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26일 사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 해가 저무는 시점에서 올해 선진국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이를 한 줄로 꿰는 몇 개의 키워드를 찾아낼 수 있다. 정부 축소, 공기업 민영화, 규제 완화, 친(親)기업, 대외개방이 그것이다. 압축하면 ‘작은 정부, 큰 시장’이다. 또한 노사(勞使) 및 교육 개혁을 빼놓을 수 없다. 

    스웨덴 국민은 9월 총선에서 노무현 정부가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 모델’이라고 치켜세우던 바로 그 모델을 버렸다. 그 대신 “열심히 일한 사람은 월급날 1000크로나를 더 가져가야 한다”는 구호를 내건 중도우파를 선택했다. 새 정부는 공공복지 지출 축소, 근로소득세 감면, 세계화 추진, 노동시장 유연화에 착수했다.

    작년 말 출범한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정부는 공공부문 민영화, 기업규제 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전자산업 설비투자가 5% 늘어났다. 투자가 활성화되면서 기업경기실사지수는 1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도 기업 부담을 줄이기 위해 엔론 회계분식사건을 계기로 제정한 사베인스-옥슬리 법을 완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규제 철폐, 금융기관 부실 처리, 노동관련법 개정, 민영화 등 고이즈미 전 총리가 시작한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조차 집권할 때는 좌파였지만 정부지출 축소와 조세 감면, 시장 중시 정책으로 경제를 살려낸 뒤 재집권에 성공했다.

    정부·공공 구조조정, 민간 활력 극대화

    선진국들의 트렌드에 비춰 볼 때 한국은 ‘거꾸로 주행’ 하는 양상이다. 공기업 민영화는 사실상 중단됐고 공무원 조직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기업 괴롭히기를 사회정의 구현으로 착각하는 듯하다.

    노사관계의 변화도 빨랐다. 덴마크의 아네르스 포그 라스무센 총리는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했더니 고용이 늘었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노동시장 유연성이 있어야 일자리가 는다”고 권고했다.

    우리는 어떤가.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강성 노동운동은 전체 근로자의 10% 남짓한 조직노동자의 기득권 지키기에 매달려 대규모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 전체 노동자 문제는 ‘나 몰라라’ 하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파업 같은 정치투쟁에는 열심이다.

    올해 선진국 개혁 열풍의 중요한 한 갈래는 교육이다. 일본의 총리 직속 교육재생회의는 공립초중고교 교사의 20%를 각 분야에서 현직으로 활동 중인 사회인으로 충원하고 교원면허를 5년마다 갱신하는 내용의 교육개혁보고서를 내년 초 내놓을 예정이다.

    학교·교사 적자생존 통해 인재경쟁력 강화

    미국에서는 2002년 제정된 ‘낙오학생방지법’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공립학교 학생은 표준화된 독해 및 수학 시험을 치르고 있고, 학교는 목표에 미달하는 학생을 위해 특별교육을 실시한다. 초임 교사 300만 명 중 매년 8.3%의 교사가 교원평가에 걸려 자리를 떠나는 ‘교사혁명’이 진행 중이다. 미국과 일본은 “풀빵 찍듯 하는 학교가 국가 경제를 망칠 것”이라는 앨빈 토플러의 경고를 새겨들어 무사안일의 공교육시스템에 메스를 들이댄 것이다.

    우리의 교육부는 ‘3불 정책’도 모자라 대학에 입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가 하면 자립형사립고나 특수목적고 설립 권한을 틀어쥔 채 수월성(秀越性) 대신 평둔화(平鈍化)로 가고 있다. 교사들은 허울뿐인 교원평가제마저도 반대하며 철밥통 수호에 나섰다. 미래에 대비하려면 과학기술 투자가 긴요하지만 한국에서는 이공계 위기가 여전하다.

    선진국이 개혁의 고통을 선택한 것은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우리 정부는 선진화의 길은 외면하고 ‘비전 2030’ 같은 공허한 환상을 부풀리는 데 열중하고 있다. 일부 노조와 전교조 교사도 마찬가지다. 정부와 사회 각 부문이 선진국의 개혁 트렌드를 외면하고 철밥통 지키기에만 몰두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