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만들었지만 우리나라 조선업의 모태가 된 기업한진그룹 인수 후 경영 정상화됐지만 세계금융위기로 수주 ‘0’한진중공업 노사 ‘빨리 일하고 싶어’…외부세력 ‘파업으로 뒤집자’
  • [부산=전경웅기자] 소재지 부산시 영도구 봉래동 5가 29번지. 2010년 말 기준 직원 수 3,473명. 부산에 본사를 둔 기업 중 규모 1위를 차지하며, 1937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소.
    어디인줄 아는가. 바로 한진중공업이다.
    최근 부산은 한진중공업 문제로 근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 세력들은 이 회사를 뒤집어 엎겠다고 덤비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대한민국 조선업의 뿌리 한진중공업

    한진중공업의 뿌리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7년 7월 10일 부산 영도에 세워진 조선중공업(주)를 모태로 한다. 설립 당시에는 서조철공소(西條鐵工所) 부지 약 8,000여 평을 이용한 규모였다. 1938년 3,000톤 급 건조대 2기, 6,000톤 급 도크를 갖추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업을 시작했다. 이후 시설을 확충하면서 현재 8만여 평 규모가 됐다.

    일제 패망과 함께 회사 주인이 사라지자, 남은 직원들이 수개 월 동안 관리대책위원회를 조직해 회사를 관리했다. 1945년 미군정이 정부투자기관인 신한공사로 귀속시킨다.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교통부 산하 공기업인 ‘부산조선창’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 ▲ 1948년 당시 대한조선공사의 모습. 한진중공업의 모태이자 우리나라 조선업의 뿌리다.
    ▲ 1948년 당시 대한조선공사의 모습. 한진중공업의 모태이자 우리나라 조선업의 뿌리다.

    1950년 1월 1일, 정부는 대한조선공사법(법률 제57호)을 공포해 ‘부산조선창’을 공기업인 ‘대한조선공사’로 바꾼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선기업인 것이다. 그러나 대한조선공사는 당시 우리나라의 기술력과 영업력 부족, 높은 수입의존도, 낮은 생산성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5.16혁명이 일어난 뒤 정부는 대한조선공사의 경영난 타개를 위해 1962년 4월 대한조선공사법을 다시 제정, 국영기업으로 만들었다. 정부는 조선업 활성화를 위해 선박 건조자금의 90%를 융자해 주고, 조선용 기자재의 관세를 면제하였으며, 계획조선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등 강력한 조선업 장려 정책을 시행했다. 그 결과 1962년부터 건조량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1965년 12월, 일본으로부터 305만 달러의 시설 차관을 도입하고 국내 자금 20억 원을 투입해 제2도크를 신설하는 등 생산 시설도 확장했다. 덕분에 최대 12,000톤 급, 연간 66,000톤의 선박 건조능력과 최대 2만 톤 급, 연간 30여 척의 선박수리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1964년 건조한 1,600톤 급 화물선인 ‘신양호와 ‘덕천호가 미국선급협회(ABS)의 인증을 받았고, 1968년에는 대만 정부가 발주한 250톤 급 어선 20척을 수주, 최초로 선박수출을 이뤄내는 등 우리나라 조선업 발전의 시초를 열었다.

    1960년대 후반 다시 운영난에 봉착했다. 1968년 11월 6일, 극동해운(주)에 인수되어 (주)대한조선공사로 재출범하게 되었다. 1970년대 들어 정상화 과정을 거쳐 시설 확장에 나섰다.
    1차로 1971년부터 2년 간에 걸쳐 12,000톤 급 제2 도크를 60,000톤급으로 확장하고, 선각공장과 산소공장 신축, 대형 조립장 신설, 제2 안벽 연장 등 부대시설을 보강했다. 2차로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15만 톤급의 제3도크 신설과 함께 각종 기계 장비를 도입했다.

