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1일자 오피니언면 '동서남북'에 이 신문 최보식 기획취재부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어제도, 그저께도, 또 그 전날도, 노무현 대통령은 연일 언론에 맹공을 퍼붓고 있는 중이다. 신문사에서 20년간 밥 먹은 내가 또 뭔가 반격할 글을 쓸 것이라고 혹 짐작하신다면 틀렸다. 오히려 나는 대통령 쪽에 편승해, 요즘 언론에 개인적 불만을 털어놓을까 한다. 언론은 정말 비판 받아도 싸다. 왜 그런지 예를 들어 이해를 돕겠다.

    사흘 전 노 대통령은 빛나는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명예’가 아니라 ‘실전(實戰)’ 정치학 박사 학위가 수여됐어야 옳았지만. 여하튼 대통령은 답사(答辭)하는 자리에서 “5년 단임제를 가진 나라는 민주주의 선진국이 아니라는 증명, 즉 ‘쪽팔린다’는 뜻이고…” “내가 확실하게 기자실을 대못으로 대못질해 버리고 넘겨주려고 한다” 등등을 말했다.

    다음날 신문을 펼쳐보라. 각 신문마다 스트레이트 기사, 관련 해설 기사, 칼럼, 사설로 도배질을 해 놓았다. 따지고 보면 표현이 더 강렬했던 것을 빼면, 늘 듣던 ‘우리 대통령’의 친숙한 말씀이 아니던가. 겨우 이런 걸로 언론은 또 난리를 쳤다.

    우리는 이미 4년 이상 겪었는데도 여전히 대통령의 전술에 번번이 넘어간다. 통상 이 정도 임기가 남았을 즈음, 역대 대통령들은 정치 뉴스에서 한발 물러났다. 매스컴 조명은 떠오르는 주자들에게 옮겨가는 법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어떻게 하면 언론을 약 올리고 자극할 수 있는지를 잘 알아, 언론이 그를 안 다룰 수 없게 만든다. 그는 “정치하는 사람은 언론의 밥, 대통령도 밥인데”라고 말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언론은 늘 그의 정치적 의도를 위한 ‘밥’이 됐다.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까지 뉴스의 인물이 되겠다는 것을 말릴 수는 없다. 문제는 언론이다. 언론은 너무 쉽게 대통령으로 지면을 채우려고 한다. 대통령의 말씀이 없다면 신문 지면을 어떻게 채울지 걱정이 다 될 지경이다. 물론 정의감 있는 언론인들은 이런 대통령에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업자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렇게 참지 못하는 요즘 언론에 더 참기 어렵다.

    언론은 대통령 못지않게 늘 비슷한 레퍼토리를 반복하고 있다. 솔직히 글 쓰는 당사자도 지긋지긋할 것이다. 하물며 읽는 독자들은 어떻겠는가. 언제까지 독자들에게 신문을 참고 읽으라고 강요할 것인가. 5공 시절 밤 9시 TV를 틀 때마다 최고권력자가 등장해 ‘땡전(全) 뉴스’라고 했지만, 지금은 인물과 방식이 바뀌었을 뿐 대통령이 언론의 앞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언론은 그럴듯한 변명을 준비해 왔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 보도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그러나 알 권리는 국민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식상한 것을 계속 전달하는 것은 알 권리가 아니라 일종의 고문이다. 상당수 독자들은 벌써부터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귀를 씻으려 하고, 그 사진을 보면 아침 기분이 울울하다고 한다. 늦었지만 언론 종사자들은 이제라도 독자들의 정신건강을 고려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니 노 대통령 관련 기사를 모두 신문의 안 보이는 구석에 1단 단신(短信)으로 처리하는 게 어떨까 제안한다. 비판 기사에 대해 “시커멓게 도배질했다”고 분개하는 대통령과의 시비가 벌어질 일도 없고, 독자들의 일상은 점점 유쾌해지고 정신건강은 양호해질 것이다. 혹 노 대통령의 말씀을 하루라도 듣지 않으면 잠이 안 오는 소수 추종자들을 위해서는 국정브리핑, K-TV, 혹은 친노 언론매체 쪽으로 친절하게 안내해 주면 될 일이다.

    노자(老子)는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止不殆)”고 했다. 이 구절을 언론 동업자들에게 권하고 싶을 뿐, 노 대통령은 절대 이에 동요돼서는 안 된다. 그 결과는 장담 못하나, 임기 마지막 날까지 계속 마이웨이를 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