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임시정부 만들고 독립·반공 투쟁 앞장서…3대 대선 유세 중 급서5일 오전 11시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수유리 묘전에서 추모식 열어
  •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임시정부 요직을 역임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해공 신익희 선생 56주기 추모식’이 5일 오전 11시 서울 수유리 묘역에서 해공 신익희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남덕우) 주관으로 열린다고 4일 밝혔다.

    추모식에는 정양성 보훈처 차장, 김유길 광복회 부회장, 목요상 대한민국헌정회장, 유지수 국민대총장, 학생 등 200여 명이 참석한다.

    행사는 ‘해공 신익희 선생 기념사업회’ 남덕우 회장의 개식사, 신상식 이사의 약력보고, 국가보훈처 차장․광복회장․헌정회장․국민대 총장의 추모사, 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된다.

  • ▲ 해공 신익희 선생의 초상. 해공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반공반탁주의자, 원칙주의자였다. 또한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오랜 동지이기도 했다.
    ▲ 해공 신익희 선생의 초상. 해공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반공반탁주의자, 원칙주의자였다. 또한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오랜 동지이기도 했다.

    해공 신익희 선생은 1892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나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1913년 귀국해 고향에 동명강습소(東明講習所)를 열었고,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교수가 됐다.

    신익희 선생은 1919년 3․1운동 당시 해외 연락업무를 맡았다가 그 해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설립에 간여했다. 선생은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법무차장, 내무․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외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을 벌였다.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 초대학장을 겸했고, 1947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의장, 1948년 제헌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1949년에는 민주국민당을 결성해 위원장에 취임했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신익희 선생은 제헌국회 부의장 시절 국회에서 ‘반민특위’ 법이 통과될 때 “민족의 정의와 역사의 정의를 위해서는 반민족 행위자를 과감히 처단해야 옳으나 민족의 대동단결과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경미한 죄과가 있는 자는 건국전선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역설해 좌파 진영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1955년에는 민주국민당을 민주당(民主黨)으로 확대․발전시켜 대표 최고위원에 취임했다.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선에 출마했으나 유세 중 기차 내에서 서거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