  • ▲ 5.16혁명 이후 민영화되면서 환경을 바꾼 대한조선공사는 제2오일쇼크 전까지 활발한 영업활동을 벌이며 성장했다.
    ▲ 5.16혁명 이후 민영화되면서 환경을 바꾼 대한조선공사는 제2오일쇼크 전까지 활발한 영업활동을 벌이며 성장했다.

    1980년대 들어서 생산 및 지원 분.야의 9개 업체를 전문 외주업체로 계열화 했다. 이어 1981년에는 동해조선주식회사(現한진중공업 울산조선소)를 인수, 중형선박 건조 조선소로 전문화하고, 선박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주)부산수리조선소(現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수리선 부문)를 설립했다.

    대한조선공사에서 한진중공업까지

    이처럼 우리나라 조선업을 이끌던 대한조선공사는 1983년부터 내리막길에 접어들게 된다. 당시 노르웨이의 토발트 크라브니스社와 하브톨社로부터 수주한 6척의 다목적화물선(PROBO船)은 정유제품, 광석, 산적화물, 컨테이너 등 어떤 화물도 실을 수 있는 세계 최초의 다목적 선형이었다. 최첨단 위성항법장치, 선박운항관리 전산시스템, 화물창 밀폐시스템을 장착했다.
    그러나 선박 인도 기일인 1985년에 들어 세계 해운경기가 극심한 침체 국면에 접어들자 선주 측은 인도시기 연장을 요구했다. 이어 ‘해치커버 씰’의 결함 문제를 들어 인수를 기피했다. 결국은 6척에 대해 4,000만 달러의 가격을 깎아주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적기 인도 실패에 따른 엄청난 손해 및 자금 압박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와 함께 다대포 공장으로 이전한 철도차량 및 플랜트 부문의 과다한 투자, 해외건설 부문의 침체, 조선 불황의 장기화로 누적 적자가 확대되어 결국 1987년 4월 4일 서울지방법원에 회사 정리절차 개시를 신청했다. 채권단 대표인 서울신탁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이 회사에 상주해 경영 합리화 노력을 기울였다. 
     
    파산 상태에 다다른 대한조선공사를 놓고 국회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국회는 국정감사를 통해 5공화국 시절 부실기업에 대한 비판과 함께 금융 지원 중단을 촉구했다.
    결국 서울지방법원과 서울은행은 (주)대한조선공사를 공매하기로 결정했다. 두 차례 유찰을 거쳐 1989년 5월 15일 3차 입찰에서 862억 원을 써낸 한진그룹이 새 주인이됐다. 이로써 (주)대한조선공사는 계열사인 (주)극동해운, 광명목재(주), (주)동해조선, (주)부산수리조선소와 함께 한진그룹에 인수됐다.

    정부는 1989년 8월 28일, 조선산업 합리화 조치를 단행했다. 한진그룹은 이에 힙입어 회사 정상화에 착수했다.
    1990년 6월 회사 명칭을 (주)대한조선공사에서 (주)한진중공업으로 바꾸고, 그룹사간 유사 업종 통폐합을 통한 사업 분야 재정비에 착수했다.
    1990년 6월 1일 비조선 분야인 건설 부문을 (주)대한준설공사(現한진종합건설)로, 항공업은 한국공항(주)으로 각각 양도하고, 1990년 10월 1일 계열사인 한진조선(舊동해조선), (주)부산수리조선소, 광명목재(주)를 합병해 사업 구조를 신조선 및 수리선 사업, 철도차량사업, 기계플랜트사업으로 개편하고 본사 및 3개 전문공장 운영체제를 구축했다.

    1989년부터는 대규모 시설 투자가 이루어졌다. 수년간 방치된 노후 생산 설비를 전면 개보수하고 시설 합리화 및 자동화, 설비 현대화에 주력했다. 1995년까지 총 투자액이 2,000억 원을 넘었다.
    영도조선소는 1992년부터 LNG선 건조설비를 완비했다. 1995년에는 생산 능력 증대를 위하여 제3 도크의 연장 공사를 마무리했다. 울산조선소는 1994년부터 옥내 조립장 확충, 60톤 크레인 설치, 블록 적치장 신설 등 영도와 연계한 블록 전문 생산설비를 갖추게 됐다.

