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상상 못한 한마디..천대받던 과학기술자들 영웅 되다 "이것이 혁명"
  • 과학대통령 박정희(朴正熙)가 그리운 이유 
      
    기자와 정치인이 과학에 무지(無知)하니 나라가 시끄럽다. 

    趙甲濟   
     
     돌연변이로 생긴, 전염성이 전혀 없는 미국의 광우병 소에 대하여 미국도, 유럽국가도, 일본도 조용한 데 한국은 과학에 무지(無知)한 기자들과 정치인들 때문에 지진이라도 난듯이 시끄럽다. '화성과 지구가 곧 충돌한다'는 사기에 속아넘어가 자살자가 속출하는 후진국의 모습이다.

    박정희 정부 시절 있었던 '과학의 생활화' '생활의 과학화' 운동이라도 다시 해야 하나? 조지 오웰은 '1 더하기 1은 2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는 걱정할 것 없다'고 했는데 한국은 그런 과학적 진리조차 통하지 않는다. 고학력자들일수록 천안함 폭침은 북한소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니, 선동에 잘 넘어가는 이런 '배운 무식자들'을 안고 선진화(先進化)를 향하여 달려가야 하는 대한민국의 어린민주주의가 참으로 안쓰럽다.
     
     과학은 신성함도 성역(聖域)도 인정하지 않는. 과학은 미신과 선동과 위선을 우습게 만들 힘을 갖고 있다. 인간을 신성시하는 우상숭배나 성역(聖域), 즉 특권지대가 있는 독재사회, 선동이 먹히는 대중사회는 과학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박정희는 통일에 대한 감상적 접근을 경계하면서, '통일은 과학이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1970년대 초 과잉생산으로 시멘트가 남아 돌았다. 업계(業界)의 호소를 들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내무장관에게 남은 시멘트와 철근을 인수, 농촌 마을에 나눠주도록 지시하였다. 1년 뒤 그 시멘트가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조사하고 보고하는 회의가 열렸다. 

      어떤 마을은 전(全)주민들이 나눠 가지고 말았다. 어떤 마을은 주민들의 숙원(宿願) 사업이던 다리를 놓고 우물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이런 저런 보고를 다 들은 박(朴) 대통령은 딱 한 마디 논평을 하였다.
     
      "앞으로 잘 하는 마을만 지원하라. 못하는 마을은 자조심(自助心)이 생길 때까지 지원하지 말라."

      이 말이 새마을 운동의 성공을 가져온 지침이 되었다. 잘하는 마을만 지원하니 못하는 마을은 더 분발하였다. 전국의 3만 이상 마을들이 경쟁체제에 돌입한 것이다. 인간의 심성을 과학적으로 파악한 박정희의 성공이었다.
     
      군정(軍政)시절이던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이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보고하였다. 다 듣고 나서 박(朴) 의장이 질문하였다.
     
      "그런데 기술분야에는 별로 어려운 문제가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는 마당에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기술수준과 기술자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대한 어떤 대책이 서 있는지요? 이 점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제적 측면만 고려하였던 관료들은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고 한다.
      송정범 차관은 "기술수급계획은 별도로 작성하여 보고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국가적 차원에서의 과학기술 개발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과학자나 경제관료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점을 지적한 박정희(朴正熙)의 말 한 마디는 그가 평소에 지녔던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2010년 10월26일 국립묘지에서 거행된 고(故)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31주기 추도식에서 박원훈 전 KIST 원장은 추도사에서 朴 대통령이 정치력 없는 과학자들을 감싸고 밀어준 이야기를 회고하였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첫째 정부의 적극적이며 일관된 과학기술정책, 둘째 기업의 부단한 기술개발 노력, 셋째 과학기술자들의 시대적 사명감의 세 가지 요소에 기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기술정책의 일관성 및 영도력, 그리고 과학기술자들의 사기는 저하되고 있습니다. 아직 갈 길은 먼데 안타까운 일이며 그래서 오늘 과학 대통령님을 추모하는 감회가 더욱 깊어집니다. 연구개발밖에 모르는 과학기술자에게서 정치력을 기대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통치자가 보완해 주어야 합니다.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은 이를 아시고 과학 기술자들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대통령님의 과학기술 사랑은 큰 영애이신 박근혜 의원을 전자공학도로 진학케까지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학 대통령님의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朴 대통령은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한국의 과학기술을 국가적으로 발전시켰으며, 과학 기술자들을 정치적으로 엄호해주었다. KIST 출신 과학자들은 이 은혜를 잊지 못하여 연우회(硏友會)를 중심으로 ‘박정희 과학기술기념관' 건립에 나서고 있다.
     
