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3일자 오피니언면에 문학평론가인 유종호 전 연세대 특임교수가 쓴 '열린사회의 적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서구 소설을 보면 침실이 대개 2층에 있다. 그래서 2층으로 올라간다는 것이 취침하러 간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영어에서 어린애를 2층으로 보낸다는 표현은 흔히 잠재우러 보낸다는 뜻이다. 왜 침실이 2층에 있는가? 그런 의문은 가질 필요도 없다. 유서 깊은 관습으로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회사 책을 보면 다 까닭이 있다.

    중세에는 생활수준이 로마시대보다도 크게 저하하고 떼도둑이 횡행했다. 성벽 없는 도시나 자유시민이 사라지고 성벽에 둘러싸인 장원(莊園)과 농노가 등장했다. 자기 집에서도 1층은 위험해서 이동식 사다리를 이용해 2층으로 올라가 잤다. 강도와 거리 폭력을 조금이라도 피해 보려는 시도가 2층 침실 사용의 사유가 됐다. 삶은 가파르고 모질었다.

    왕실과 교회가 권력과 권위를 독점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가 크게 보아 20세기보다 한결 문명화된 시대였다고 생각하는 사상가가 많다. 세계대전과 히틀러 및 스탈린의 조직적 체계적인 대량학살을 염두에 둘 때 거역하기 어려운 명제다. 전체주의란 정치적 공룡의 등장과 횡포는 가장 인간화된 시대가 될 수도 있었던 20세기를 최악의 시대로 만들었다. 대영제국(帝國),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이 식민지주의와 함께 사라지면 세계는 한결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되리라는 19세기 말 좌파의 낙관적 전망은 오판임이 드러났다.

    ‘선악이원론’은 전체주의 기초

    세칭 진보주의자는 공산주의를 전체주의로 범주화하는 일에 극력 반대한다. 막강한 권력을 어떤 계급의 이득을 위해 행사하느냐에 따라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엄연히 구분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치적 실천과 실적의 검토는 이런 주장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경제적 합리성이란 면에서의 차이성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유사성과 공통성은 현저하다. 그것은 공산권 붕괴 이후 노출된 구체적 상황에 잘 드러나 있다.

    전체주의의 기초는 세계를 상호배제적인 두 부분, 선과 악으로 나누는 선악이원론이다. 선악이원론에 서서 자기는 선이며 타자는 악으로 간주한다. 선은 악을 배제하고 척결할 의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는 따라서 나와 남, 우리와 저들, 못 가진 자와 가진 자, 아리안족과 비(非)아리안족, 적자(適者)와 부적자, 깨끗한 자와 부패한 자로 세계를 분할하고 후자의 억압과 배제를 시도한다. 사르트르는 모든 전쟁은 선악이원론에 서 있다고 했지만 전체주의는 따라서 전쟁의 논리에 서 있다. 전체주의 역사에서 각별히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도 극도로 단순화된 선악이원론의 수사학으로 사태를 호도하고 사리판단을 혼미하게 하는 선동가가 많다. 이들은 걸핏하면 사회적 약자와 기득권자, 없는 자와 있는 자, 강북과 강남, 청결세력과 부패세력, 80%와 20%, 평화세력과 전쟁세력으로 국민을 이분법으로 분할해서 적의를 부추기며 반대자를 협박한다. 그러한 흑색 선동의 수사학으로 번번이 재미를 본 것도 사실이다. 이런 행태는 반대자의 존재와 권리를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반민주적 발상의 소산이다. 소수파의 박해는 이내 다수파로도 확산된다.

    복지사회의 목표는 노약자, 장애자, 병자, 실업자 등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지 않는 잉여인간의 최저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정부가 이런 분야에서 이룩한 성과가 과연 있기나 한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불필요한 위원회를 만들고 공무원을 증원해서 패거리나 봐주는 것 아닌가? 2002년 가을이나 올가을처럼 대선을 앞두고 남북에서 단군 이래 최고의 진수성찬을 즐기며 남북관계를 선거 전략으로 활용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거기에 토를 달면 곧 전쟁하잔 말이냐며 생떼나 쓰는 것은 아닌가? 핵무기 폐기 주문이 어째서 전쟁하자는 것인가? 그런 말도 못 하게 하는 인사들이야말로 전쟁 자초 세력이 아닌가?

    국민 이간 세력이 ‘진보’라니…

    일찍이 ‘진보’는 자유와 인권과 사회정의 쪽에 서 있는 세력의 호칭이었다. 독선적 선악이원론으로 국민을 이간하고 선동이나 협박을 일삼는 정치인은 열린사회의 적이다. 이런 ‘사회 파시스트’가 득세하는 한 민주적 복지사회의 구현은 요원하다. 이들을 ‘진보’라 호칭하는 것도 가당치 않은 국어 오용(誤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