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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편향 교과서의 李承晩 죽이고 金九 띄우기

조갑제 조갑제닷컴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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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10-25 11:37 수정 2014-10-25 14:28

좌편향 교과서의 李承晩 죽이고 金九 띄우기

건국을 주도한 사람은 폄하하고 반대한 사람은 영웅시

趙甲濟    
  
反대한민국적 계급투쟁史觀(사관)으로 써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계급투쟁론의 핵심인 反국가-反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 서 있다.
자연히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북한의 사회주의-전체주의 정권을 비호하게 되어 있다. 채택률이 가장 높은 미래엔 교과서의 경우 建國(건국) 과정을 설명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한 李承晩(이승만)-韓民黨(한민당) 세력의 역사적 업적을 묵살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속거나 이용당하여 건국을 반대한 김구-김규식의 左右(좌우)합작 노선을 높게 평가한다. 이 교과서가 이승만-한민당 세력을 폄하하는 것은 이들이 공산주의 노선에 반대하였기 때문이고, 이들이 김구-김규식 노선을 칭송한 것은 그들이 공산주의를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계급투쟁론에 입각하면 공산주의를 비판할 수가 없고, 자유민주 노선을 걷는 대한민국을 높게 평가할 수가 없다.
  
   미래엔 교과서는 건국의 주인공인 李承晩의 역할은 고의적으로 축소하고 무시한다.
이승만을 비판할 때만 그의 이름을 明記(명기)한다. 공산당 반대, 신탁통치 반대, 美蘇(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북한에서의 공산정권 출범에 대응한 남한 내의 정부 수립 제안, 左右합작 반대, 남한 총선에 의한 건국 운동, 건국 문제의 유엔 회부 관철, 유엔의 남북한 총선 결의, 김일성 주도의 남북협상 반대, 5월 총선, 국회 구성과 자유민주주의 헌법제정, 건국 선포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주도한 이는 이승만이고 그를 뒷받침한 것은 한민당이었다. 美 군정도 한때 이승만 노선에 반대하였으나 1947년의 트루먼 독트린 발표 이후 세계사의 흐름을 탄 그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교과서는,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승만의 주도적 역할을 언급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누구의 노력에 의하여 대한민국이 세워졌는지를 알 수 없게 만들었다.
  

▲ `1948년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에 취임, 선서하는 이승만 박사.(자료사진)


   그 대신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한 인물과 노선에 대하여는 우호적으로 크게 다뤘다.
건국에 반대한 좌익 주도의 무장반란인 4.3 사건과 여순 14연대 반란을 '무장봉기'라고 미화하고 진압한 국군을 부정적으로 기술하였다. 공산당에 이용당한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을 칭송하였다. 主客(주객)이 전도된 이런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은, 대한민국 건국이 공산주의를 반대하였으므로 나쁘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미래엔은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2.)이란 글을 실었다.
   <미 군정 아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시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면서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라는 이 글은 '38도선을 넘는 김구 일행' 사진과 함께 실었다. 김구의 글을 비판 없이 소개하면 학생들은 이승만을 미워하고 건국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될 것인데, 미래엔 교과서엔 아무런 비판이 없다.
   김구와 김규식의 오점인 평양의 남북협상도 긍정적으로만 소개한다. <이 회의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 김두봉 등과 함께 통일 국가 수립을 위해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는 설명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문구를 연상시킨다. 교과서라면 이 공동성명을 비판적으로 소개해야 한다. 이미 정권을 세운 북한 공산 집단이 주한미군 철수와 대한민국 건국의 방해를 위하여 짜낸 음모라는 점을 설명하여야 학생들이 속지 않는다.
  
   李承晩 세력이 미 군정 당국, 소련, 북한정권, 남한의 좌익들 요구에 굴복, 좌우합작 노선을 수용하였더라면 대한민국 건국은 불가능하였을 것이고,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체코 등 東歐(동구)의 공산화 과정은 좌우합작을 거쳤다. 

▲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고 4월 평양게 간 김구(오른쪽)가 김일성을 만나 뒤따라가고 있다.

      
   *김일성에 철저히 이용당한 金九, 金奎植
  
   소련의 스탈린은 1945년 9월에 이미 현지의 소련군 사령부(연해주 군관구 군사 위원회와 25군 사령부)에 북한에 공산 정권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려 남북 분단을 기정사실화하였다.이 결정적 명령을 교과서에서 소개한 것은 교학사뿐이고 좌편향 5種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소련의 분단 책임을 덮기 위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남북 분단은 美蘇의 공동 책임이 아니라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기로 한 스탈린의 책임이다.
  