      1970년대에 과학기술처 기획실장으로서 국가 과학 기술 정책 수립과 시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전상근(全相根) 회장(LC종합건설)이 1982년에 쓴 <한국의 과학기술정책-한 정책입안자의 증언(證言)>(正宇社)은 이 방면의 중요한 자료이다. 이 책은 과학기술의 불모지(不毛地)에서 정책입안자들이 어떻게 하여 오늘의 과학기술 대국(大國)을 건설하였는지를 알게 한다. 특히 경제개발계획과 과학기술진흥 계획이 어떻게 결합되었는지, 朴正熙 대통령의 관심과 격려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애국적인 관료들이 어떤 고심을 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군인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감수성이 좋아서 적극적으로 과학기술진흥 정책을 뒷받침하였다는 증언(證言)은 새롭다.
      이 책 가운데 국가적 과학기술 정책이 태동하는 순간에 대한 증언을 저자(著者)의 허락을 받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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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밖의 질문
     
      1962년 1월 초, 신정(新正) 연휴가 막 끝난 첫 주의 어느날 아침이었다. 하얗게 겨울 햇살을 받은 서울 세종로 1번지 중앙청 석조전은 유난히도 쌀쌀했다.
      석조전 서쪽에 자리한 옛 부흥부(復興部) 청사는 이날따라 이른 아침부터 삼엄한 경비가 펼쳐져 겨울 날씨와 함께 분위기는 더욱 차고 무거웠다. 바로 그 건물 2층 경제기획원 회의실은 벌써부터 기라성같은 장성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이들은 6개월 전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주체세력들과 군사정부의 군인(軍人)장관들이었다.
     
      이윽고 뭇 별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제히 일어나 차렷자세를 취했다. 나지막한 체구에 카키색 잠바를 입고 큼직한 검은 안경을 쓴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회의실로 들어온 것이다. 모두가 자리에 앉은 뒤 민간인의 김유택(金裕澤) 경제기획원 장관이 앞에 나와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1962년도 경제기획원 업무보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리하여 그해 국가 최고 통치자의 연두순시(年頭巡視)의 막은 올려졌다. 경제기획원의 이날 보고는 바로 1월1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포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 계획의 내용을 브리핑한 사람은 한국은행에서 임시로 차출되어 온 안종직(安鍾稷) 종합계획국장이었다.
     
      박정희 의장 앞에 나온 그는 높은 톤의 목소리로 더듬거리면서 앞으로 5년 간의 경제성장 목표부터 시작하여 투자계획과 내외자 동원계획에 이르기까지 차분히 설명해 나갔다. 장내(場內)의 무거운 분위기 탓일까, 그의 이마에는 차츰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를 쳐다보고 있던 김유택 장관의 얼굴도 굳어졌다. 그러나 안(安)국장은 끝까지 자제력을 잃지 않고 장장 1시간의 브리핑을 마무리지었다.
      기침소리 하나 없는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김(金)장관은 불안한 표정으로 朴의장의 얼굴을 힐끔 보면서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朴의장은 아무 소리도 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숙이 빨아들였다. 한참 뒤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기술분야에는 별로 어려운 문제가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는 마당에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기술수준과 기술자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대한 어떤 대책이 서 있는지요? 이 점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음성은 낮고 말투는 아주 정중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뜻밖의 질문이었다. 金장관은 물론 이 계획 수립에 참여했던 주역(主役)들의 표정에는 당황한 빛이 흘렀다. 사실 이 계획을 수립한 사람들은 당시 경제기획원의 직업공무원들과 엘리트로 자타(自他)가 공인하던 한국은행 조사부 출신의 경제전문가들, 그리고 대학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이었다. 이들의 생각은 <기술>이라는 것은 노동력의 일부분이라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기 때문에, 기술요인(技術要因)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 이 계획의 대상으로 포함시키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전문가들 중에서 이같은 최고통치자의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의장에는 또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때 자리에서 불쑥 일어난 사람이 있었다. 송정범(宋正範) 차관이었다.
      「각하, <기술수급>(技術需給)에 대해서는 계획을 별도로 수립하여 차후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朴의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송(宋)차관은 성미가 급하지만 판단력이나 결단력이 뛰어난, 유능하고 노련한 행정가로 알려진 분이었다. 이때 宋차관이 말한 <기술수급>이라는 용어는 몰론 그가 임기응변으로 창작한 새로운 용어였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宋차관의 기지에 찬 답변으로 경제기획원은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겼다.
        
