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름끼치는 노무현 어록(語錄)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지켜진 것은 奇蹟(기적)이었다.

    金成昱

         

  •   ▲“진보주의자는 차가 아무리 비좁더라도 ‘같이 타고 가자’라고 말하는 사람이고, 보수주의자는 ‘비좁다, 늦는다, 태우지 마라’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곧 진보의 가치는 자유, 평등, 평화, 박애, 행복을 강조하고, 보수의 가치는 시장과 경쟁을 강조한다는 것이다.”(2009년 노무현 유고집, ‘진보의 미래’)
      
       ※ 현재 한국의 자칭 진보는 2400만 북한주민의 자유, 평등, 평화, 박애, 행복은 철저히 무시하는 가장 퇴보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진심으로 (남북)통합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주권의 일부를 양도할 수도 있고, 양보가 항복도 이적행위도 아니라는 인식을 수용해야 한다.…흡수통일을 전략으로 삼아 상대 권력의 붕괴를 추진한다면 그것은 북한을 자극하여 평화통일을 깨는 일이 될 수 있다. 북의 붕괴를 획책하는 발언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생각이 짧은 사람들이다.” (2008년 10월1일, ‘10‧ 4 선언 1주년 기념 학술회의’ 격려사)
      


  •    ▲“그놈의 헌법이 토론을 못하게 돼 있으니까 (대통령이 직접 토론하는 것은) 단념 해야지요” (2007년 6월2일 참여정부평가포럼 연설)
      
       ▲“서해북방한계선(NLL)은 실질적으로는 거의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문제를 놓고 괜히 어릴 적 땅 따먹기 할 때 땅에 줄 그어놓고 네 땅 내 땅 그러는 것과 같다. 어릴 때 책상 가운데 줄 그어놓고 칼 들고 넘어오기만 하면 찍어버린다, 꼭 그것과 비슷한 싸움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2007년 11월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들과의 간담회에서의 연설)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2007년 10월2일, 방북 중 평양 만수대의사당 방명록에 남긴 글) 
       
       ▲“남북 간 평화가 잘되고 경제가 잘되려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하고, 김영남 상임위원장도 건강해야 한다. 두 분의 건강을 위해 건배하자”(2007년 10월2일, 김영남 최고회의 상임위원장이 주최한 만찬에서 건배를 제의하며)
      

  •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北核(북핵)이라고 소리 높이는 것은 정략적인 의미로 얘기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서 북핵을 말하라는 건 가급적 가서 싸움을 하라는 것이다.”(2007년 9월11일, 청와대 춘추관 기자회견)
      
       ▲“지난날의 기득권 세력은 守舊(수구)언론과 결탁해 끊임없이 개혁을 반대하고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지난날 독재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민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해왔던 守舊(수구)언론들은 그들 스스로 권력으로 등장해 민주세력을 흔들고 守舊(수구)의 가치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2007년 6월10일, 6월항장 20주년 기념식)
      
       ▲“북한이 달라는 대로 다 줘도 결국은 남는 장사” (2007년 2월15일, 이탈리아 로마)
      
       ▲“찍힌 거지요, 제가. 참여정부의 언론 정책이 괘씸죄에 걸린 것 아닙니까?···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실한 상품이 돌아다니는 영역은 미디어 세계입니다”(200년 1월4일 과천청사 공무원 격려 오찬 연설)
      
       ▲“한국 국방력이 북한보다 약하다고 하는데, 그 많은 돈을 우리 군인들이 다 떡 사 먹었냐. ···옛날 국방장관들이 나와서 떠드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들 직무유기한 것 아닌가.···심심하면 사람들한테 세금 내라 하고, 불러다가 ‘뺑뺑이’ 돌리고 훈련시키고 했는데. 그 위의 사람들은 뭐 했나. 자기나라 자기 군대의 작전 통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놓고 나 국방장관이오, 나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그런 것이냐. 그래서 (전작권) 회수하면 안 된다고 줄줄이 몰려가서 성명 내고, 자기들이 직무유기 아닌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미국한테 매달려 가지고 바짓가랑이 매달려 가지고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형님, 형님 백만 믿겠다.’ 이게 자주국가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 있겠나. 자기들 나라, 자기 군대 작전 통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놔놓고 그렇게 별들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얘깁니까.” (2006년 12월21일, 민주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회 연설)
      

