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이로선언의 장제스 역할은 과장

                  정 일 화(백석대 강사. 국제정치학)

    2차 대전의 많은 비밀문서들이 개방되어 조금만 노력을 들이면 볼 수 있는 내용들을 외면하고
    ‘누가 말하더라’ ‘누가 그렇게 썼더라’는 글로 신화같은 것을 마치 역사의 정설로 믿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 ▲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한 영국 처칠, 미국 루즈벨트, 중국 장제스.
    ▲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한 영국 처칠, 미국 루즈벨트, 중국 장제스.


    카이로선언은 이를 주관한 미국의 비밀해제 서류(미외교문서 카이로회담 편, 1943년 11월)에 미국대통령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처음 작성한 카이로선언문의 초안이 들어있고, 그 초안과 더불어 루스벨트대통령이 손수 몇몇 문구를 바꾼 선언문내용이 사진으로 찍혀 그대로 실려 있다.

    카이로선언은 기본적으로 노예상태로 고통 받는 약소민족을 해방시키고 제국주의를 파괴하겠다는 대서양헌장과 카사블랑카선언의 철학에 기초한 것이고, 군사회의로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영국과 미국 중국대표들이 의견통일을 이루지 못하자 이 회의를 처음부터 거의 도맡아 진행해온 해리 홉킨스가 백악관 기록관을 불러 공동선언문을 구술함으로써 기초문안이 만들어졌다.

    카이로회담 기록관 코넬리우스의 증언 역시 외교문서철에 들어있다. 홉킨스의 초안은 루스벨트, 처칠의 결재를 거치는 동안 적어도 5번 수정되었지만 기본 골격은 변함이 없었다.

    해리 홉킨스라는 인물이 알지도 못하는 한국의 독립을 어떻게 4대국선언에 넣게 되었는지는 여러 가지 연구와 가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선언문이 홉킨스의 기초문안이라는 것과 루스벨트의 친필 교정이 들어간 문서라는 것을 인정한 후에 이뤄져야 한다.

    카이로선언이 장제스나 김구 또는 이승만의 힘으로 이뤄졌다고 논하는 것은 석가래 없는 지붕에 개와를 올리는 모양이다. 

    카이로선언이 장제스의 힘으로 이뤄졌다는 주장은 1956년 중국(자유중국)정부가 루스벨트와 장제스의 카이로대화내용이라면서 영어로 번역에 국무성에 보낸 서류가 입에 오르내리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카이로회담 문서에 참고자료형식으로 첨부되어 있다.

    미국의 공식서류는 그날 밤 있었던 루스벨트-장제스 대화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다만 제목만 정리했는데 연구자들은 이 내용이 미국의 공식기록 제목과는 너무 달라 '개작한 것(doctored)'으로 보기도 한다.

    첨부 서류에는 11월22일 밤 루스벨트와 장제스가 송미령의 통역을 통한 대화에서 “루스벨트가 한국의 장래와 인도차이나 및 다른 식민지에 대한 상호이해를 같이 해야 한다는 의견을 먼저 꺼냈고 이에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필요성을 강조했다”로 되어 있다.

    임시정부의 승인요청 마저  8 15 일본항복 후까지도 거부한 장제스가 1943년 11월에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는 것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김구주석과 조소앙이 1943년 7월26일 장제스를 찾아가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을 주창해 달라고 부탁했다”(조선일보 12월1일자A33면)고 주장하는데, 처칠이 테레란회담이 열리기전 카사블랑카나 카이로에서 미리 미영중 3자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의한 것이 1943년 10월26일이었고 루스벨트가 카이로로 결정하여 장제즈에게 통보한 날자는 10월 27일이어서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다.

    테헤란회담은 원래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의 3자회담으로 구상되어 장제스는 없었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제2의 독립선언서인 카이로선언의 기초자 해리 홉킨스를 건국훈장으로 기려야만 이처럼 잘못된 신화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일화 jcolumn@naver.com, 010-8788-3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