      기술수급과 송(宋)차관의 지시
        
      브리핑을 무사히 마친 참석자들은 긴 숨을 내쉬면서 회의실을 나왔다. 나도 아래층에 자리한 기술관리과장실로 돌아왔다. 궁금해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직원들이 몰려왔다.
      「과장님, 브리핑은 잘 치렀습니까?」
      나는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들에게 다시 설명해주었다. 직원들도 박의장의 뜻밖의 질문에 대해 모두 감탄하고 있었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宋차관의 비서였다.
      「전(全)과장님, 차관님께서 곧 뵙자고 하십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나는 옷매무시를 고치면서 차관실로 들어갔다. 宋차관은 방금 치른 회의실에서의 아슬아슬한 경험으로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아, 표정이나 말소리가 상기되어 있었다.
      「全과장, 오늘 의장 각하께 말씀드렸던 그 기술수급 계획을 곧 만들어 주어야 하겠소.」
      나는 宋차관의 지시에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두려운 생각도 났다.
      <…기술수급이란 처음 듣는 말인데, 그 계획을 세우라고 하니 어떻게 한담?>
      「차관님, 그 <기술수급>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런 반문에 宋차관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글세, 그게 무엇일까?」
      이때 宋차관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그는 머리의 회전속도가 남달리 빠른 분이었다.
      「全과장, 그 5개년 계획 있지. 그걸 보면 우리가 5개년 동안 새로 지을 공장들이 쭉 나와요. 말하자면 그 공장에 필요한 기술과 기술자들을 추정해서 수급계획을 세우면 되는 거야.」
     
      나는 이런 송차관의 설명을 듣고서도 구름잡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뿐이었다. 더구나 이 기술수급계획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부라면 우리가 맡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 생각되어 宋차관의 지시에 어안이 벙벙하였다. 당시 5개년 계획과 같은 장기계획을 수립하는 주무국(主務國)은 종합계획국이었기 때문이다. 직제로 보아도 기술관리과가 맡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차관님, 이 일은 저희들 과의 업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宋차관에게 기술관리과가 하고 있는 일들을 새삼스레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기술관리과는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시절의 기술관리실이 하던 일을 그대로 이어받아 주로 외국원조사업에 의한 해외 기술훈련 파견업무를 맡고 있었다. 해마다 정부의 관계부처에서 선발·추천하는 1000명 안팎의 해외파견 기술훈련생의 파견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관련되는 외국원조기관들과의 연락업무가 대종(大宗)을 이루어 당시 기술관리과의 직원 10명으로서는 업무량도 벅찼다. 사실은 기술관리과는 이름과는 걸맞지 않는 일들을 하고 있었다. 주로 해외파견 기술연수생의 여권수속이나 해주는 곳이었다.
     
      나는 宋차관에게 이런 설명을 한 뒤 그의 지시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뜻을 비쳤다. 宋차관의 얼굴빛이 별안간 달라졌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全과장, 하라는 대로 해요! 기술관리과에서 할 만한 일이기 때문에 일부러 지시하는 것 아니겠소. 당신네 科는 과장(科長)을 비롯해서 직원이 거의 모두가 기술계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그래서 기술에 관한 계획인만큼 그 科에서 하는 것이 가장 적격(適格)이라는 생각이오.」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지시가 못마땅했으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응낙하고 그 방을 나왔다.
     
      기술수급 대신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을
     
      宋차관실에서 물러나온 뒤 나는 별안간 깎아지른 절벽과 마주치듯 중압감에 휩싸였다.
      <…전례도 없는 주제(主題)의 계획을, 더욱이 국가발전에 관련된 중요한 계획을 경험도 없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제 와서 맡은 일을 내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강제로 떠맡은 일이라고 해도 일단 맡은 이상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기 시작했다.
      나는 宋차관이 비친대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서부터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그 속에는 내가 바라던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宋차관의 말대로 그 계획서에서 어떤 공장을 몇 개 짓는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찾으려고 했으나 산업별로 5개년간 달성해야 할 생산목표와 그 투자계획만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런 기본계획의 숫자를 바탕으로 내 멋대로 공장을 몇 개 짓는다고 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사 이런 추정을 근거로 기술수요 계획을 수립한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가치가 없는 계획이 될 뿐이었다.
      나는 이 문제를 놓고 며칠 동안 입맛을 잃고 밤잠을 설쳤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한가지 대안이 머리에 떠올랐다.
      <…송차관이 지시한 기술수급 계획은 일단 젖혀두고 그보다 넓고 높은 차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 전반에 걸친 어떤 계획을 수립해보는 것이 어떨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뒷받침하는 한편 경제분야 외의 다른 모든 부분까지 포함하는 종합적인 과학기술 진흥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구상을 전개하면서 다시 불안해졌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계획의 범위와 수립방법은 어떻게 해야 할까? 혹시 외국의 사례가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곧 주한 미국원조기관인 유솜(USOM, United State Operations Mission)의 기술훈련과장인 윌리엄 윔즈 박사(Dr. William Weems)를 찾았다. 기술협력 관계로 전부터 안면이 있는 그는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파시킨 초창기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한국 태생이며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지내다 한국에 와서 근무하고 있었다.
      「윔즈 박사, 혹시 선진외국의 장기 과학기술 개발계획에 관한 자료가 있으면 주실 수 없을까요?」
      「미스터 전, 유감스럽게도 나라의 선후진(先後進)을 막론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과학기술의 장기 종합계획을 세워 개발하는 나라는 아직도 없는 실정입니다.」
      많은 기대를 걸었던 나는 그의 말에 적이 실망했으나, 그는 미국의 연구개발 활동에 관한 자료를 일부 건네주었다.
     
