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여인은 동갑내기 남편을 계속해 ‘우리 아저씨’로 불렀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지독한 콩깍지가 씌어 조선왕조도 아닌 지금 시대에 사람을 납치할 생각을 했다니, 귀에 들리는 소리들을 무작정 신기하게만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여인의 당시 상황에 대한 말을 듣고도 ‘정말이에요?’ ‘왜 가만히 있었어요?’를 연거푸 물으니 이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 바라보듯 했다. 그 눈빛은 마치 ‘내가 정신 나간 사람이야? 할 일이 없어 당신 같은 사람 즐겁게 해주려고 내가 애써 이야기를 꾸며댈 이유라도 있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만약 여인이 입을 다물어 버린다면 나만 손해일 것이 틀림없었다. 굼벵이처럼 기어가는 차량 행렬 속에 무거운 침묵을 배경으로 애타는 짜증만이 좁은 차 안의 공간을 무료하게 지배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자세를 가다듬고 진심의 호기심어린 눈빛을 여인에게 보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요? 어디로 끌려가셨는데요?”

    다시 말을 이어가는 여인의 태도는 순박하게 생긴 모습 그대로였다. 많은 세월이 흐르며 인생을 경험했을 텐데, 복잡하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꾸밈이 없는 것이 천성인 것처럼 보였다.

    “꼭 죽으러 가는 줄 알았다니까요. 사방이 어두컴컴한 길을 가는데 누구도 입 한 번 떼지 않는 거예요. 양 옆으로 앉아 있는 우리 아저씨 친구들이 무서워서 꼼짝할 수 없었어요. 처음엔 그곳이 포천인지도 몰랐는데 한 집에 도착하자 차를 세우더니 저를 내리라고 하는 거예요. 아무도 없는 방에 저를 혼자 남겨두고는 방문을 닫았는데...”

    평범한 가정집이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자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면서 두려운 순간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한다. 잠시 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남녀가 들어와 이야기를 하면서 자초지종을 파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시부모님이셨어요. 일주일 전에 우리 아저씨가 여자 친구를 데려오겠다고 했기 때문에 시부모님도 그렇게만 알고 계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상황을 들으시고서는 망나니 아들이 또 사고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신 거예요. 계속 미안하다 하시면서 저를 안심시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셨던 것 같아요. 그때서야 저도 긴장이 풀리면서 집에 보내달라고 울고불고 난리가 아니었죠...”

    그 여인의 남편은 딸 일곱을 내리 낳고 난 다음 시아버지 나이가 50 중반이 넘어 천신만고 끝에 어렵게 얻은 늦둥이였다는 것이다. 큰 부자는 아니었어도 넉넉한 살림살이에 손자 같은 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키우다보니 그 여인 남편의 어릴 적 망나니 기질은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법했다. 시부모님도 그 행동을 제지할 도리 없이 끌려가기만 했던 것 같았다.

    통금이 있던 때라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남편의 집을 나와 인천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그 여인 혼자가 아닌 지금의 남편과 시부모님이 동행했던 것은 물론이었다. 그 여인의 집을 찾아 식구들을 설득하여 며느리로 삼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에서도 난리가 아니었을 텐데...”
    “그럼요. 처음에는 시끌벅적했죠. 그 때 저는 시집간 큰 언니와 함께 살고 있었거든요. 어릴 적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었어요. 게다가 친 엄마는 딸만 낳는다는 이유로 할머니가 강제로 이혼시켰데요. 아버지는 재혼해서도 아들을 낳지 못했어요. 저는 집이 가난하다 보니까 말이 양녀지 식모로 다른 집에 가있었거든요. 형부가 좋은 사람이었어요. 커서야 양녀로 갔던 집을 나와 언니 집에 같이 살게 되었던 거죠. 봉제기술도 언니가 권유해서 배우게 되었던 것이었고요.”

