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48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는 모습. ⓒ역사박물관 홈페이지 화면캡쳐
    ▲ 1948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는 모습. ⓒ역사박물관 홈페이지 화면캡쳐

    [기고] ‘1948년 건국’ 말하면 모두 반역사적 반헌법적 친일?
     “얼빠진” 것은 바로 이런 주장들

    강규형 명지대 교수 현대사

    박근혜 대통령이 올해 8·15 경축사에서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한 대목, 즉 1948년 8월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점으로 잡은 발언에 대해 사회일각에서는 거센 반발을 했고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문재인 의원 등 야당에선 “반역사적·반헌법적 주장”이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얼빠진 주장”이라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미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건국 50주년을 기념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같은 맥락의 발언을 했기에 야당인사들의 공격은 자가당착에 빠지게 됐다. 그들 주장대로라면 두 대통령도 “반헌법적”이고 “얼빠진” 얘기를 한 것이다. 왜 그때는 가만있다가 자신들이 정권을 잃은 후에야 이런 극렬한 반발을 하는가.

    그리고 8월 22일 강만길, 이만열, 서중석 교수 등이 중심이 된 역사학계 일부가 “헌법에 명시된 임시정부의 법통성과 선열들의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민족반역자인 친일파를 건국의 주역으로 탈바꿈하려는 ‘역사세탁’이 바로 건국절 주장의 본질”이라는 성명서를 냈다.

    오지랖 넓게 사드배치 반대 등 온갖 사회이슈를 다 거론하는 것을 보면 이들이 정치인들인지 헷갈릴 정도다. 이 문건은 정치모리배들의 정치선동 찌라시에 가깝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논리비약과 근거 없는 매도는 학자들이 할 일이 아니다. 여기에 무작정 동조한 학회들은 무슨 낯으로 학회라는 이름을 쓸 수 있을 것인가?

    야권과 국사학계의 이런 주장들은 여러 번 반복된 뻔한 얘기라 사실 식상할 정도지만, 어쩌면 할 수 있는 얘기가 그것밖에 없고, 주장할 수 있는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안쓰럽기도 하다. 건국기점을 놓고 벌어지는 논쟁은 이런 것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에서 벌어져야한다.

    굳이 건국절이라 안 해도 되고, 건국 대신에 다른 용어를 사용해도 좋다, 그러나 독립을 했고 나라가 세워졌다는 의미에서 건국이란 용어를 기피할 이유도 없다. 역사교과서에는 고려건국·조선건국 등의 용어를 쓰면서 새로운 나라의 건립을 표현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고조선이나 대한제국이 아니기에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다고 얘기할 수 있다. 1919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대한민국이 ‘잉태’된 것이기에 큰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왕정복고가 아닌 민주공화정을 추구하고, 독립된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자는 이상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심어놓은 것이고, 대한민국 헌법이 명시하듯이 그 정신과 법통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이 수립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여러 지면을 통해 1919년을 ‘정신적 건국’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이 때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수립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제일 잘 인식한 것은 바로 임정인사들 자신들이었다. 1919년에 건국이 됐다면 이후 펼쳐진 독립운동의 존재와 의미는 무엇인가. 더욱이 새 민주국가의 건설, 즉 진정한 독립과 건국을 준비하기 위해 1941년 11월 임정에서 ‘건국강령’을 발표한 것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정치이념으로 독립과 새 나라의 건국을 위한 청사진(靑寫眞)을 밝힌 중요문건이다. 현재 야당과 일부 역사학계의 단순 논리에 따르면 임정과 건국강령조차 “반역사적이고 반헌법적인 얼빠진 소리”가 돼버린다.

    임시정부에서 명문화한 국민주권과 국가주권의 이상이 실현된 것이 대한민국의 탄생이라  해석하는 것이 온당하다.

    유엔 감시 하에 한반도 역사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자유선거이자 보통선거였던 1948년 5.10선거에서 국민주권이 구현됐고, 같은 해 12월 12일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을 승인함으로서 국가주권이 구현된 것이다.