      「미스터 전, 필요하시다면 일본의 과학기술관계 자료는 구해드릴 수 있을 겁니다. 또 다른 기술자료도 힘 자라는 데까지 구해드리지요.」
      사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정식으로 국교(國交)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자료를 구하기 어렵던 때여서 그의 친절은 무척 고마웠다.
      며칠 후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宋차관실을 노크했다.
      「차관님, 일전에 하명하신 기술수급 계획은 그동안 계획 구상을 위해 많이 연구해 봤습니다마는 도저히 수립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꿔 과학기술 진흥계획을 세워보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동안의 구상을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굳어졌던 宋차관의 얼굴이 점점 풀리면서 이따금 고개까지 끄덕였다. 설명이 모두 끝난 뒤 그의 표정은 완전히 나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 같아 보였다.
      「全과장, 좋아요. 그렇게 한번 해보도록 해요. 그러나 한 가지 단서를 붙이겠소. 그 계획의 형태는 아무래도 좋으나 반드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보완하는 것이어야 해요.」
      「차관님 말씀은 명심하겠습니다.」
      앞을 가렸던 안개가 확 걷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宋차관은 또 다른 하나의 단서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全과장, 그 계획에서 과학이라는 용어는 되도록 빼도록 하시오. 과학이란 경제개발계획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순전히 학문적인 분야 같은데 그것은 빼야 하겠소.」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기술관리과 직원들은 송차관의 승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잘됐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송차관님 말씀대로 과학을 포함시키지 않으면 계획은 절름발이가 될 것인데 어떡허지?」
      나의 걱정에 대해 어느 사무관 한 사람이 묘안을 생각해냈다.
      「그 문제는 크게 걱정하실 것 없을 것 같습니다. 계획서의 표제는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이라고 붙여두고 계획 내용과 범위는 과학과 기술을 모두 다루면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宋차관이 단서로 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보완>이라는 뜻은 그대로 옮겨 <제1차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의 부제로 달기로 했다.
      이리하여 국가의 최고통치자가 던진 한 마디 질문을 계기로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과학기술진흥을 위한 장기 종합계획을 세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계획의 산실(産室)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종합계획 작성을 주도한 경제기획원 물동계획국(物動計劃局) 기술관리과는 宋차관이 지적한 것과 같이 대부분이 자연과학의 배경을 가진 공무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과장인 나는 미국 퍼듀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뒤 귀국하여 문경(聞慶)시멘트공장을 거쳐 충주(忠州)비료공장의 생산부장으로 근무하다 이곳에 왔고, 직원으로는 이응선(서울대 건축과 출신, 현 직업훈련관리공단 이사장), 조경목(趙庚穆, 서울공대 전기공학과 출신, 현 과학기술처 심의실장), 도정섭(都定燮, 서울공대 전기공학과 출신, 현 과학기술원 행정처장)씨 등 20대의 젊은 공학도 출신과 조남욱(趙南昱, 서울상대 경제과 출신)씨 등 행정가들이 일하고 있었다.
     
      별안간 큰 임무를 맡게 된 기술관리과의 유래를 찾자면 1961년 5·16혁명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혁명정부가 들어서자 박기석(朴基錫) 대령이 부흥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부흥부가 맡은 주요한 업무는 미국의 대한경제원조에 관한 일 외에도 이보다 앞서 민주당(民主黨) 정권이 착수했던 국토개발 업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육군 공병 출신인 박대령이 장관으로 임명된 배경은 부흥부의 기능이 건설에 관련되었기 때문이라고 풀이되었다.
     
      박장관의 임명과 때를 같이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월26일자로 부흥부의 이름을 건설부(建設部)로 바꿔버렸다(국가재건최고회의령 제14호).
     
      두 달 뒤인 1961년 7월22일, 건설부는 개편 강화되어 경제기획원(經濟企劃院)이 되었고 광범위한 기능을 갖게 되었다. 기획원은 첫째 경제개발 계획의 수립을 전담하는 종합계획국, 둘째 미국과 유엔의 원조업무를 전담하는 물동계획국, 셋째 오늘날의 새마을 사업과 비슷한 업무를 관장하는 지역사회국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 물동계획국은 종전의 부흥부가 관장하던 대외경제협력 업무를 다루는 경제협력과, 시설투자과, 물자수급과, 감사통계과 그리고 기술관리과 등 5개 과를 밑에 두었다.
      종전의 부흥부 시대에는 기술관리실(1959~1961)이라는 임시부서가 하나 있었다. 이 부서는 정부직제령에 따라 설치된 것이 아니라 부흥부령으로 만든 것이었다. 기술관리실이 다루는 업무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당시 미국원조기관인 미국대외원조처(ICA, 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USOM의 전신)의 기술원조 계획으로 우리나라 기술요원을 해외로 파견 훈련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ICA 전속 기술용역회사인 스미드 힌치맨 &그릴스 어소시에이션회사(Smith Hinchman &Grylls Association Inc.)가 제출하는 ICA원조사업에 관한 기술타당성 조사보고서를 검토하는 일이었다.
      기술관리실은 그 뒤 부흥부가 건설부로 바뀌면서 정식으로 기술관리과로 승격되었고, 다시 경제기획원으로 개편되자 자연과학을 전공한 기획원내 직원은 모두 이 과로 옮기게 되었다.
     