  •    ▲“젊은이들 군대에 가서 몇 년씩 썩히지 말고 그 동안에 열심히 활동하고 장가를 일찍 보내야 아이를 일찍 낳을 것 아니냐.”(上同)
      
       ▲“북한의 붕괴를 막는 것이 한국 정부의 매우 중요한 전략이다. 북한은 공격받거나 붕괴되지 않으면 절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유엔 안보리 결의로 중단돼 있어 걱정이다.” (2006년 12월9일, 뉴질랜드 교포 간담회)
      
       ▲“임기 다 마치지 않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2006년 11월28일 국무회의)
      
       ▲“미국의 대북 군사행동에 반대한다. UN안보리를 통한 제재에도 반대한다. 북한에 경제지원을 보다 더 해주고, 체제안전을 약속해야 한다.”(2006년 8월18일)
      
       ※ 같은 해 10월 북한은 핵실험을 단행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것은 선제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며 남한의 지원 여부에 따라 핵 개발을 계속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북한이 핵을 선제공격에 사용하게 되면 중국의 공조를 얻지 못하는 등 여러 제약이 따를 것(2006년 5월29일 향군지도부초청환담 中)”
      
       ▲“(북한에 대해) 많은 양보를 하려고 합니다. 양보를 원칙 없이, 국민 보기에 따라 자존심 상하게, 원칙 없이 양보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전쟁이라는 것, 한국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가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백지화하고 모든 것을 북한 뜻대로 하자, 북한에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이런 방식으로 양보할 수 없지만, 본질적인 정당성의 문제, 이런 문제에 대해서 그것을 양보하는 것이 아닌 다른 제도적·물질적 지원 이런 것은 조건 없이 하려고 합니다.(2006년 5월9일 몽골 방문 中)”
      

  •    ▲“언론권력의 남용을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중요하다.” (2005년 5월 30일 세계신문협회 총회 연설)
      
       ▲“평화를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대량살상 무기 같은 민감한 문제에 끊임없이 의혹을 부풀려 불신을 조장하고, 그 결과 국가 간 대결을 부추기는 일은 없는지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2005년 5월 30일 세계신문협회 총회연설)
      
       ※ 미국의 북한의 대량살상 무기 의혹을 부풀리고 있다는 식으로 비난하며 나온 발언
      
       ▲“진보는 무엇이고 보수는 무엇인가? 대개 이렇게 보면 된다. 보수는 힘센 사람이 좀 마음대로 하게 하자.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거의 모든 보상을 주자는 것이다. 적자생존의 원리를 철저히 적용하자, 약육강식, 그것이 우주의 섭리 아니냐, 그렇게 말하는 쪽에 가깝다.…진보는 뭔가? 더불어 살자, 인간은 어차피 사회를 이뤄 살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느냐?, 연대다.…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의별 보수 다 갖다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 이거다.”(2004년 5월27일 연세대 초빙연설)
      
       ▲“통일을 모두 소망하고 노력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천천히 할수록 무리한 비용이 들지 않고 부작용도 없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2005년 5월 11일 러시아 방문 시)
      

  •    ▲“한국국민들 중 미국 사람보다 더 친미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게 내게는 걱정스럽고 제일 힘들다.” (2005년 4월 16일 터키 방문 시 동포간담회)
      
       ▲“대북압박을 강화한다고 해서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럴수록 상황이 더 악화될 것” (2005년 4월 14일 독일 일간지 디 벨트 인터뷰)
      
       ▲“한국 정부는 북한이 갑작스럽게 붕괴하는 걸 조장할 생각이 없다. 북한에서 어떤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북한 내부에 상황을 통제할 만한 조직적 역량이 있는 만큼 갑작스럽게 붕괴할 가능성도 매우 낮다.”(2005년 4월 13일 프랑크푸르트 동포간담회)
      
       ▲“중국은 물론 한국도 북한의 급격한 붕괴를 원치 않는다.” (2004년 12월 5일 바르샤바 동포간담회)
      
