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인 100명 중 1명꼴 도박중독 가능성정신질환의 하나...자각증세 없는 ‘침묵의 살인자’
  • A씨는 24세 때 부모님의 도움으로 서울 중심가에 본인 명의의 가게를 차렸다. 성실하게 일한 그는 월수입 1000만원을 올리고 매달 부모님께 100만원씩 갚아나가고 있었다.
    매일 저녁 5~6시에 일어나서 저녁 7시에 가게를 열고 새벽 3~4시까지 열심히 일하면서 직원들 월급 한 번 미뤄본 적 없었다.
    A씨에게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2년 뒤인 26세가 되면서부터였다.
    가게 운영의 노하우가 생기고 신경을 쓰지 않아도 직원들이 잘 꾸려가게 되면서부터 혼자 사무실에 앉아서 컴퓨터나 인터넷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면서 “내가 왜 이 일을 하나? 내가 뭐하고 있나?”라는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일이 끝나면 새벽 3~4시.
    만나고 싶은 친구나 지인들은 자고 있을 시간이어서 만날 상대도 없었다.
    그렇다고 열심히 하루 일을 마무리하고 그냥 잠자리에 들기도 아쉬웠다. 무기력해지고 기분도 우울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A씨는 새벽에 쓸쓸히 퇴근을 하다가 우연히 가게 근처에 있는 스크린 경마장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방문한 도박장에서 몇 번 따는 경험을 하면서 숫자를 맞추는 희열, 따분함을 달래주는 재미, 아슬아슬한 스릴감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이후 4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도박장을 찾아서 한 경주에 15만원 정도씩 배팅하여 매일 80만~100만원 정도 쏟아 부었다. 더 이상 손대면 안 된다는 생각에 10일 정도 중단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손님이 100만원권 수표로 계산을 요청한 날, 근처 도박장에서 환전을 하면서 도박에 대한 유혹에 다시 넘어가 버렸고 이후 도박 행동은 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져 갔다.
    경기가 좋지 않아서 하루 가게 수입이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날이 잦아졌고, 그 때마다 부족한 수입을 메우기 위해 도박장을 찾았다.
    그 동안 부모님께 갚았던 5000만원을 다시 빌려서 도박으로 탕진하였고 이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 갖은 거짓말을 하면서 스트레스는 늘어갔다. 1년여 동안의 도박 생활 끝에 8000만원을 도박으로 탕진했고 차를 담보로 1000만원의 빚까지 지게 되었다.
    잃은 돈을 만회하려고 도박장을 찾지만, 100만원을 들고 가서 50만원을 잃어버리면 남은 50만원도 마저 써서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무기력해지기 시작했다. 장기간 도박에 빠지면서 결국 사랑하던 연인과도 헤어졌다.

    방송인 신정환 도박사건으로 국민들의 관심이 도박에 쏠리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100명 중 1명꼴로 도박중독이 될 가능성이 높고, 이로 인해 매년 심리치료를 받는 사람이 크게 늘고 있다고 한다.
    가족들끼리 명절에 모처럼 모이면 둘러앉아 고스톱부터 치는 한국의 풍속으로 볼 때 우리국민들은 도박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위에 든 사례는 도박중독증 치료를 위해 설립한 한 공공기관의 피해상담 사례이다.
    상담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이웃이다. 그 평범한 이웃이 도박으로 인해 사생활이 파괴되고 인간관계도 절연된다. 결국 우리 누구도 도박중독과의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 ▲ 가정주부를 대상으로 한 무허가 카지노 도박장에서 압수한 현금들ⓒ연합뉴스
    ▲ 가정주부를 대상으로 한 무허가 카지노 도박장에서 압수한 현금들ⓒ연합뉴스

    도박중독증을 정의하면 “자신의 의지로 도박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상실되어, 자기 자신은 물론 가정과 사회의 도덕성을 파괴함과 동시에 재정상태의 파탄을 인식하지 못하고, 도박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도박중독증이 자각증세가 없는 치명적인 ‘침묵의 암살자’라는 것이다.
    친구나 이웃과의 오락이나 친목, 스트레스해소를 위한 놀이로 시작한 도박이라도 계속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박중독에 빠지게 된다. 뒤늦게 손을 떼겠다고 자각을 하지만 그때는 이미 잃을 것을 다 잃은 상태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몰려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가정은 파괴되고 당사자는 인생의 바닥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비극까지 공공연히 일어난다.
    지난해 국감자료에 따르면 2000년 강원랜드 개장 이후 정선지역에서만 도박빚을 비관해 자살한 사람이 모두 35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집계된 자료일 뿐, 도박과 관련해 목숨을 버리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지난 2003년 경남 창원경륜장에서는 경륜으로 1억을 날린 40대가 극약을 마시고 자살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극단적인 선택 말고도 소중히 벌은 재산을 몇 달 만에 날리는 경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과천 경마장의 경우 ‘고급 승용차를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경마로 돈을 잃은 사람들이 만회를 위해 타고 온 승용차를 헐값에 현장에서 팔아버린다는 것이다.
    카지노와 경마, 경륜 외에도 사회 주변에 도박을 할 수 있는 사행시설은 널려있다.
    한 전문가는 “노무현 정부가 ‘바다이야기’를 허용한 이후 이 같은 불법도박 시설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한 도박중독 상담사는 도박 중독을 단계적으로 나눠 설명했다.
    1) 도박으로 돈을 벌 생각, 다음 도박에 대한 계획, 손실이나 만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2) 흥분을 즐기기 위해 탐닉하는 액수가 점점 늘어난다.
    3) 도박을 그만두거나 통제하려고 시도하지만 대개 실패한다.
    4) 도박을 못하면 불안하고 초조하며 신경질적으로 변하게 된다.
    5) 우울한 기분이나 현실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도박을 한다.
    6) 돈을 잃은 후에는 잃은 돈을 만회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건다.
    7)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도박을 한 빈도나 손해를 본 액수, 도박을 한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8) 도박할 돈을 구하거나 빚을 갚기 위해 절도, 사기, 횡령 등의 불법을 저지른다.
    9) 도박으로 인하여 중요한 대인관계, 직업이나 교육기회 등을 놓치게 되거나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10) 도박으로 인해 절망적인 재정 파탄에 빠지고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경제적 도움을 의지하게 된다.

    이 상담사는 “도박중독은 말 그대로 ‘중독성’이 강해서 마약보다 재발방지가 어렵다”고 강조했다.
    그는 “도박중독은 마약중독이나 알콜중독과 같은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지병”이라며 “실제로 도박장에서 돈을 따기를 기대하는 사람의 뇌는 마약을 복용하는 사람의 뇌와 동일한 반응을 나타낸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사회 차원에서 보호나 수용 시설을 활용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강원대 사회학과 이태원 교수는 “국가가 도박을 불법으로 지정하고, 한편 국영 도박은 합법화하고 있는 이중성이 도박을 하려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보호판이 되고 있다”고 정부의 이중적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