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을 대기업 그룹 회장 아들로 속여 결혼을 전제로 만난 여성으로부터 1억원을 가로챈 30대 남성의 수법은 그야말로 주도면밀했다.
    16일 서울 혜화경찰서에 따르면 강남구 역삼동의 월 회비만 수백만 원인 고급 피트니스 클럽에 다니던 A(32.여)씨는 올해 초 운동을 하다 귀가 번쩍 열릴 듯한 소리를 들었다.
    옆에서 운동하던 박모(37)씨가 전화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아버지 죄송해요. 요즘 그룹 사정도 안 좋은데…"라고 말하는 등 집안 배경이 대단한 듯한 분위기를 풍겼던 것.
    조심스레 사정을 묻자 박씨는 자신을 국내 K그룹 회장 아들로 소개했고, 이에 A씨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후배 김모(28.여)씨와 박씨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리고 1월 말 이 피트니스 클럽 앞 커피숍에서 김씨와 `소개팅'으로 만난 박씨의 프로 수준의 `작업'이 시작됐다.
    박씨는 "내가 그룹 회장 아들이지만 평범한 회사원으로 생각해 달라"며 김씨의 마음을 열고선 "다른 그룹 회장들과 형, 동생 하는 사이다"라는 등 자신을 내세우며 김씨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김씨의 눈에는 180cm 넘는 키에다 잘 생긴 외모에 강남의 고급 원룸에 거주하며 아우디, 벤츠 등의 고급 외제승용차를 바꿔 타는 박씨가 정말 재벌 회장 아들로 보였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의 관계는 빠르게 깊어지자 2월 초 박씨는 결혼하자며 김씨를 꾀어 성관계까지 가진 이후엔 범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요즘 회사가 시끄러운데 내가 담당하는 것이 금융부문으로 고급정보를 알고 있다. 5천만원 투자하면 1억을 벌게 해주겠으니 신부수업 삼아 투자해보라"고 김씨를 꾀어 돈을 받아 챙긴 것이다.
    김씨는 저축은행에서 신용대출로 받은 돈 8천만원을 비롯해 아예 자신의 신용카드를 줘 쓰도록 하는 등 10여일 만에 약 1억원을 박씨에게 마련해 줬다.
    박씨는 김씨가 지인들과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가짜신분이 노출될까봐 `이것도 신부수업의 일환'이라며 자신의 정체를 주변에 밝히지 말라고 다짐을 받는 등 범행과정에서 주도면밀했다.
    김씨에게 다정다감한 연인이었던 박씨는 거액을 챙기게 되자 태도가 돌변했다. `바쁘다' `조금 더 기다려 달라'는 핑계를 대며 김씨의 요청을 피하며 만남을 계속 미룬 것.
    김씨는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그가 자신을 속였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경찰에 신고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을 뿐이었다.
    경찰이 3월 초 박씨가 강남의 고급원룸에 거주하며 대기업 그룹 회장 아들 행세를 하고 다닌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사실을 확인하고자 김씨를 찾았을 때도 김씨는 `그럴 리 없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가 2008년 사기 등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가 지난해 가석방됐으며, 이를 포함해 이전에도 비슷한 수법의 범행을 저질러 11건의 사기 전과가 있다는 경찰의 전언을 좀체 믿지 못했다는 것.
    하지만 경찰의 잠복수사 끝에 검거된 박씨는 조사과정에서 범행 일체를 자백했고 결국 14일 사기 혐의로 구속수감됐다.
    경찰은 박씨가 김씨를 속이는 과정에서 쓴 돈도 가석방 이후 비슷한 수법의 다른 범죄를 저질러 마련한 것으로 보고 여죄를 캐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