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5일자 오피니언면 '중앙시평'란에 권용립 경성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쓴 <'내수용 민족 드라마'>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으로 시작하는 우리 애국가의 형이상학과는 달리 미국의 국가는 포탄의 화염 속에서도 밤새 펄럭인 성조기를 보고 감격하는 전쟁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작된다. 포토맥 강을 거슬러와 수도 워싱턴을 침공한 영국 해군을 격퇴한 1814년 여름 어느 날의 장면이다. 전쟁은 이처럼 미국 정치의 바닥 정서로 자리 잡고 있다. 사실 미국의 역사 자체가 전승(戰勝)의 역사다. 불패의 대영제국을 물리친 독립전쟁부터 시작해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거쳐 텍사스에 이르는 광활한 '사우스웨스트' 지역을 멕시코로부터 빼앗은 1846년의 전쟁,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전쟁은 계속 전승의 해피엔딩이었다.

    미국처럼 승리의 서사시를 국가(國歌)로 채택하고 정복과 개척의 역사가 곧 국사인 나라에서 '패전'은 대통령의 외교적 실패가 아니라 최고의 정치적 치욕이다. 30여 년 전 닉슨이 최초의 패전 대통령이 되지 않으려고 가망 없는 베트남전을 질질 끌어 차기 정부에 넘기려고 몸부림쳤던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이라크의 수렁에 빠진 지금 부시 미 대통령의 처지는 닉슨보다 더 절박하다. 닉슨은 민주당이 시작한 베트남전을 물려받았을 뿐이지만 부시는 미국을 전쟁에 몰아넣은 당사자로서 최초의 패전 대통령이 될 위기에 몰린 것이다.

    최근 미국 대북 정책의 변화를 네오콘의 퇴조나 외교전략 측면에서 풀이하는 퍼즐 풀기가 한창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적 결단은 최종 결정권자의 욕망과 공포에서 나온다. 북한뿐 아니라 이란 및 시리아와도 대화하겠다고 나선 부시의 결심 뒤에는 이라크 문제에 집중하고 이라크 정세를 호전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절박감이 엿보인다. 자기 생전에는 없을 '역사의 심판'을 겁도 없이 입에 담는 직업이 정치라지만, 부시에게 역사의 심판은 코앞에 있다. 이라크 철군 시한을 정하라는 민주당 의회의 압박에 밀려 중도 철군하면 자신은 잘못된 전쟁을 시작해 패배한 첫 대통령으로 미국 역사에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부시가 라이스 국무장관과 대북 협상파의 손을 들어준 결정적 계기는 이 정치적 위기감이다.

    이런 정황이라면 미국 외교의 대북정책 기조가 완전히 변화했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특히 협상파에 제동을 걸어온 강경파의 대부(代父) 체니 부통령이 물러나기 전까지는 더욱 그렇다. 최근 체니의 심복인 리비 전 부통령 비서실장이 '리크게이트'로 유죄 평결을 받은 데다 건강 문제까지 거론되고는 있지만 부시 스스로 체니를 퇴진시킬 가능성은 크지 않다. 체니는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의회의 강력한 견제를 받게 된 미국 대통령의 권력을 방어하는 데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아버지 부시의 국방장관 시절에는 의회 인준 없이 걸프전을 시작하자고 주장했던 사람이며, 이라크 전쟁 포로 고문에 대한 의회의 공세도 체니가 앞장서서 막아왔다. 체니는 부시의 방탄조끼다.

    체니가 물러난다 해도 북한의 핵 포기 의지에 대한 미국의 의구심이 여전히 문제다. 남북정상회담설은 이런 상황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가능한 얘기다. 그러나 핵심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의심이 남북정상회담으로 해소될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이 북.미 간 협상을 실제로 가속시킬 철저한 실무회담으로 기획되어야 할 이유다. 가능성과 절차를 따져 보지도 않고 평창 겨울올림픽의 남북 공동 개최부터 북한에 불쑥 제안하는 미숙한 민족주의로는 칼날 같은 북.미 간 핵 게임을 중재할 수 없다. 생존전략 찾기에 몰두한 북한의 통치자가 한국의 대통령과 '민족적'으로 포옹했다고 핵을 포기할 리도 없다. 정상 간의 포옹과 샴페인 건배가 평화라면 우리는 이미 7년째 평화 속에 살고 있어야 한다. 절대권력끼리 맞붙는 국제정치에 민족 드라마는 낄 자리가 없다. 간만에 숨통이 트인 북.미 협상을 남북정상회담으로 돕겠다면 무엇보다도 '제2의 남북정상회담'을 내수용 민족 드라마로 만들려는 유혹부터 떨쳐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