 데 대한 서운함의 표현이었다. 27일의 이 당 최고위원회의에서도 DJ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는 말이 적잖게 나왔다고 한다. 유종필 대변인은 “대선 주자라는 사람들이 젖먹이 아기처럼 동교동에만 의지하는 것은 말 그대로 구상유취한 행위”라는 말로 신당의 대선 주자들을 비판했다.

    민주당 지도부의 처지와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이들의 DJ에 대한 투정 혹은 비판에서 우리 정당정치의 수준을 확인하게 된다. DJ가 민주당 창당을 주도했다는 뜻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민주당=DJ당’이라는 느낌을 더 강하게 주는 말이다. DJ의 사당(私黨)이라는 얘기인데 이것이 21세기 정당인들의 인식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DJ가 민주당을 버리고 신당의 뒤를 밀어준다고 불평할 일도 아니다. 이제 사당은 없어져야 할 시대이기 때문이다. 정말 민주당이 국민의 정당으로 거듭나려면 DJ와 이어진 사적인 끈을 과감히 끊어버려야 한다. 혹시라도 DJ의 후광에 힘입어 호남 지역에서 권토중래(捲土重來)하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꿈에라도 하지 말 일이다.

    민주당보다 더 한심한 쪽은 이름도 거창한 대통합민주신당이다. ‘대통합’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문자(文字)만으로 짐작하자면 모든 것을 다 아울렀다는 뜻이겠다. 그런데 왜 DJ의 후광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DJ의 지지와 지원을 기대한다는 것은 100%에 가까운 호남 몰표의 매력을 못 잊는다는 말이 된다. ‘대통합’이니 뭐니 하는 것은 단순히 듣기 좋으라는 이름에 불과함을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표’ 얻어주기에 관한 한 노무현 대통령은 DJ의 적수가 못 된다. 애당초 DJ의 영향력에 기대어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후 정치적 독립을 위해 ‘지역당 구조 해체’를 끈질기게 추구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의 영향력 하에서, 그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졌던 열린우리당은 아주 사라져버렸다. 국회가 노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을 때 의사당 바닥을 치며 통곡하던 인사들, 그의 굄을 받아 정부 요직에서 이름 깨나 날렸던 사람들이 먼저 등을 돌렸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지금 DJ의 총애를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정치적 의미로만 말한다면 이야말로 사제갈주생중달(死諸葛走生仲達) 격이다.

    어쨌든 ‘반한나라당 인사’들이 대거 몰려든 바람에 대통합민주신당은 시쳇말로 ‘아파치는 없고 추장만 있는’ 정치집단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엊그제 대선 후보 예비경선을 위한 후보토론회를 열었는데 주자가 무려 아홉명이었다. 인재가 많아 좋기는 하나 일찌기 보지 못했던 희한한 광경에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2002년의 노무현 드라마’를 염두에 둔 정치적 투기심리의 발현이 아니기를 바란다.

    신당의 엉뚱함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이 당의 이목희 국민경선관리위원장은 같은 날 당 차원의 후보 검증 청문회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고 안 하고는 당이 정할 일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 후보들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부동산 의혹처럼 의혹을 살 만한 큰 과오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서울신문)는 핑계를 댈 일은 아니었다. 이런 독선적이고 오만한 사고를 공공연히 표출할 수 있는 배짱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이날 같은 당의 김효석 원내대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나라가 불안해진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국감 등을 통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철저히 검증하겠다!” 거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