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이진곤 주필이 쓴 '기로에 선 정당정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붕괴를 막아보려는 나름대로의 안간힘이었을 것이다. 위기의 진앙(震央)으로 지목된 자신이 당에서 비켜서면 위기론과 해체론이 명분을 잃을 것이고, 분위기 반전에 힘입어 당의 결속력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을 법하다.

    그러나 임기 말 대통령으로서는 아무래도 역부족인 듯하다. 그가 아주 공들여 발탁해서 중책을 맡겼던 인사들부터 짐 싸기기에 분주하다. 이미 떠난 사람도 있고 등 돌릴 구실을 찾기에 바쁜 사람들도 있다.

    노 대통령이 엊그제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글 ‘정치인 노무현의 좌절’에서 ‘당신들’로 부른 인사들이 등을 돌리는 까닭은 뻔하다. 임기 말의, 국민 지지도 낮은 대통령과 거리를 두는 게 낫다는 판단이 섰다는 뜻이다. 노 대통령과의 투쟁을 득표전략으로 삼은 사람도 없지 않아 보일 정도다. 정치인의 의리란 새털보다 가볍다더니, 어떻게 대통령 재임중에 전직 각료가 공공연히 대드는 세태가 되었는지 어이없고 한심하다. ‘당신들’이라고 해가면서 비난하는 대통령의 모습도 좋아보일 리 없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열린우리당의 오늘과 같은 상황은 창당 이전부터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열린우리당의 대명제는 ‘망국적인 지역감정과 지역주의 정치 타파’였다. 그것이야말로 민주당에 등돌릴 거의 유일한 명분이었다. 물론 한국 정당정치 당위의 과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당 해체의 코드가 되고 말았다. 민의 정서는 쉽게 지역연고 정당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 바람에 열린우리당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정당 자체의 역할과 영향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 거대하던 한나라당의 후보가 지리멸렬했던 민주당 후보에게 졌다는 사실은 정치사적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야심가들에게 정당이란 돈과 품만 많이 드는 비효율적 하드웨어로 인식되었다. ‘결정적 한방’만 제대로 먹이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믿음으로 굳어졌다. 자연 정당에 대한 지도적 인사들의 충성도는 급격히 약화됐다.

    열린우리당은 연고지역을 확보할 시기를 오래전에 놓쳤다. 주자들은 머지않아 떠날 게 뻔하다. 제17대 대선전은 지역연고성에 뿌리를 내린 주자·선거조직들간의 대결 양상이 될 전망이다. ‘지역주의 타파’ 구호는 나오겠지만 경청하는 사람은 그리 많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정당은 더 이상 정권 추구자들의 대안이 되기 어렵다. 주자들이 믿는 것은 선거조직과 흥행이다. ‘노무현 후보’ 성공으로 형성된 새로운 선거 양상 및 구도다. 범여권 주자들은 막판 스타탄생을 꿈꾸고 있을 법하다. “노 대통령도 해냈는데 내가 왜 못한다는 것인가!”

    상대가 정당이 아닌 개인적 역량과 이벤트에 의존할 것으로 전망될 경우 한나라당도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당 지도부의 결속력, 주자들의 당에 대한 충성도가 약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당 공천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면 후보 경선은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전망이 어두운 주자는 경선을 벌이기보다는 아예 당을 떠나려 할 것이다.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 점에서 말하면 올 대선은 우리 정당정치의 중대한 기로 혹은 분수령이다. 정당 기반보다는 지지세력과 미디어, 무엇보다 스타탄생 퍼포먼스를 통해 대통령이 되는 일이 다시 생기면 전통적 의미의 정당은 더 빠른 속도로 위축되고 퇴색할 수밖에 없다. 정당이 걸핏하면 와해되고 재조립되는 시대가 정말 올지도 모른다. 이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정치는 어떤 양상을 띨지 자못 궁금하다. 정보혁명 통신혁명 미디어혁명 시대는 정당정치의 새 모델을 만들어낼 것인가. 한국 정당정치의 실험은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