   梁東安(양동안)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사'(玄音社)에서 이런 요지의 설명을 했다.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1946년 초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인민민주주의정권'을 구성, '민주개혁'이란 명칭하의 사회주의화 작업을 급속하게 실천해갔다. 47년엔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인 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인민경제계획을 실천하면서 생산관계를 사회주의화하는 작업을 본격화했다.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인민집단군이라는 독자적 정규군까지 조직했다. 이러한 북한의 사회주의화는 유혈혁명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이전 상태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시점부터서 한반도는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되지 않는 한 평화적인 수단으로는 통일될 수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이미 47년 8월부터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남북통일인민정권을 수립하자는 캠페인이 전개되고 있었다. 남한의 좌익 세력은 북한 주둔 소련군의 지휘를 받아 남한 사회를 혼란시키고, 미국으로 하여금 美蘇 共委(공위)에서 소련의 요구(남한의 우익 진영 배제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해 폭동과 군중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48년 초의 상황에서 북한엔 이미 소련이 세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 섰고 이 세력은 남한의 좌익들을 선동, 남한에 反共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수립되지 못하게 하는 데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김구 김규식이 내세운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반대'는 '북한만의 단독 정권'이 현존하는 상황을 완전히 오판한 것이었다. 북한이 핵무장하였는데 한국은 절대로 핵무장도 방어망도 건설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李承晩의 建國 노선에 반대한 金九, 金奎植은 1948년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과 회담하고 4월30일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金九, 金奎植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 치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이 철저하게 김일성에게 이용당하여 대한민국 建國을 방해하려 하였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명서는 5월10일로 예정된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음을 분명히 한 뒤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소련은 북한과 接境(접경)하고 있어 군대를 철수하더라도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지만 미군은 한번 철수하면 한국이 남침을 당하더라도 제때 파병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명백한 일이었다. 6.25 남침의 가장 큰 원인은 남침 1년 전의 주한미군 철수였다. 그럼에도 兩金(양김) 씨는 공산주의자들의 주한미군 철수론에 동조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한 후에 內戰(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한 1년 뒤 북한군의 南侵(남침)이 있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南侵의 초대장이었다. 그럼에도 金九, 金奎植은 김일성의 말을 믿고 외국군대가 철수한 후에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확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들을 속인 셈이다. 지도자가 속는 것은 결국 국민들을 속이는 행위이다.
  
   이 성명서는 또 ‘외국 군대가 철퇴한 이후 下記(하기) 諸(제)정당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全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선거를 통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주도할 ‘下記 諸정당단체들’은 북조선노동당, 남조선노동당,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근로인민당, 북조선농민동맹 등 56개 단체였다. 金九, 金奎植 세력과 남북한 좌익단체 연합체가 건국을 주도한다는 말이다. 즉 李承晩 세력 등 자유진영을 제외하고, 남북한 공산세력이 뭉쳐 공산국가를 만드는 데 김구, 김규식이 가담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도 金九, 金奎植은 철저히 이용당했다.

    이에 대해 梁東安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이것은 美蘇공위에서 소련이 주장해온 것, 즉 남한의 우익진영을 배제하고 통일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주장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단지 美蘇공위 때는 소련이 배제하려 했던 김구와 김규식 및 그들의 추종정당과 단체들을 추가로 참여시킨 점이 다를 뿐이다. 김구, 김규식 등이 이제는 소련의 제안을 지지했기 때문에 공산당 지배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있는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모든 일이 성명의 내용대로 진행되어서 공산당이 지배하는 정권이 수립되면 그 다음에 생길 통일정부가 소련이 원하는 공산정권이 될 것은 너무나도 自明한 것이었다. 요컨대 4.30 성명도 공산당의 한반도 지배를 위한 소련의 정책을 뒷받침해주는 결과를 초래할 문건이었다.”
  
   金奎植은 평양에 가 있을 때 김일성이 주최한 초대연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북조선으로 오니 북조선은 살 토대가 있다. 남쪽은 공장이 없고 미국 차관만 가져오고 여기 공장은 일하고 있으며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 되는 집안 같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5월6일)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남조선에는 도처에 부패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북조선의 공장은 남조선의 공장보다도 충실한 생산을 하고 있다. 소련인은 그다지 표면에 나서지 않는데 남조선 미국인은 너무나 간섭이 심하여 현재 군정부에는 부패가 심하다.”
    金九, 金奎植은 5월6일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두 사람은, 4.30 공동성명이 통일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하는 것이라고 自讚(자찬)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북조선 당국자도 單政(단정)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하겠다고 확언했다.”
  
