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3일자 오피니언면 '포럼'란에 홍진표 자유주의연대 정책실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과거 운동권 핵심부에 있던 사람들은 단체사진 기피증이 있었다. 결혼식장에서도 사진 촬영 순서가 되면 슬슬 피해 다녔으며, 필자도 15년에 걸친 운동권 시절의 사진은 10여장에 불과하다. 단체사진은 공안기관의 운동권 인맥 정보가 되어 조직사건에 연루됐을 때 ‘이 사람을 어떻게 아느냐’는 식의 추궁의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비밀 활동을 하는 운동권은 당연히 수첩을 쓰지 않았으며, 꼭 필요한 사항은 쪽지에 메모로 남겨 유사시 삼키거나 버릴 수 있도록 대비했다.

    공안사건은 일반 형사사건과 달리 구체적 피해자가 없고, 물증을 찾기 어려워 유죄 입증이 간단하지 않다. 필자가 주사파 지하조직인 민혁당에 가입할 때 강령 등은 신문 여백에 연필로 깨알같이 써서 외운 후 소각했다. 문서화된 강령과 규약이 없으면 재판과정에서 반국가단체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며, 만약 사건화하더라도 ‘조작’이라고 부인하려는 포석이다. 특별한 체계적 훈련을 받지 않은 20대 운동권들의 조직 보안이 이 정도면 북한의 간첩이나 그의 협력자가 된 사람들은 그 이상의 대비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근래 여당과 민노당의 일부 의원들이 ‘인권 침해 가능성 등 수사권 남용’을 근거로 국정원의 수사권 폐지를 추진하고 있는데, 현재 국정원은 내란 및 외환죄, 군형법 중 반란죄, 국가보안법 등에 국한하여 수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 가운데서도 인권 침해 논란이 집중됐던 제7조 ‘찬양·고무죄’는 간첩 외에는 경찰이 수사하고 있다. 결국 국정원의 수사권은 주로 북한 및 외국의 간첩과 내란죄 등 명백한 반체제 행동에 대해 행사되고 있어 일반인의 인권 침해 우려는 과장된 것이다.

    국정원은 체제 보호와 직접 관련된 사건들이 결코 국내에 한정되지 않기 때문에, 국내외를 연결한 첩보망을 가동할 수 있으며, 실전 경험을 쌓은 전문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사건들의 취급에 있어서 교육으로 잘 해결되지 않는 노하우가 무척 중요하다는 점에서 경험자들의 장점은 무시할 수 없다.

    군사정권 시절에 ‘안기부 해체’를 외쳤던 사람들이 여전히 국정원의 권한 축소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일종의 관성현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권력을 잡고 있는 여당 의원들이 재야적 발상을 하는 이유는 납득하기 어렵다. 국정원이 공포의 기관이었던 시대는 이미 지났으며, 더구나 현재의 국정원은 어디까지나 ‘참여정부’ 자신들의 국정원이다.

    국정원의 수사권 폐지를 추진하는 의원들은 남북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했는데, 무슨 간첩타령이냐고 핀잔을 할 수도 있다. 그들의 주장대로 북한에 의한 체제 위협이 사라졌다 해도, 스파이 활동이 중단됐다는 증거도 없으며 중단될 이유도 없다. 심지어 우방 사이에도 첩보전은 있게 마련이다. 특히 국정원이 취급하는 외환죄나 반란죄는 북한이 주요 대상이 아닌 만큼 남북관계의 변화와는 전혀 무관하다.

    경제와 사회분야는 국가 정책이 현실보다 반걸음 이상 앞서 나가는 것이 필요할 때가 많지만, 최악의 경우도 대비해야 하는 안보분야는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보수적 태도가 필수적이다. 빠른 변화보다 현상 유지의 이득이 더 크다는 것이다. 북한의 위협 해소가 가변성 없이 명확히 실증될 때까지, 북한 대상의 국정원 수사권이 유지되더라도 국민 누군가의 권리가 침해당할 위험은 거의 없다.

    더구나 X파일 사건으로 촉발된 국정원 개혁 논의가 도청 사건과 전혀 무관한 수사권 폐지론으로 흘러가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다. 스스로 재야나 야당이라는 착각 때문에 민주화 이전의 국정원을 머릿속에 그리는 ‘시간의 정지’가 하나의 원인으로 보인다. 이걸 퇴행이라 부르든, 감수성의 과잉이라 부르든 상관없이 이런 현실로부터의 이탈은 국정을 책임지는 여당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