    5.10선거를 통해 왕국 혹은 제국의 신민(臣民)으로 살던 사람들이 비로소 주권을 가진 국민(國民)으로 변모했고, 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에서 헌법이 제정되고, 대통령을 선출했다. 이어서 내각이 만들어지고 사법부가 구성되면서 1948년 8월 15일 제1공화국이란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고, 12월 12일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 “출생신고”를 완료했다.

    비록 UN감시하의 자유선거가 이뤄진 지역의 관할권만을 갖는 정부였지만, 대한민국은 국제적 승인을 받은 한반도 내의 유일한 합법정부였다. 달리 표현하면 현재에도 유효한 국제법과 국제정치 상 베스트팔렌 체제에서 국가주권을 가진 진정한 독립국가가 됐던 것이다.

    그러니 임시정부 수립에 반영된 민주공화제와 독립운동의 소중한 정신을 정신사적으로 계승하고 현실적으로 구현한 1948년 대한민국 탄생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임정을 위시한 독립운동의 의미를 오히려 고양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의 3대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이 확보된 상태에서 민주공화제를 바탕으로 정부가 출범하여 국제사회로부터 승인을 받게 된 것은 1948년 탄생한 대한민국이다.

    제헌의회와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을 독립한 해, 즉 새로운 나라가 출범한 해로 인식했다. 따라서 1949년 8월 15일 ‘독립 1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1949년 9월 의회에서 독립기념일의 명칭이 광복절로 바뀌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제헌의회는 1948년 8월 15일을 독립 또는 광복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제헌의회도 얼빠진 사람들인가? 사실이 이럴진대 ‘1948년 건국’을 언급한다고 해서 반헌법적이니 친일이니 하는 헛된 주장들이 얼마나 공허한 논의인지를 자각해야한다.

    해방 직후 38선 이북은 소련의 지시로 친소적인 단독정부 수립이 착착 진행됐고, 1946년 2월에 사실상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가 결성됐다. 더구나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이북지역은 중국 공산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했기에 이때 이미 한반도 통일은 요원한 일이 돼버렸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간파한 이승만 박사가 38선 이남이라도 자유민주주의의 보루로 만들자고 한 것이 바로 정읍연설이었다. 여기서 이승만은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통한 대한민국의 완성을 구상하면서 38선 이남에 세워질 정부를 “과도정부”라 칭했다.

    대한민국의 완성은 물론 자유통일을 통해서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반쪽에서만 대한민국이 설립됐다 해서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도 원래 13개주가 독립과 건국을 한 것이고 점점 그 외연을 넓혀갔다.

    1919년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5년 해방,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탄생은 결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상호 공존해야만 하는 존재이며 통합된 과정의 산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단계를 거쳐 잉태하고 출산하고 커나가는 과정이었다. 아직도 성장하는 국가이다.

    1948년 건국에 대한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비난을 하는 배경에는 솔직히 1948년 대한민국체제를 부정하고 극복해야한다는 철지난 분단사관과 계급사관의 그림자가 존재한다. 사실이 이럴진대 ‘1948년 건국’을 언급한다고 해서 무조건 반헌법적이니 친일파로 음해하는 공허하고 저급한 주장들은 중단돼야한다.

    P.S. 오마이뉴스가 필자의 글을 맹비난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 기사를 찾아봤다. 그 글을 읽으면서 딱한 심정이 들어 한마디만 더 하려고 한다. 내 글의 가장 중요한 요지는 오마이뉴스가 멋대로 분석했듯이 1948년에는 국가의 3대 요소가 충족됐기에 건국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 얘기는 이미 여러해 전에 했다. 1919년 설을 주장할 수도 있고 1948년 설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1948년설을 주장한다고 무작정 친일파니 반헌법적 반역사적이라고 거품을 무는 세태가 하도 자가당착적이고 한심해서 쓴 글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밝힌다.  


    ※ 외부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위 글은 8월 2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을 수정·증보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