   4.30 성명대로 통일조국이 건설되면 자유진영이 배제된 공산국가가 될 것이다. 金奎植, 金九는 사실상 공산국가 건설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힌 셈이다. “북조선 당국자도 單政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하겠다고 확언했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당시 이미 북한엔 ‘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북조선 당국자’란 말 자체가 정부를 전제로 한다. 남한엔 ‘남조선 당국자’로 불릴 만한 조직도 사람도 없었다. 美軍政(미군정)이 있을 뿐이었다. 反대한민국적 階級鬪爭史觀(계급투쟁사관)에 입각한 좌편향 교과서들이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을 감상적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미화하는 진정한 이유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기 위함이다. 
      
   *5.10 선거를 惡評한 金九, 金奎植
  
   두 金 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10 선거는 투표율 90% 이상의 참여로 공정하게 치러졌다. 김구는 그러나 “선거가 부자유한 분위기 속에서 실시되었다”는 논평을 냈다. 유엔감시기구도 공정하다고 평한 선거를 惡評(악평)한 것이다. 양동안 교수는 이렇게 논평했다.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김구와 김규식은 대한민국 건국을 훼손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제헌국회가 開院(개원)되고 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이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다고 말한 데 대하여 “현재 국회의 형태로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라고 말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6월7일보다 조직적으로 5.10 선거 무효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키로 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김구, 김규식은 나중엔 북한에 대해서도 정부 수립 움직임을 비판하여 兩非論(양비론)을 보이기도 하였다. 梁東安 교수는 “그러나 그들의 분단정권 반대는 남한의 대한민국에만 타격을 줄 뿐 북한의 단독정권에는 타격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남한에 거주하고 있었고, 남한의 정치체제가 개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고 평했다.
  
    李承晩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는 이렇게 주장했다.
  
   “북한은 소련군에 의해 공산화되어 이미 김일성 정권이 들어섰으니 남한의 갈 길은 북에 조직된 공산군의 武力(무력) 앞에 굴복하여 공산화를 감수하든지 아니면 정통성을 가진 자유민주 국가를 세워서 반공으로 국가발전을 도모해 자유통일을 진행하든지 두 가지가 있었다. 여기에 제3의 길이란 한국엔 없었다. 金九와 金奎植, 兩金은 북한에 가서 이미 양성된 공산군의 실태를 보고 남한에 정부를 수립해도 곧 붉은 군대가 쳐내려와 인민공화국이 될 터이니 대한민국을 建國할 필요가 없다고, 끝까지 소련과 북한공산정권의 편을 들어 정부수립을 반대하다가 마침내 해방정국의 迷兒(미아)가 되고 말았다.” (아래 대화록 참조)
   그는 또 이렇게 설명했다.
   “金九와 金奎植은 북의 공산집단이 머지않아 남침해 올 것을 알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두 金은 그럴 일은 없다고 거짓성명을 하였다. 정부를 수립해 봐야 곧 없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그들의 강력한 建國 반대였다. 그대로 있다가 공산화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민족통일이었다. 金九는 西山大師의 漢詩 구절,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를 愛誦(애송)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눈길을 金九는 옳게 걸어갔는가? 과연 김구를 따르는 용공통일의 길이 옳았던 것인가? 반세기 이상을 신문과 방송이 김구 찬양 일색인데 과연 그 추종자들이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고 있는가 말이다. 김구는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판을 유지하였던 공로는 1945년까지 혁혁하였다. 역사의 진실을 가리고 한국 사회가 지금도 金九 예찬론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이승만과 김구 두 분은 독립운동이 좌익 주도로 가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견지하도록 중심을 잡은 절대적 공이 있다.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독립운동은 좌익세력이 주도하는 게 상례인데 기독교에 뿌리를 둔 이승만 김구의 지도력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은 자유민주 노선을 지켜냈고 그 바탕에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건국이 가능하였다. 김구, 이승만은 신탁통치 반대로 反共 노선을 같이 하였으나 김구의 오판으로 건국의 동지가 되지는 못했다. 이승만의 功(공)을 4.19로 부정할 수 없듯이 김구의 功을 남북협상의 실수로 부정할 순 없다. 경계해야 할 것은 김구를 띄우기하여 이승만을 부정하는 짓이고, 여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김구의 다른 功까지 부정하는 것이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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