       ▲“지난 1987년 이후 북한은 테러를 자행하거나 그 밖의 테러를 지원한 일이 없다. 지금도 테러조직과 연계되어 있다는 근거도 우리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수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북한의 말은 믿기 어렵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북한의 주장은 여러 가지 상황에 비추어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6자회담의 틀이 만들어지기 전에 일부에서 북한에 대한 무력행사가 거론된 일도 있었다. 한국 국민들은 무력행사를 얘기하면 전쟁을 먼저 머리에 떠올린다.… 바로 이 때문에 무력행사는 협상전략으로서의 유용성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봉쇄정책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해결방법이 아니다. 불안과 위협을 장기화할 따름입니다. 붕괴를 기대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이 역시 한국국민들에게는 큰 재앙이 될 것이다.”(2004년 11월 12일 국제문제협의회 LA지부 간담회)
      
       ▲“인권과 민주주의가 철저히 유린당하던 그 시절. 부산과 마산시민이 일어섰다.”(2004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요즘은 옛날에 독재정권을 돕거나 또는 독재정권의 편에 서서 인권탄압이나 독재를 방관했던 많은 단체들도 거의 아무 제약 없이 그야말로 민주적 권리와 인권을 한껏 누리고 있는 수준이다. 정권을 맡은 사람의 처지에서는 그 사람들을 좀 제한했으면 하는 생각이 없지 않지만, 국민들에게 물어봤더니 ‘듣기 싫더라도 괘씸하더라도 그런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2004년 10월 14일 해외민주인사초청다과회)
      

  •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은 폐기하고 칼집에 넣어서 박물관에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2004년 9월 5일 MBC 특별대담,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
      
       ▲“수도이전반대 주장에는 수도권과 지방을 대립시켜 新지역주의를 조장하는 불순한 의도도 깔려 있는 것 같다.”(2004년 7월12일)
      
       ▲“수도이전 찬반논란은 대통령 흔들기의 저의가 있다▲“(2004년 7월8일)
      
       ▲“행정수도계획은 참여정부의 핵심문제이기 때문에 정부의 명운, 진퇴를 걸고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2004년 6월15일)
      
       ▲“북한은 핵을 포기할 용의가 있다. 미국이든 북한이든 딴생각 말고, 거짓말하고 있지 않은 이상 결국 이 문제는 풀린다(2004년 4월12일 독일 방문 中)”
      

  •    ▲“노건평氏는 아무런 힘이 없다. 대통령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가만 좀 내버려두시면 좋겠다. 대우건설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2004년 3월11일 측근 비리 관련, 청와대 기자회견)
      
       ▲“남상국 사장이 청탁했다는 이유로 해서 내가 민정과에 ‘청와대의 인사사항은 아니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데까지 행사해서 연임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뒤에 확인까지 했다.”(上同)
      
       ※ 노무현氏는 같은 연설에서 남상국 前 대우건설 사장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직격탄을 날렸다. 기자회견 직후 남 前 사장은 곧바로 한강에 투신자살했다.
      
       ▲“잘못이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시끄러우니까 사과하고 넘어가자. 그래서 탄핵을 모면하자 이렇게 하라는 것이면 제가 받아들이기 어렵다.”(2004년 3월11일 청와대 특별기자회견)
      
       ▲“몇 년 지나면 용산기지는 우리 국민들의 손에 들어온다. 간섭과 침략과 의존의 상징인 그 용산기지가 우리 국민들의 손에 들어온다.”(2004년 3월1일 3·1절 기념식)
      
       ▲“국민들이 총선에서 우리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2004년 2월 24일 방송기자클럽 초청기자회견)
      
       ※ 대통령의 선거관련 발언들은 선거법상 不法(불법) 선거운동이다.
      

  •    ▲“우리의 통일은 독일식 흡수통일과 분명히 다를 것이며 이는 모든 국민이 합의하고 있는 바.…우리는 오랫동안 국가연합체제에서 각기 지방정부를 갖게 될 것이며 통일수도는 개성일대에 대단히 상징적으로 만들어질 것”(2004년 2월24일 방송기자클럽회견)
      
       ※ 한반도 唯一(유일)합법정부는 대한민국이며 북한정권은 反국가단체, 즉 반역·반란단체로서 평화적인 해체대상이다. 대한민국을 북한정권과 대등한 지방정부로 격하시킨 이 발언은 정통성을 포기하는 위헌적 발언이다.
      