      계획은 무르익어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과우리나라 과학기술 개발의 기본계획을 수립한다는 벅찬 사명감에 20대에서 30대 초인 젊은 공무원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거의 모두가 자연과학의 배경을 가진 이들은 일찍이 나라의 부흥은 과학기술의 진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 나름대로의 사명의식에서 전공을 택한 터에, 이제 국가의 과학기술 진흥계획 수립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을 무척 행운으로 생각하고 젊은 정열을 모두 쏟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는 사명감이나 정열만으로 짜기에는 너무나 벅찬 과업이었다. 그것은 자칫 탁상공론에 흐르기 쉬웠다. 나는 우선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과학 기술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가주기를 바라고 있는가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국내 산업계, 학계와 기술계의 지도급 인사들의 의견은 이 계획 수립에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송차관을 찾아가 나의 이런 뜻을 설명하고 자문위원회 구성을 건의했다. 송차관은 선선히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과학기술계의 각 분야 대표 40명으로 구성된 <과학기술정책 자문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들 40여명의 위원 중에는 산업계를 대표한 정인욱(鄭寅旭, 강원산업 대표), 조홍제(趙洪濟, 효성물산 대표), 전택보(全澤珤, 천우사 대표)씨 등과 학계를 대표한 안동혁(安東赫, 한양대 교수) 金東一(김동일, 서울공대 교수), 현신규(玄信圭, 서울농대 교수)씨 등 그리고 국공립 연구기관의 책임자로 이채호(李采鎬, 국립중앙공업연구소장), 정남규(鄭南圭, 농촌진흥원장)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군사혁명정부는 당시 국가정책을 입안하거나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전문가들과 학자들을 되도록 많이 참여시키는 것이 하나의 특징으로 되어 있었다. <과학기술정책 자문위원회>도 그런 뜻에서 혁명정부의 방침에 부합되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한편 계획수립 책임자로서 나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첫째, 전통적으로 기술을 천시해오던 우리의 사회풍토와 환경에서 어떻게 하면 과학기술을 숭상하는 뿌리가 내리고, 이것을 가꾸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국민 모두가 지난날의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탈피하여 근대적인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고 스스로가 과학기술 진흥에 참여할 수 있는 태도의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정책적인 방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자원과 환경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을 선진공업국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방법은 물론, 그 수준에 이르는 기간을 어떻게 하면 가장 줄일 수 있을까 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나라 실정은 이 두 가지의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너무나 아득한 형편이었다. 우선 기술과 기능을 천시하는 경향은 우리나라 국민의 실생활뿐만 아니라 정부의 시책면에도 널리 번지고 있었다. 우리의 지식층은 기회 있을 때마다 반만년의 오랜 우리의 고유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과학기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아직도 미개발국가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가 유럽의 근대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기에는 불리한 거리에 있었다는 탓도 있었겠으나, 근대국가로서 발돋움할 중요한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에게 강점되어 과학기술이 도입될 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1945년 우리 민족은 8·15광복을 맞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으나 국토의 분단과 6·25동란이라는 민족적인 비극과 참화로 그동안 축적한 보잘 것 없던 과학기술이나마 모두 파괴되어 버렸다.
     
      1953년 여름 3년여를 끌던 민족의 비극 한국동란은 끝났다. 그러나 정부나 민간을 막론하고 전화(戰禍)를 복구하고 당장에 어려운 민생고를 해결하는 데 정신이 쏠려 과학기술의 종합적인 개발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60년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10여년간 장기집권을 누려오던 자유당 정권은 그동안 누적된 적폐와 부정선거로 4·19학생의거를 불러 일으켰고 그 결과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10년 야당으로 통치기술이 미숙한 민주당 정부는 고삐가 풀린 자유의 분망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고, 경제는 마비되어 민생고는 극도에 이르렀다. 이런 혼란이 막바지에 이른 무렵 5·16군사혁명으로 질서는 회복되었고 새 정권은 경제적인 자립을 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모든 힘을 이 계획을 추진하는 데 쏟게 된 것이다.
      공업국가를 지향하는 이 경제개발 계획이 시작될 무렵의 우리나라는 농업 위주의 대표적인 저개발국가였다. 2500만명의 남한 인구 중 67.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1인당 국민소득은 80달러 안팎에 연간 수출고는 4000만 달러 정도였다. 1961년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는 1차산업 40.3%, 2차산업 20.6%, 3차산업 39.1%였으며 경제성장률은 2.8%, 인구증가율은 2.9%였다.
      그 당시 공업의 주축을 이룬 것은 경공업이었고 섬유공업은 대표적인 업종이었다. 화학공업은 외국원조로 건설된 충주비료공장과 나주(羅州)비료공장이 8만톤의 비료를 생산하고 있었다. 이밖에 연간 약 70만톤의 시멘트가 생산되고 있었다. 또 이무렵 전력생산은 시설용량 37만KW였고 경성전력(京城電力), 중선전력(中鮮電力) 그리고 남선전력(南鮮電力) 등 3개 회사가 통합해서 한국전력주식회사(韓國電力株式會社)로 막 발족하고 있었다.
     