    느닷없이 벌어진 일에 언니나 형부 모두 극력 반대했었다 한다. 그러나 시부모의 끈질긴 설득으로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고, 그 집에 시집가면 큰 고생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결국 마음이 돌아섰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겠어요. 형편이 그랬는데... 한 두 달 간 고민하다 식도 치르지 않은 채 포천의 그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던 거죠. 우리 아저씨나 저나 어린 나이였던 땐데 무얼 알았겠어요. 시간이 흐르다 보니 그럭저럭 살겠더라고요...”

    시부모와 같이 살다 그분들이 돌아가시자 포천을 떠나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한다. 현재 대학을 다니다 군에 간 아들과 직장에 다니는 과년한 딸을 두고 살고 있다고 했다. IMF 때까지는 큰 시련 없이 살아왔지만, 그 때 운영하던 사출공장이 부도가 나 크나큰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 후 여러 난관을 거치며 현재까지 이르러 왔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헤어진 친 엄마를 몇 년 전에 다시 만날 수 있었어요. 혼자 살고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들이 좋은 분과 짝을 맺도록 했었죠. 그런데 엄마는 남편 복이 없나 봐요. 즐겁게 사시는 가 했는데 새아버지의 병환이 요즘 좋지 않으시거든요... 어려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런지 저는 지금 택배 일을 같이 하고 계시는 어른들과 이런 시간을 갖는 것이 즐거워요. 그러니까 일주일마다 한 번 씩 이렇게 할 수 있는 거겠죠...”

    거칠 것 없이 행동하던 여인의 남편이 결혼 후에는 어떻게 생활했는지 궁금했다. 대개가 부유한 집안의 망나니 외동아들이면 그 버릇이 쉽게 고쳐지지 않았음을 흔히 보아오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아저씨가 어렸을 때는 자신의 뜻대로만 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도박이나 다른 거로는 마음고생 하지 않았나요?”
    “여자문제도 그렇고 그런 것은 전혀 없었어요. 지금도 그러는 걸요. 그렇게 데려와서 지금껏 고생만 시켰는데 자기가 그럴 수 있겠느냐고요...”
    “IMF 때 사업실패로 아저씨가 갈등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아니요. 그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부도 난 다음 날 아침에 어디를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어디 가냐고 물으니까 택시 회사에 일자리를 알아뒀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아저씨도 한동안 택시 일을 했었어요. 아직까지 처리하지 못한 빚이 많이 남아 있지만, 보통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만큼 책임감이 무척 강했던 사람이에요. 지금껏 제게 험한 소리 크게 한 번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술 마시는 것에 대해서만 제외하고는... 술을 전혀 못했었는데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다보니까 술이 늘어가더라고요...”
    “좋은 분 잘 만나셨나봅니다...”
    “우리 아저씨는 가끔 저한테 그래요. 다시 태어나면 자기와 또 같이 살거냐고... 그러면 제가 항상 똑같이 되묻죠. 그러면 우리 아저씨가 그런다고 대답하거든요. 그러면 저도 그런다고 대답해요.”

    그 여인과의 대화에서 나는 오랜만에 잔잔하면서도 끈끈한 부부의 정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아직껏 자신이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가 없었으니 우리가 죽어 다시 태어나게 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확약 못할 미래를 믿음으로 굳게 다짐할 수 있는 관계라면 인생을 같이 한 보람이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있을 리 만무일 것이다.

    영국 왕실의 네 마리 백마가 이끄는 사륜마차가 진정한 행복의 문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신과 마음 그리고 물질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삶이 우리를 보다 더 가깝게 행복의 문으로 인도해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만족스런 최적합 상태가 우리들 인생 모두에 존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물질보다 진정한 마음이 행복의 우선적 조건임을 말하는 것을 망설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 여인은 자신이 처음 탔던 작은 차를 가끔 ‘티코같이 아주 작은 차’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 여인의 소중한 인생 인연은 그렇게 ‘아주 작은 차’에서 출발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