       ▲“되도록이면 허용하고 장려해야 된다고 생각한다.”(2004년 2월5일, 선관위가 ‘국참0415’에 대해 不法(불법) 선거운동에 대해 선거법 준수를 강조하자 강원도언론인과의 간담회에서 나온 발언)
      
       ▲“구세력의 뿌리를 떠나서 새 세력이 국가를 지배하기 위한 터를 잡기 위해서는 遷都(천도)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한 시대, 지배세력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 큰 변화를 국민이 선택한 것이다.”(2004년 1월29일)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을 돕는 격이다.”(2003년 12월 30일)
      
       ▲“시민혁명은 계속되고 있다. 다시 한 번 나서달라.”(2003년 12월 19일 노사모 주최 ‘리멤버1219’행사)
      
       ※ 이상의 발언들 모두 선거법상 不法선거운동이다.
      
       ▲“우리가 쓴 불법자금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걸고 정계를 은퇴할 용의가 있다.” (2003년 12월14일 4당대표회동)
      
       ※ 당시 노무현氏의 발언은 수사를 진행 중이던 검찰에게 ‘노무현 캠프의 불법 대선 자금을 한나라당의 10분 1이 넘지 않도록 하라’는 가이드라인을 내린 것이라는 여론의 맹공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검찰은 2004년 3월8일 노무현 캠프의 불법대선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7분의 1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했지만, 노무현氏는 정계 은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엄격한 법적 처벌도 중요하지만 우리 한국사회의 폭과 여유와 포용력을 全세계에 보여주는 것도 또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2003년 10월13일 북한의 대남공작원 송두율에 대한 선처를 말하며 나온 발언)
      

  •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데 대해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죄드리고 책임을 지려고 한다.···수사결과 무엇이든 간에 이 문제를 포함, 그동안 축적된 국민들의 불신에 대해 재신임을 묻겠다.···아무리 늦더라도 총선 전후까지는 재신임을 받을 생각”(2003년 10월10일 자신의 핵심측근인 최도술 前청와대 총무비서관의 SK자금 수수 관련 발언)
      
       ▲“가장 강한 권력인 정치권력과 언론이 不義(불의)의 공생을 도모했다. 그때마다 正義(정의)의 편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의 피해가 컸다. 우리 사회에서 힘을 정의로 믿는 기득권이 형성된 것도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이 야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2003년 9월 8일 ‘대한매일’ 기고문)
      
       ▲“인공기와 김정일 위원장의 초상화를 불태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유감이다”(2003년 8월19일)
      
       ▲“두 분은 시대를 나눠 중국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었다. 아마도 한 번에 하기 벅차서 서로 나눠 하신 것으로 생각한다.”(2003년 7월9일 중국 淸華(청화)대학 연설 중 존경하는 중국지도자에 관한 질문에서 모택동과 등소평을 꼽으며 한 발언)
      
       ▲“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화이며 통일은 반드시 이뤄야 하지만 평화를 깨뜨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上同)
      
       ▲“통일이 남북한 국민 모두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면 북한 경제가 한국 경제 수준에 거의 가깝도록 성장한 뒤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上同)
      
       ▲“한국에서도 공산당이 허용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한 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2003년 6월10일 일본 방문 중)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이 다 양보할 수도 없고, 이러다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2003년 5월21일. 한총련의 광주 5·18묘지 시위사태 등 사회각층의 기강문란을 빗대)
      
       ▲“53년 전 미국이 우리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북한 중심 공화국의)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2003년 5월12일)
      
       ※ 노무현氏는 2002년 9월 대통령후보 시절 “反美(반미)주의면 또 어떠냐”고 말했다. 훗날 노무현氏는 “2003년 5월 했던 ‘정치범수용소 발언’을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주변에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9월24일 오마이뉴스는 정부의 핵심고위관계자가 이 같은 말을 전했으며, 청와대의 前·現職(전·현직) 고위 관계자들로부터도 사실임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反美(반미)에서 親美(친미), 다시 反美(반미)로 번복되는 모순된 언동이었다.
      
