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5일자 오피니언면 '기획시론 자주를 생각한다' 경제편에 서울대 이영훈 교수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국제적으로 넓게 펼쳐진 큰 시장은 인간들의 몸과 마음을 풍성하게 살찌운다. 그 실례를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역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20세기 이전의 전통시대에 경제가 크게 고양된 두 시기가 있었다. 14세기와 17세기이다. 14세기의 고려는 몽골 제국이 구축한 유라시아대륙과 인도양을 순환하는 거대한 세계 교역망에 접속되었다. 무역이 늘자 인구와 생산도 따라서 늘었다.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수입되어 문화도 바뀌었다. 그 비옥한 토양 위에 조선왕조가 건립되었다.

    17세기의 발전은 중국 대륙의 주인이 바뀐 국제정세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중국의 새 주인이 된 청 제국은 한동안 국방의 이유로 바다의 자유항해를 금지하였다. 그러자 당시 세계 제2의 은 생산국인 일본이 중국에서 실크를 수입할 때 조선의 중계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계무역이 벌어들인 막대한 은이 조선의 경제를 번성하게 만들었다. 한국사에서 시장경제가 초보적이나마 경제체제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는 것도 이때의 일이다. 18세기 이후 이 우호적인 국제시장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는데, 조선왕조는 대응을 게을리하였다. 드높은 도덕적·문화적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 결과 1876년 개항 직전에 조선왕조는 무역의존도가 1~2%에 불과한 가난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개항 이후 조선왕조의 무역의존도는 1910년까지 10%로 늘었다. 무역이 늘어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고 농업생산이 회복되는 조짐은 이미 1890년대에 도처에서 확연하였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이후 한반도는 일본에 병합되고 말았다. 그러한 정치적 종속 하에서 무역의존도는 1940년까지 60%로 늘었다. 그 사이에 한반도 북부에서는 이후 1970년대까지 북한을 먹여 살린 높은 수준의 공업시설이 들어섰다. 해방 이후 남한은 다시 국제적으로 고립된 경제가 되었다. 1950년대 말의 무역의존도는 대략 2~3%의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참으로 고단한 처지였다.

    반전의 결정적인 계기는 1965년의 일본과의 국교 재개, 곧 ‘제2의 개항’이었다. 당시 대학과 지식층의 저항이 얼마나 격렬하였던가. 돌이켜 보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확실히 군인 출신의 젊은 혁명가들이 밀어 올렸다. 계엄령을 선포하면서까지 강행한 일본과의 국교 수립과 뒤이어 베트남 파병을 통해 구축한 한국-미국-일본의 ‘태평양 삼각동맹’은 오늘날에 이른 대한민국의 번영을 가능케 하였다. 그 사이 무역의존도는 무려 100% 수준에 육박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북한은 폐쇄경제로 돌아섰으며, 그 결과 1910년대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상과 같은 한반도의 경제사는 정치적 자주와 경제적 발전은 별로 깊은 상관관계가 없음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살찌우는 것은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어대는 정치적 자주가 아니라 서로 정직하고 신뢰하고 타협하는 가운데 펼치는 큰 시장이다. 이 값비싼 교훈을 20세기의 한국인들은 식민지라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 또 10년 전에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북한의 애절한 역사를 통해 몸으로 터득하였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의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또 한 차례의 번영을 약속하는 ‘제3의 개항’이 되리라. 1876년의 ‘제1의 개항’은 준비 없이 강요당한 것이었다. 1965년의 ‘제2의 개항’은 가난에 찌들어 남의 나라에 물건을 팔아먹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다가올 ‘제3의 개항’은 마음의 개방이다. 마음을 열고 문화를 바꿔야 한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자주와 평등을 외치는 좁은 골짜기에 고착된 농경문화로부터 벗어나 정직하고 신뢰하고 타협하는 바다와 같은 넓은 상업문화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 ‘제3의 개항’을 자주와 평등을 외치는 정권이 미국에 제안하고 또 미국이 덥석 받아 준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대한민국의 국운이 여전히 성해서 그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