    한진그룹의 대규모 투자 덕에 한진중공업(대한조선공사)은 법정관리 신청 8년 5개월 만인 1996년 9월 30일 정상화를 선언했다.
    법정관리 중에도 한진중공업은 1992년 건조선박이 세계 최우수선박으로 선정되는 쾌거를 만들어 냈다. 동양 최초의 멤브레인형 LNG선 건조, 세계 최고속 컨테이너선, 첨단 자동화설비를 장착한 해저케이블선, 6,000TEU(컨테이너선 규모를 나타내는 단위. 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 수용 가능)급 컨테이너선과 LNG선을 처음으로 건조해 납품하기도 했다.

    쓰러져 가는 ‘부산경제 버팀목’

    1937년 일제에 의해 설립된 이후 이 같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한진중공업은 지금까지 1,000 여 척의 선박을 건조했으며, 총 90만DWT(건조중량), 최대 15만 DWT의 선박 건조 능력을 갖춘 세계 제10대 조선사로 성장했다.

  • ▲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는 특수선 사업부만큼은 국내 대형조선소들과 어깨를 겨룬다.
    ▲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는 특수선 사업부만큼은 국내 대형조선소들과 어깨를 겨룬다.

    방위산업에서도 한진중공업과 그 전신인 (주)대한조선공사의 업적은 단연 눈에 띤다. 1972년 방위성금을 모아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정 ‘학생호’를 시작으로 고속정, 초계함, 구축함, 상륙함, 잠수정, 전투지원함 등 100여 척(중남미 수출분 포함)의 전투함 및 지원함을 건조했다. 

    1999년에는 마산에 위치한 코리아타코마 조선소를 인수해 특수선 사업부를 운영하면서 그 경쟁력을 키워 나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항모형 상륙함인 ‘독도함’은 물론 부산대학교와 함께 차세대 해상운송수단이라는 위그선의 개발에도 성공했다.
    미래형 배를 연구하기 위한 쌍동선과 공기부양정 제작기술도 한진중공업 특수선 사업부만의 자랑이다. 존재 자체가 기밀이라는 잠수정도 한진중공업이 건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특성과 노력으로 2010년 말 기준 한진중공업의 자산은 6조2,830억 원, 매출 2조7,558억 원에 달하는 중견 그룹으로 변신했다. 그룹 계열사로 (주)한국종합기술, (주)한일레저, (주)대륜이엔에스, (주)대륜에너지, (주)대륜발전, 별내에너지(주)를 거느리고 있다.
    한진중공업은 부산에 본사를 둔 기업 중 매출 1위이자 수출 1위 기업이다. 협력업체는 2, 3차까지 합치면 1,000여 개에 달한다. 부산의 세수(稅收)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르노삼성자동차를 앞선 1위다.

    하지만 지금 부산경제의 중축인 한진중공업이 쓰러져 가고 있다. 이유는 ‘내우외환’.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닥친 뒤 세계 각국 정부와 대기업이 긴축정책을 펼치자 조선업계가 직격탄을 맞았다. 다른 국내 조선업체와는 달리 한진중공업은 해외 조선업체들처럼 그 유탄을 피하지 못했다. 2009년 이후 단 한 척의 선박도 수주를 하지 못한 것이다(반면 한진중공업이 필리핀 수빅만에 세운 조선소는 저렴한 인건비에 기인한 가격 경쟁력으로 20척 넘는 수주를 올렸다).

    한진중공업은 2010년에는 자산을 매각하는 등의 노력으로 3,000억 원을 확보해 부채를 갚고 비용을 줄여 겨우 흑자를 맞췄다. 하지만 더 이상 내다팔 자산이 없었다.

    결국 2010년 12월 10일 400여 명의 직원을 내보내려 했다. 이중 290명은 희망퇴직을 선택했고 110명은 정리해고 됐다.