       ▲“농부는 김매기 때가 되면 밭에서 잡초를 뽑아낸다. 농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선량한 곡식에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라는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사리사욕과 집단이기주의에 빠지는 일부 정치인, 개혁하라는 대다수 국민들의 뜻은 무시하고 개혁의 발목을 잡고 나라의 앞날을 막으려는 일부 정치인, 전쟁이야 나든 말든 안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일부 정치인...”(2003년 5월7일 이메일)
      
       ▲“한겨레 21에 올라와 있는 한총련 회장 편지를 읽어봤다. 일부 보도나 사회 일각에서 말하듯이 그렇게 단순히 어떤 사상에 경도돼 우리 사회에 철없는 공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편지 속에서 확인했다.” (2003년 5월1일 100분토론)
      

  •    ▲“그 과정에서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불행한 역사를 겪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희망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2003년 4월13일 ‘임시정부수립 84주년 기념식’)
      
       ▲“내년 총선에서 특정정당이 특정지역에서 3분의2 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하면,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에게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다”(2003년 4월2일 국정연설)
      
       ※ 노무현氏는 정치적 수세에 몰리면 ‘공직 사퇴’를 공언하는 좌절-혼란-퇴행의 악순환을 반복해왔다. 그는 대통령직 취임 이후 “대통령 못 해 먹겠다” 등 ‘자리걸기 식’발언을 14차례 한 것은 물론 대통령 후보, 국회의원 시절에도 사퇴와 철회를 반복해왔다. 
       
       ▲“한총련을 언제까지 이적단체로 규정해 수배할 것인지 답답하다.”(2003년 3월17일)
      
       ▲“너무 지나치게 나가지 말 것(not to go too far)을 촉구한다.”(2003년 3월2일 동해 공해 상에서 북한 전투기가 미군 정찰기를 20여 분간 위협한 사건 관련, 3월4일 더 타임스 인터뷰)
      
       ▲“참여정부의 출범으로 아픔의 근현대사는 막을 내리게 됐다. 지난날은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좌절과 굴절을 겪어야 했다.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역사적 전환점이 마련됐다.”(2003년 3월1일 3·1절 기념식)
      
       ▲“일부 언론을 보라. 무슨 족벌체제, 기득권체제, 고스란히 갖고 앉아서 자기들이 무슨 변화의 기수인 척하고, 그러면서 실제로 변화와 개혁에 대해 사사건건 발목잡고” (2003년 2월 23일 오마이뉴스 인터뷰)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되어야 한다.”(200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
      
       ▲“제재를 가하거나 심지어 무력사용에 관한 논의를 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2003년 1월 30일 NHK회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제재를 이행해야 한다는 요구를 지지하는지’ 묻는 질문에)
      
       ▲“미국과 갈등이 있더라도 (미국의) 북한 공격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다.”(2003년 1월 18일 KBS회견)
      
       ▲“미국이 북한에 대해 국지적으로라도 무력공격을 하게 될 경우, 북한이 남한에 보복공격을 할 수 있고, 우리 군이 대응하면 전면전의 우려가 있다. (평화적 대응 외에는)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다.”(2002년 12월31일 기자간담회)
      
       ▲“햇볕정책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 햇볕정책은 실패하지 않았다.” (2002년 12월24일 르 몽드 회견)
      
       ▲“당선 후 1년 이내에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 국민투표로 최종 결정하겠다.”(2002년 12월 14일, 취임 前 TV연설)
      
       ▲“(대통령 후보) 재신임을 받겠다는 약속은 변함이 없다”(2002년 6월12일 기자간담회)
      
       ▲“6·13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대통령 후보 재신임을 받겠다.”(2002년 6월10일 비서실 회의)
      
       ※ 6·13지방선거가 영남권 광역단체장은 물론 全지역에서 민주당 대패로 귀결됐다. 盧대통령은 6월17일 “8·8 국회의원 재·보선 후 대통령 후보 국민 경선을 재실시할 용의가 있다. 재·보선 후 누구든지 입당시켜 원점에서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대통령 후보 국민 경선을 다시 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再(재)신임’을‘모든 기득권을 버린 再(재)경선’으로 표현 강도를 높이며 8·8 재·보선 이후로 쟁점을 빗겨간 것이다. 노무현氏는 이후 8·8 재·보선 역시 민주당이 대패했음에도(한나라당이 13개 지역 중 11곳에서 승리함) 국민경선을 다시 실시하지는 않았다.
      