      바꿔 말해서 이 무렵의 우리나라 경제는 60만 국군의 유지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외국원조에만 기댈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었다. 따라서 이 시절의 우리나라 과학기술은 기반조차 갖추지 못한 낮은 수준에 있었다. 구체적인 그 개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산업활동에 있어서의 기간이 되는 기술은 거의 모두가 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둘째, 국제시장에서 경쟁할 만한 공업제품은 거의 없었다.
      셋째, 기술행정을 효율적으로 시행할 종합적인 행정체제가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넷째, 국공립 과학기술 연구기관은 활동이 부진했고, 사립연구소는 거의 없었으며 과학기술을 선양하고 보급하는 활동을 활발히 벌이는 기관은 없었다.
      다섯째, 기초적인 과학기술의 연구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창의적이고 주동적인 발전성이 결핍되어 있었다.
      여섯째, 교육연구 및 생산분야에서 활동해야 할 우수한 과학기술자를 보충할 인재양성면의 태세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일곱째, 기술자, 기술공 및 기능공의 구성이 심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예컨대 기술자(engineer), 기술공(technician) 및 기능공(craftsman)의 이상적인 구성비율은 1:5:25이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1:1.3:33이었다.
      여덟째, 일반국민의 과학기술에 관한 지식과 교양수준이 아주 낮았고 기업가의 기술혁신으로 경영합리화를 시도하려는 의욕이 부진했으며 과학기술 활동을 본격적으로 펴나갈 만한 기반이 빈약했다.
      아홉째, 과학기술 진흥을 목표로 하는 종합적이고 중점적인 시책이 없었다.
     
      기본방향의 틀을 세워
     
      우리는 이런 현황을 면밀히 검토하고 앞서 설치된 과학기술정책자문위원회의 위원들은 물론 그밖의 과학기술계, 학계 그리고 산업계의 전문가들과 빈번한 접촉을 가지면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나아갈 길을 꾸준히 모색했다. 과학기술정책 자문위원회 위원들은 여러 차례 소집된 위원회 모임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참석하는 열의를 보여 주었고 회의는 진지하고 건설적인 토의로 시종했다. 이리하여 이 위원회는 마침내 우리나라와 같은 저개발국가 과학기술을 짧은 시일 내에 획기적으로 진흥하고 개발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데 모두 뜻을 같이 했다.
     
      첫째, 과학기술의 진흥개발은 국가사업으로 책정하고 정부의 예산 및 행정지원으로 강력히 밀고 나가야 한다.
      둘째, 정치권력의 최고책임자(최고회의 의장)가 몸소 앞장서서 과학기술 개발에 대해 관심을 보여줌으로써 이 사업이 혁명정부의 최우선사업(最優先事業)이라는 것을 국민과 공무원들에게 강력하게 시현(示現)해야 한다.
      이같은 위원회의 건설적인 건의는 우리 실무자들이 과학기술 개발의 기본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정신적으로나 실무적으로나 모두 큰 보탬이 되었다.
      4개월 남짓한 산고(産苦) 끝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의 기본방향을 설정하게 되었다.
      첫째, 인력(人力)을 우리의 가장 큰 가용자원(可用資源)으로 보고 과학자, 기술자, 기능자 등 과학기술계 인력개발을 우리나라 과학기술 진흥의 주축사업으로 한다. 입안 중인 제1차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그밖의 사회의 다른 부문에서도 필요한 인력까지 통틀어 그 수요를 전망하고 이를 공급할 구체적인 방안과 양성계획을 수립하여, 이것을 문교부의 과학 및 실업교육과 산업계의 직업훈련 계획에 강력히 적용되도록 한다.
      둘째, 산업기술의 개발은 국내의 미약한 과학기술 연구능력에만 기대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나아가서, 이미 선진외국에서 개발하여 실용화되고 있는 최신의 선진기술을 과감하게 도입하는 한편 도입기술을 소화개량하고 기술이식(技術移植)에 대한 노력도 적극적으로 편다.
      셋째, 종래에 지극히 비능률적으로 운영해 오던 국공립 연구기관을 근본적으로 개편 강화하고 나아가서 국내외에 산재되어 있는 우리의 과학두뇌(科學頭腦)를 유치하고 조직화하여 연구활동 중심의 과학집단(科學集團, Scientific Community)을 형성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저력을 배양하는 한편 기술도입의 소화와 기술이식의 매개체 구실을 맡도록 한다.
      넷째, 우리 사회에서 과학기술이 건전하고 지속적으로 진흥 육성되게 확고한 과학기술기반(科學技術基盤)을 구축한다. 이 기반(Infrastructure)을 구축할 목적으로 ①과학기술 진흥계획을 국가의 장기개발사업으로 책정하되 정부의 투자자원배분(投資資源配分)과 행정지원면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부로서 또는 같은 수준으로 그 우선순위를 인정하고 ②과학기술 진흥계획 수립과 이에 필요한 행정을 전담하게 하는 정부조직상의 과학기술 행정기구를 설치하고 ③과학기술 진흥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기술 진흥에 필요한 여러 법령을 제정 실시한다.
      다섯째,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 인식과 이해를 드높이고 우리의 생활과 사고에 과학적인 풍토를 토착화(土着化)하기 위해 과학풍토 조성사업을 범국민운동화한다.
        
