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돈재 전 국정원 1차장, 당시 駐독일 공사 "통일하려면 국력 바탕으로 북한 민주화 이뤄야"
  • ▲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1차장.(염돈재 제공)ⓒ
    ▲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1차장.(염돈재 제공)ⓒ
    독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지 올해로 30주년이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장벽이 붕괴하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90년 10월3일 동과 서로 분단됐던 독일이 통일됐다.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은 독일이 통일되던 그 해 주독일 한국대사관 공사를 지냈다. 독일이 통일되는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그는 국내에 몇 안 되는 독일 통일 전문가로 통한다. 한국사회에 잘못 알려진 독일 통일 과정과 의미를 바로잡는 데 누구보다 많은 목소리를 냈다. 

    염 전 차장은 11일 본지와 인터뷰에서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개인적으로 큰 회한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독일은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베를린장벽 개방이 겹쳐 잠깐 열린 기회를 이용해 통일을 이루었지요. 그런데 우리는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화해·협력의 환상에 빠져 갈팡질팡하다 공산동맹 붕괴와 경제 파탄으로 위기에 처했던 북한이 위기에서 벗어나 핵 개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말았습니다."

    김대중·노무현, '화해·협력' 중시하다 北에 끌려다녀

    염 전 차장은 이런 역대 정부의 '실책'은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의 동방정책이 독일 통일의 원동력이 됐다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방정책은 1969년 집권한 사민당 빌리 브란트 정부가 발표한 것으로, 독일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제적으로 낙후한 동독과 교류·협력의 물꼬를 튼 점에서 김대중 정부에서 추진한 '햇볕정책'과도 닮았다. 

    "우리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독일 통일의 원동력이 됐다고만 생각하지, 초대 아데나워 총리 이후 기민당(CDU) 정부가 추진해온 '힘의 우위' 정책이 통일의 원동력이 됐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어요. 동방정책은 소련·동독과 화해·협력하고 동독의 안정을 도우면 언젠가는 동독 공산정권이 변해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정책이지만, 실제로는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추진된 '분단의 평화적 관리정책'이었습니다."

    염 전 차장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은 힘의 우위 바탕 위에서만 화해와 교류·협력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책이 없었던 반면,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화해·협력을 중시했기 때문에 북한의 의도대로 끌려갔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런 측면에서 보면 독일의 통일은 우리에게 재앙이었다고도 생각된다"고 안타까워 했다. 

    "박 전 대통령의 1970년 '8·15 선언' 이후 우리 정부의 모든 대북·통일정책은 독일 모델을 접목하려는 시도였어요. 특히 1970년대 초 북한보다 국력이 열세인 데다 항상 북한의 무력도발 위협에 직면하고 있던 상황에서는 동서독 간 평화공존 모델,  교류·협력 모델이 기적처럼 생각됐기 때문이지요." 
  • ▲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하루 앞두고 지난 8일 오후(현지시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시민 3만 명의 소원을 담은 '리본 하늘' 전시가 열리고 있다. 2019.11.12 ⓒ연합뉴스
    ▲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하루 앞두고 지난 8일 오후(현지시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시민 3만 명의 소원을 담은 '리본 하늘' 전시가 열리고 있다. 2019.11.12 ⓒ연합뉴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사실상 '분단 관리정책'

    염 전 차장은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을 큰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제부터 독일 통일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대북관계에서는 하루빨리 민족 공조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至論)이다. 

    "독일 통일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대북·통일정책은 이상주의나 민족적 감상주의에서 벗어나 현실적 관점, 특히 힘의 관계를 중시하는 바탕 위에서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브란트의 접근을 통한 변화정책이 얼핏 보면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정책으로 보이지만, 이 정책은 '냉전의 골이 깊어져 통일 가능성이 더 요원해지는데 독일 민족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없단 말인가' 하는 자성에서 출발한 정책으로, 현실에 바탕을 둔 정책이었습니다."

    지난 9월25일 독일연방 경제에너지부는 "2018년 기준 옛 동독지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옛 서독지역의 75%, 평균임금은 84%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실제로 많은 동독인이 자신을 '2등 시민'이라고 느낀다고 한다. 독일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통일 후유증을 겪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통일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염 전 차장에게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선언'과 대북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7월6일 독일 베를린의 쾨르버재단 초청 연설에서 '베를린구상'을 발표하며 서독의 동방정책 지지를 재확인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독일 통일은 상호 존중에 바탕을 둔 동방정책이 20여 년간 지속됐기 때문에 이뤄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문재인 '베를린선언', 남북관계에는 적용하기 어려워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선언은 화해·협력으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달성하겠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같은 기조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주의적 접근방식은 극도로 폐쇄적인 북한, 적대 수준이 높은 남북관계에서 적용하기는 어려운 정책이라 생각됩니다."

    염 전 차장은 독일 통일의 경험에 비추어 우리는 ①굳건한 안보와 힘의 우위가 평화와 통일의 기초라는 점 ②대한민국을 북한 주민의 동경의 대상으로 건설하는 것이 통일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는 점 ③북한 민주화 없이는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점 ④북한 주민은 지원 대상이지만 김정은 정권은 타도 대상이라는 점 ⑤호의와 관용만으로는 북한 정권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독일이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데나워 초대 총리 이후 콜 총리에 이르기까지 역대 서독 정치지도자들이 올바른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굴종정책이 우리 안보와 통일에 가장 큰 장애요인이 될 것입니다."

    염돈재 프로필

    ▲1943년 강원도 강릉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과 ▲서울대 행정학 박사 ▲중앙정보부 공채5기 수석합격, 수석졸업 ▲청와대 정책비서관 ▲주독일대사관 공사 ▲국가정보원 제1차장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민주평통자문위원 ▲통일정책자문위원 ▲한독통일자문위원회 위원 역임
  • ▲ 독일 베를린의 장벽 기념관에서 시민들이 장벽 붕괴 3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2019.11.09 ⓒ뉴시스
    ▲ 독일 베를린의 장벽 기념관에서 시민들이 장벽 붕괴 3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2019.11.09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