  •    <以下 1994년 노무현著 ‘여보, 나 좀 도와줘’ 中>
      
       “국민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의 대부분은 가난과 열등감, 그로 인한 반항적 태도,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자존심과 우월감도 그에 못지않게 강했다. 우월감과 반항심이 가끔 엉뚱한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다들 보자기에 책을 싸 들고 다니거나 퍼런 돗베로 만든 가방을 들고 다녔다. 가끔 고무에 헝겊을 댄 가방도 있었는데 읍내의 부잣집 아이들이나 간혹 가지고 다니는 고급 가방이었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당번이 되어 친구와 둘이서 교실을 지키다가 그렇게 생긴 새 가방 하나를 발견했다. 둘이서 가방을 뒤적여 보다가 그만 면도칼로 가방을 죽 찢어 버렸다. 무슨 심술이었는지 모르겠다. 체육시간이 끝나자 교실은 곧 발칵 뒤집혔다. 담임선생님은 몽둥이를 들고 범인을 찾으려 했지만 나는 끝내 자백을 않고 버텨 넘어갔다. 그 일을 생각하면 본래 내가 모범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일 말고도 거짓말을 했거나 훔친 일이 몇 번 더 있었기 때문이다.···
      
       나만 가난했던 것도 아닌데도 어린 시절의 나는 유독 가난을 심각하게 여기며 자라났다. 그리고 그 상처는 나의 잠재의식 속에 어떻게 해서라도 나만은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열망과 함께 모두가 가난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막연한 꿈이 동시에 심어졌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상반된 이 두 가지 생각이야말로 지금까지 지칠 줄 모르며 나의 삶을 오늘날까지 몰고 온 내 마음 속의 풍차였는지도 모르지만(1994년 출판 ‘여보, 나 좀 도와줘’ 169~172)”
      
       “나는 우격다짐을 해서라도 기를 꺾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눈을 부라리기도 했고 고함 치기도 했다. 그러니 작은 말다툼도 걸핏하면 싸움으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나는 별 생각을 다 했다. ‘아 속았구나’ 싶기도 했고 나도 잘못하다가는 큰형님처럼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견딜 수 없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나는 급기야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남편이 되고 말았다.···나는 아내가 조금이라도 불평을 하면 소리를 질러 대었고 그 말에 심하게 반발을 하면 다시 손을 올려붙였던 것이다. 정말 기억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1994년 출판 ‘여보, 나 좀 도와줘’ 124~126)
      
       “어느 날 갓 결혼한 친구들과 함께 소주병을 들고 수유리 뒷산에 올라갔던 일이 있었다. 친구들 중 하나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어떻게 盧형은 형수님을 그렇게 꽉 잡고 삽니까? 비결이 뭡니까?” 나는 그 자리에서 무슨 인생의 대선배나 되는 듯이 대답해 주었다. “조져야 돼, 밥상 좀 들어 달라고 하면 밥상 엎어 버리고, 이불 개라고 하면 물 젖은 발로 이불을 질겅질겅 밟아 버리는 거야. 그렇게 해야 꽉 잡고 살 수 있는 거야.” 물론 농담이었지만 전혀 거짓말도 아니었다.”(1994년 출판 ‘여보, 나 좀 도와줘’ 124~126)
      
       “부산에서 운동권 청년들이 만든 공해문제연구소에 내 사무실의 일부를 내주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청년들과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어느 날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중에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나는 대뜸 이렇게 농담을 했다. “그래도 남자한테는 여자가 서너 명은 항상 있어야지. 한 명은 가정용. 또 한 명은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뺑뺑이용, 그리고 또 한 명은 인생과 예술을 논하는 오솔길용, 이 정도는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순간 청년들의 얼굴색이 갑자기 변해 버렸다. “아니 변호사님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청년들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참 난처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다. 여학생이 화내고 덤비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남학생이 펄쩍 뛰는 것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여보, 나 좀 도와줘’ 126~127)
      
       ※ 노무현氏는 이 같은 술회 이후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여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아내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달라졌다. ‘사회운동’은 나의 다른 모든 생각과 행동들을 바꿔놓은 것처럼 여성에 대한 사고방식도 바꾸어 놓았다. 사실 나는 이 말을 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은 것”이라고 적고 있다.
      
      <2011년 11월8일자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