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요즘 노무현 정권이 하는 일을 보면 정말 가관이다. 5·31 지방선거에서 역사상 유례 없는 참패를 하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은 급락하는데 도무지 오불관언이다. 화가 몹시 난 국민으로부터 몰매를 맞다시피 했는데 언제 맞았느냐는 투다. 국민을 향해 “너희들은 짖어라. 우리는 우리 길을 간다” 하는 식이다.

    우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광주에서 열린 6·15 행사다. 노 정권은 그것을 ‘6·15 민족대축전’이라는데 그것을 ‘축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극소수다. 심지어 광주 사람들조차 “그런 것을 왜 하며, 해도 왜 하필 광주에서 하는가”라고 볼멘소리다. 기껏 6·15 기념행사라면 모를까, 거기에 ‘축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랏돈 14억원을 지원한 이 정권은 국민이 5·31 선거에서 무엇을 염려하고 무엇을 힐난했는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다.

    여론조사는 여당의 패인이 경제와 먹고사는 문제라고 밝히고들 있지만 조사의 문항에 ‘나라의 불안’을 명기했더라면 상황은 달랐을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국민의 상당수는 안보에 불안을 느끼고 있다. 대한민국이 ‘유린’되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국기(國基)와 체제를 흔드는 일들이 평택에서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제는 북한이 스스로 앞장서서 한국의 정치에 개입하고, 전쟁을 겁주고, 더 나아가 미사일로 세계를 협박하고 있다.

    노 정권은 지금 국민의 불안이 어디에 있는지 헤아려야 한다. “선거 한번 지고 이기는 것이 큰 문제 아니다” 하는 등의 말장난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국민은 선거에서 집권측에 엄청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엄중경고했다. 정권과 대통령이 국민의 화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모를까, 명색이 대의(代議)정치 한다는 나라에서 주인인 국민이 화가 났다는데 집권세력이라는 자들이 북한 사람 불러다가 태극기 숨기고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야당을 박살내며 ‘전쟁의 화염’으로 대한민국을 협박하는 짓을 어떻게 감히 방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방조하다 못해 북한의 ‘충언’, ‘고언’이라며 옹호하는 자까지 있다. 충언·고언은 듣기는 싫을지라도 옳은 소리를 이른다. 한나라당이 정권 잡으면 전쟁 일으키겠다는 북측 인사의 발언이 어떻게 충언이며 고언인가. 북의 미사일 발사 문제도 결과를 신중하게 지켜보지 않고 단정할 수 없다거나, 아닐 수도 있다는 등 촐싹거리며 변명해주느라 여념이 없다.

    이런 판국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기어코 북한에 가겠다고 안달이다. 전직(前職)은 원래 나서지 않는 법이다. 마치 자기 아니면 이 땅에 북한문제를 다룰 사람이 없다는 양, 독불장군처럼 나서는 DJ의 끈질김에서 편집증 같은 것을 느낀다. 설혹 북한에 다시 가고 싶어도 그래도 한때 이 나라의 대통령을 지냈으면 지금 보훈의 달, 호국의 달 6월을 피하는 것이 도리이며 우리가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망국 직전까지 갔던 6월 25일 전후는 더더욱 피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다.

    열린우리당의 태도도 5·31 선거와는 동떨어지게 가고 있다. 발상의 전환을 모험할 자신이 없어서일 것이다. 한때 반성이니 환골탈태니 하고 호들갑을 떨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5·31의 충격이 조금씩 가시는 것으로 봤던지, 아니면 월드컵의 열기 뒤에 슬그머니 편승하려고 하는지 ‘고잉 마이 웨이’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새로 당의장이 된 김근태씨의 인터뷰를 보면 집권당은 이제 어물쩍 흐물흐물 그럭저럭 그렇게 갈 모양이다.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이라더니, 자기가 계급 높아지니까 계급장 뗄 생각이 없어지는 모양이다. 기껏 광주에 가서 한다는 소리가 호남 민심 돌아선 것이 특검 수용 때문이라니, 그게 참패한 여당의 대표자가 할 소리인가? 집권세력은 구제불능으로 가고 있다.

    이쯤 되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쪽은 오히려 국민이다. 그렇게 강하게 의사표시를 해줬는데 청와대도, 통일부도, 열린우리당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거기에 북한 당국까지 가세해 우리 국민에게 “당신들이 화나 봤자지 무슨 별 볼일 있겠느냐”는 듯이 약을 올리고 있다. 북한 당국자가 광주에 와서 하는 소리, 우리 관계자가 그것을 감싸주며 하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 국민은 지난 선거에서 헛손질한 셈이고 이제는 얕잡아 보이기까지 하고 있다. 세금 관련 여러 법제(法制) 등은 정권이 바뀌면 얼마든지 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진로나 안보와 관련된 사안들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은 한번 잘못 가면 자손만대에 그 영향을 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