    부산과 한진중공업의 현실 모르는 사람들의 '소설'

    직원들은 회사를 떠날 수 없다며 파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회사는 물론 세계 조선업계 사정을 뻔히 알았기에 하나둘 파업현장을 떠나 조업현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파업 2개월 만에 50%의 노조원이, 파업 3개월 만에 80%의 노조원이 현장으로 복귀했다.

    이때 ‘외부세력’이 개입했다. 김진숙 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 등이 ‘85호 타워크레인’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지난 6월 중순에는 ‘희망의 버스’라는 이름을 내건 외부 세력들이 공장에 난입했다.

    2009년 쌍용차 사태와 ‘비슷한 일’이 부산에서 일어나자 부산 시민들은 분노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10년 동안 규모가 있는 기업들이 속속 부산을 떠나면서 인구까지 감소하는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대기업이 ‘빈사’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것도 답답하고 안타까운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이들이 ‘평범한 시민’을 자처하며 부산 기업에 난입해 ‘감놔라 배놔라’며 소란을 피운 것이다.

    ‘부산저축은행 사태’ 때는 모른 척하던 정치인들까지 끼어들자 시민은 물론 언론까지 분노하고 있다.

    지역 일간지인 <국제신문>은 지난 6월 20일자 보도를 통해 “노조가 외부인사들의 개입에 손사래를 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보도에서 최우영 노조 사무장은 “정치인과 단체들이 조선소 앞에서 집회를 열면 경찰이 배치되고 사측과의 대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게 돼 환영할 수만은 없다”고 털어놨다.

  • ▲ 지난 6월 21일자 <국제신문>의 기자수첩. 부산 민심도 모른 채 무작정 끼어들려는 정치세력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 지난 6월 21일자 <국제신문>의 기자수첩. 부산 민심도 모른 채 무작정 끼어들려는 정치세력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국제신문>은 이어 6월 21일자 ‘기자수첩’을 통해 “한 정치인은 ‘희망의 버스’를 ‘사랑의 버스’로 알고 있었다”고 지적하며, “노사 양측이 해결해야 할 문제에 정치인들까지 끼어들면서 정치이슈로 변질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기자 또한 “지금 노사 모두 ‘일하고 싶다’며 아우성치고 있다”고 현장 상황을 전했다.

    <부산MBC> 또한 지난 6월 20일자 보도를 통해 “한진중공업 노조가 외부 인사들의 지원 방문에 손사래를 치고 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현장 취재 기자는 “지난 주말 서울의 진보신당 당원 20여명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를 찾았다. 하지만 (한진중공업 노조와) 아무런 협의도 없이 방문해 노조와 마찰을 빚었다”고 전했다. 이 보도에서 노조원은 “(외부 인사의 방문은 자칫)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 것”이라며 경계했다.
    기자는 “정치권과 노동계는 유행처럼 계속되는 한진중공업 파업지원 방문에 앞서 방문하는 사람의 이해관계를 내세우기보다 노사 교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고민이 먼저 필요해 보인다”며 따끔하게 지적했다.

    부산시와 부산시 의회, 부산상공회의소, 부산시민단체회의 등도 호소문을 통해 "더 이상의 폭력시위는 지역 경제에 악영향만 미친다. 그만 해 달라"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트위터 등 SNS와 인터넷에서는 이런 한진중공업 노사와 부산 지역 민심을 전하는 목소리는 거의 접할 수가 없다. 한진중공업이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는 조선업의 모태라는 점, 지금 타워크레인에서 농성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이 1989년 해직되었고 이후 복직소송을 냈지만 대법원에서 패소판결을 받은, ‘한진중공업’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점, 부산 경제의 실상 등에 대한 ‘사실’도 찾아보기 어렵다.

    때문에 부산 이외의 지역에서는 한진중공업 사태에 대한 ‘사실’보다는 ‘자기만의 논리’에 기반한 ‘주장’들만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