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기의 미인'도 가고
      
    러시아의 대통령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지구상에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지난 23일에 세상을 떠난 영국 태생의 미국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모른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특히 20세기를 함께 살아온 남성들 중에는! ‘세기의 미인'이라고 하면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았을 겁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보다 더 잘생긴 여자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다만 그들에게는 세상에 알려질 기회가 없었던 것뿐입니다. 사람들이 가 볼 수도 없는 깊고 험한 산골짜기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었다 지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활동사진(영화)라는 매체가 그녀의 모습을, 그녀의 재능을, 그녀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려주었고 그녀를 뭇 남성의 애인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중국 땅 서안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진나라 시황제의 유적을 보기 위해서였으나, 중국 역사의 초대의 미인으로 알려진 양귀비가 당나라 현종과 같이 살던 곳에도 안내해 주었습니다. 수십 년 전의 일이라 공산당의 위력이 더 대단한 시절이었으므로, 우리를 안내한 핵심 당원이 거기 가서 양귀비의 부르조아 근성을 성토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 ‘부도덕’했던 절세의 미인의 아름다움을 극구 찬양하였습니다. 그의 찬사를 들으면서 공산당도 미인 앞에서는 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리즈 테일러의 길고 긴 일생에는 고난과 시련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었습니다. 여덟 번의 결혼이 그에게 많은 슬픔과 아픔을 주었을 것입니다. 만날 때의 기쁨은 잠깐이고 헤어질 때의 흘린 눈물은 하염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녀가 병고에 시달린 세월이 그녀가 건강하던 날들보다 더 길었을 것입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 듯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어쩌면 이 노래가 미스 테일러의 삶을 두고 읊은 노래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2007년 5월 12일, 여류 작곡가 김순애의 장례식에서 내가 그녀를 추모하여 읊조린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의 시 한 구절을 또 다시 ‘세기의 미인’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영전에 바칩니다.

    Strew on her roses, roses
    and never a spray of yew.

    김동길
    www.kimdonggi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