      돛은 오르고
     
      1962년 5월21일, 봄은 어느새 가버리고 산뜻한 초여름으로 접어들었다. 세종로 관청거리는 푸른 가로수로 뒤덮여 싱싱한 생기가 온누리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날 오랜 산고 끝에 낳은 <산물>을 소중하게 들고 중앙청 건너 자리한 국가재건최고회의 건물로 들어섰다. 뒤에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청사로 된 이 건물 8층 회의실에서는 그날 제39차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가 열렸다. 당시 최고회의는 국가의 입법권은 물론 정부의 모든 예산과 계획에 대한 심의권을 갖고 있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그동안 경제기획원이 입안한 제1차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을 다루게 되어 있었다.
      나는 내각수반 겸 기획원 장관이던 송요찬(宋堯讚) 장관 대리로 참석한 송정범 차관을 수행하여 기술진흥 계획의 입안자로서 이 회의에서 브리핑을 하게 된 것이다.

      회의실에 들어선 나는 기라성같은 장성들의 엄숙한 표정과 무거운 분위기에 금방 압도되어 버렸다. 두 어깨에 번쩍이는 별들을 단 최고위원(最高委員)들의 위엄당당한 모습에 비하면 민간인 옷차림의 한 서기관(書記官)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고 대조적이었다.
      마침내 별 셋을 단 육중한 체구의 이주일(李周一) 부의장은 사회봉을 들고 개회를 선언했다. 나는 새삼 마음을 가다듬고 회의장 앞으로 나가 이들에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나는 현대국가에 있어서의 과학기술의 역할과 그 중요성을 역설하는 일로 말문을 열고 인력개발, 산업기술 개발전략, 연구개발 등으로 이어지는 계획의 주요한 내용을 차분하고 요령있게 설명해나간 다음, 결론적으로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은 국가의 장기사업으로 인정해야 하며 이 계획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은 격으로 투자와 정부지원 등 모든 면에서 우대해줄 것을 힘주어 요청했다.
     
      브리핑 도중에 나는 여러 번 실수를 했다. 더듬거리거나 뛰어넘은 것이다. 그때마다 옆에서 宋차관이 보충설명을 해주어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회의에 나오기 전에 그렇게도 많은 예행연습을 했으나 막상 현장에 나오니 너무나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굳어버렸던 것이다.
     
      브리핑은 무사히 넘겼다. 그리고 이 브리핑에 대한 최고위원들의 반응은 뜻밖에도 너무나 좋았다. 위원들은 차례로 의견을 말하고 질문도 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훌륭한 계획>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 위원은 얼굴에 홍조를 띄면서 이렇게 말했다.
      「…5·16혁명의 목적은 바로 지금 소개된 기술개발 계획과 같은 국가계획을 만들어 국가의 발전을 이룩하자는 것입니다. 본인은 이 계획을 혁명정부의 최우선사업으로 설정하고 추진할 것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사회자인 李周一 부의장은 토의가 끝난 뒤 可否를 묻기 바쁘게 방망이를 내려쳤다. 만장일치로 이 계획은 통과된 것이다.
      나는 이 순간 온 몸이 저리는 듯한 커다란 감격의 물결 속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4개월 반 전의 기획원 연두순시 때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아른거렸다. 최고집권자의 뜻밖의 질문과 관심은 과학기술의 진흥을 국가적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터전을 마침내 구체화시켰던 것이다. 이로써 제1차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은 국가의 장기 개발계획 사업의 하나로 역사적인 출범을 하게 되었다.
      누를 길 없는 감격에 휩싸인 채 브리핑 차트를 접어들고 최고회의 문을 나선 나는 싱싱하고 푸른 가로수 위로 한없이 뻗은 맑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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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과학 대통령 그 자체셨습니다"
      -고(故)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31週忌(주기) 추도사
      박원훈(朴元勳) KIST연우회장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
      지난 9월8일에 <과학 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이라는 책의 출판 기념회가 바로 대통령님께서 건축을 시작하신 ‘과학기술회관’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책의 저자는 무려 16명으로써 과학기술처 초대 장관 김기형 박사를 비롯하여 대통령님께서 손수 돌보아 주셨던 KIST, KAIST, ADD, 과학기술진흥재단 등의 대표들이 한 마음으로 집필하였습니다. 이 책이야말로 과학 대통령님의 제31주기에 임하여 진정한 지도자를 추모하는 우리 모두의 추도사이기도 합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과 다름없었던 1960년대 초 ‘과학입국 기술 자립’이야말로 ‘조국근대화’의 선행조건이요, 또 필수요건이라는 대통령님의 선견적 기본철학과 비전, 이를 위한 헌신적인 추진력, 그리고 일관된 리더십을 기반으로 구축되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국가경쟁력은 2010년 현재 과학 경쟁력 4위, 기술 경쟁력 18위, 총체적 국가경쟁력 23위, 경제 규모 10위권의 선진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의 ‘민족중흥’ 노력과 함께 과학기술 발전의 기반을 구축해 주셨음에 우리 모두 감읍하고 있습니다.
     
