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4일자 오피니언면 중앙포런란에 이 신문 김종혁 정책사회데스크가 쓴 '대통령 하기 편한 대한민국'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은 행복한 분이다. 왜냐고? 국민이 착해서 그렇다. "서민들은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고, 북한의 핵개발로 한밤중에 살얼음판 밟는 형국인데 그게 말이 되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겠다. 하지만 한번 따져보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다. 부시가 좋든 싫든 그게 현실이다. 그 부시 대통령은 2003년 1월 28일 대국민 연설에서 "영국 정보기관에 따르면 이라크가 아프리카에서 우라늄을 수입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한데 정작 이라크를 침공해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 뒤 부시 대통령은 약 1년 가까이 언론에 거의 날마다 두드려 맞았다. 기자들은 백악관과 국무부 브리핑 때마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진실이 아닌 얘기를 했으니 해명하라"고 대변인을 닦달했다. 부시 대통령 본인에게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이라크가 언제 우라늄을 수입했느냐"고 따졌다.

    한국 특파원의 입장에선 의아한 대목도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가 핵을 가졌다"고 단정한 게 아니다. 영국 정보기관을 인용해 이라크가 우라늄 수입을 시도한다고만 했다. 하지만 언론은 그걸 가지고 세계 최강 국가의 대통령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당시 워싱턴의 한 세미나장에서 만난 미국 기자에게 "너무 심한 것은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답변은 "대통령은 국가안보에 관한 한 모든 걸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 이쯤 되면 노 대통령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노 대통령이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해 했던 발언들을 되돌아보면,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 노 대통령은 2003년 7월 ABC방송 인터뷰에서 "북한이 8000개의 핵 연료봉을 재처리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한 해 뒤인 2004년 11월 LA에서는 "(핵과 미사일에 대한) 북한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는 말도 했다. 지난 7월 북한이 미사일을 동해 바다에 무더기로 발사했을 때 대통령의 참모는 "우릴 겨냥한 게 아니다"라며 코미디 대사로나 가능한 발언을 했다.

    지난 9일 북한이 핵실험을 한 직후, 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기자회견을 했을 때 나는 기자들이 국민 대신 물어주길 기대했다. "지금까지 국가 안보와 관련해 내렸던 오판에 대해, 북한 핵을 둘러싼 발언에 대해, 국민에게 어떻게 해명할 겁니까"라고. 하지만 아무도 대통령의 책임을 따지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여유를 보여주려는 듯 간혹 미소를 머금어 가면서 기자 세 명으로부터만 질문을 받은 뒤 떠났다. 그걸 지켜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노 대통령은 언젠가 대통령 못 해먹겠다고 말했지만 아니다. 대한민국은 대통령 해먹기 정말 편한 나라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에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바닥까지 간 지지도를 일거에 만회하고, 국가적 리더의 역량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노 대통령은 그걸 못했다.

    또 부시 얘기해서 안됐지만 2001년 9.11 테러가 터졌을 때 그는 다르게 행동했다. 부시 역시 취임 이후 지지도가 하락하고, "무능한 대통령"이란 비판을 받던 중이었다. 하지만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대통령 부시'는 결연했다. 국민 앞에 서서 "절대로 테러를 용서하거나 테러리스트와 타협하지 않겠다"고 외쳤다. 헬멧을 쓰고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린 '그라운드 제로'를 찾아가 소방관들을 얼싸안았다. 부시 대통령이 그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감행한 이라크 침공에는 나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시는 위기의 순간에 혼란에 휩싸인 미국을 단결시키는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북한의 핵실험 직후 노 대통령이 휴전선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방부라도 찾아가서 유사시 목숨을 걸고 국민을 지켜야 할 우리 군인들의 손이라도 잡아주었다면 한결 맘이 놓였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몇 번씩 생각해 봐도 아리송한 기자회견 대신 "국민 여러분, 저를 믿어주십시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라고 외쳤다면…. 아마 눈물이 났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