      ‘빈곤퇴치’와 ‘자주’라는 정치적 신념하에 수출주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병행하여 과학기술 진흥 5개년 계획을 별도로 수립하고 ‘인적자원’의 결집 및 육성을 그 첫 번째로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966년 KIST의 설립은 ‘해외 두뇌’를 유치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렇게 형성된 두되 집단을 중심으로 산업기술 개발이 기획되고 산업진흥이 추진되었습니다.
     
      1967년에는 중앙정부조직으로서 과학기술처 설치, 1970년 자주국방을 위한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1971년 KAIST 설립을 통한 석·박사급 고급 두뇌의 양성, 1972년 산업기술진흥법 제정으로 민간 연구의 촉진, 1973년 대덕 연구단지 건설 착수와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한 전문연구소들의 설립, 1977년 기초연구진흥을 위한 한국과학재단 설립으로 이어지는 ‘先기술 後과학’의 국가발전 모델은 지금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벤치마킹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의 선지자적 과학기술정책의 추진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이미 과학 대통령님은 기술 대통령으로서 자동차 산업, 조선 산업, 전자 산업, 그리고 기계공업의 진흥법을 제정하였습니다. 이는 방위산업 육성과 연계된 중화학 공업 추진의 초석이었습니다.
     
      과학 대통령님이 마지막으로 수립하여 1977년부터 시작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중 과학기술부문 계획은 총 11개의 세부 주요정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기술용역의 육성, 두뇌산업의 육성과 장기적 대형 연구개발의 추진, 원자력 기술개발, 자원개발과 환경보전 및 기상업무의 강화, 정보산업의 육성이라는 5개 항목은 새로이 강조된 것으로서 오늘날 제철,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반도체 및 전자산업이 세계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의 국민 일인당 GDP 20,000달러라는 경제적 번영이 과학 대통령님의 은공임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민족적 자신감을 심어준 ‘새마을 운동’과 연계된 ‘생활의 과학화’는 1973년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이는 과학의 합리성이 투영된 ‘공정한 사회’건설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1967년에 설립하신 과학기술후원회는 과학기술진행재단으로 발전하였고 다시 이 기관은 오늘날에는 과학문화와 창의교육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 시민으로서의 소박함을 항상 지니시고 스스로 모범이 되셨던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의 생활철학을 우리 모두는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이 20,000달러 선을 넘어 30,000~40,000달러 선의 선도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계속 정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첫째 정부의 적극적이며 일관된 과학기술정책, 둘째 기업의 부단한 기술개발 노력, 셋째 과학기술자들의 시대적 사명감의 세 가지 요소에 기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기술정책의 일관성 및 영도력, 그리고 과학기술자들의 사기는 저하되고 있습니다. 아직 갈 길은 먼데 안타까운 일이며 그래서 오늘 과학 대통령님을 추모하는 감회가 더욱 깊어집니다. 연구개발밖에 모르는 과학기술자에게서 정치력을 기대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통치자가 보완해 주어야 합니다.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은 이를 아시고 과학 기술자들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대통령님의 과학기술 사랑은 큰 영애이신 박근혜 의원을 전자공학도로 진학케까지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학 대통령님의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과학 대통령님의 ‘과학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코자 합니다. 특히 KIST 연우회를 중심으로 ‘박정희 과학기술기념관’을 건립하여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의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과학기술진흥을 통한 경제성장의 모델’ 개발도상국가에 전수하여 경제성장을 지원함으로써 국가 간 빈부의 격차축소를 통해 세계 평화에 공헌코자 합니다. 이는 어쩌면 해외 원조의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은 한국만의 영도자가 아닙니다. 이미 세계 각국에서 ‘과학 대통령 박정희 리더십’을 극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학 대통령님의 리더십을 자랑하며 세계에 널리 알리겠습니다.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 우리 모두는 다시 한 번 가르침대로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사명감을 갖고 계속 정진하여 ‘조국의 最선진화’를 완수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과학 대통령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2010년 10월26일
      KIST연우회장 박원훈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