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상 문화 전쟁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 우리 사회에서는 다소 생소한 [사상문화전쟁]이 화두에 올랐다.
    <뉴데일리>는 공식적으로 사상문화전쟁을 선포하는 야심적인 깃발을 가장 먼저 내 걸었다.

    [특별기획-사상문화전쟁 시작됐다]는 일련의 시리즈 기획기사는 사회 각 분야에 잠재된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면서 지식인들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뉴데일리> [특별기획-사상문화전쟁 시작됐다]의 부제는 [종친떼(종북-친북-떼촛불 혼합체) 문화권력에 대한 선전포고]이다.

    이 같은 선전포고를 보면서 문제제기의 정확성과 용기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도 많다.
    동시에 어째서 그 같은 내용이 이 시점에서 화제에 올라야 하는지 어리둥절할 독자도 매우 많을 것이다.

    [사상문화전쟁]의 좀 더 근원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세계인들이 가장 애용하는 서적 – 바이블을 근거로 이를 따져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대한민국이 확실하게 사는 길이 바로 그 길이다.

    모든 전쟁의 시작은 사상과 문화에서 시작한다. 포탄이 날라 다니고 핵무기가 터지고 땅이 진동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시뻘건 피가 강물처럼, 바다처럼 흘러내리는 물리적인 현상은 [사상문화전쟁]을 원인으로 하는 결과로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먼저 보이지 않는 사상문화의 영역에서 정중동의 무서운 전쟁이 일어난 뒤에, 드디어 보이는 물질 세계에서 우지끈 쿵쾅 파괴와 살륙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영역을 관통하는 통찰력이 없으면, [사상문화전쟁]의 실체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 대한민국에 있어서 [사상문화전쟁]의 최전선은 북한과의 대립이다.

    당연히 대한민국에서 시급하게 대처해야 할 사상문화의 전쟁터는 북한과 연결된 영역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종북, 친북 그리고 이들이 선전 전략으로 활용하는 떼촛불을 [사상문화전쟁]의 키워드로 내세울 수 밖에 없다.
    [종
    친떼(종북-친북-떼촛불) 문화권력에 대한 선전포고]
    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사상문화의 영역은 신학, 철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교육, 역사학 등 모든 학문 부분이 거의 다 해당된다. 대중문화영역으로 내려오면 언론, 영화, 음반, 만화, 게임, 등등으로 세분화될 것이다.

    보이는 것이 있기 전의 원형인 사상문화의 영역은 매우 복잡하고 가지가 많으며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이 영역이 잘못된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되면, 필연적으로 형벌과 파괴와 고통과 죽음과 반역과 배신과 어둠이 뒤 따른다.

    혹시 영화 터미네이터를 기억하는가?
    악당 로봇은 죽어야 하는데 안 죽는다.
    불로 태웠으면 죽어서 사라져야 하는데, 여전히 살아있다.
    커다란 트럭으로 뭉갰으면 끝나야 하는데, 그 악당 로봇은 살아서 걸어온다.

    아무리 총알을 쏴 대도 죽지 않는 터미네이터 처럼, 잠 자다 가위가 눌려 아무리 일어서려고 발버둥쳐도 숨만 컥컥 막히는 악몽처럼, 그렇게 사상문화의 본질에 관한 다툼은 어렵고 힘들다.

    <뉴데일리>가 [사상문화전쟁]을 선포하면서 종북주의자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공격하고 비판하고 또 말 대 포를 쏘아대는 이유를,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대충 이런 식으로 생각할 지 모른다.

    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왠 색깔논쟁이지?
    선거에서 박근혜 당선인이 승리하니까 더 기세등등하게 나서는가?


    새누리당 지지자중에서는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절반 이상일 것이다.

    이제 그만들 하시지. 충분하잖아~


    하지만, [사상문화전쟁]이야 말로 모든 전쟁의 가장 핵심중의 핵심이다.
    이것을 놓치는 사람은 결코 시대 정신을 이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이런 전쟁을 할 수 있는가?
    죽음의 고비를 한 번도 아니고 서너 번을 넘어본 사람, 아니면 죽을 것과 같은 고통과 번민과 투쟁의 피말리는 불면의 시간을 아주 오랫동안 지나온 사람, 한 발만 잘 못 딛으면 회복이 불가능한 멸망과 어둠의 좁은 골짜기를 지나온 사람, 그래서 죽음과 파멸이 항상 우리 곁에서 우는 사자처럼 노리고 있음을 체험한 사람,
    어떤 형태이든지 자기 삶의 현장에서 이와 유사한 특수 훈련을 겪어서 살아남은 자 만이 사상문화전쟁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은 링 위에 오르지도 못한다.
    무섭고 떨려서, 오르는 순간 몇 대 맞아서 K O 당할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링 밖에서 껍데기 정보와 지식만 가지고 참견하는 척 하고 말 것이다.

    이런 통과의례를 거쳤을 때 드디어 [사상문화전쟁]의 링에 오를 수 있다.
    절대 다수는 [사상문화전쟁]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자가 되거나, 사망자가 되거나, 길을 잃고 마적처럼 어린 지식인들을 수탈하거나, 술취한 사람처럼 방황하면서 헤맬 수 밖에 없다.

    사상과 문화의 본질을 추구하던 모든 사람들은 이 같은 과정을 모두 다 겪어야 했다.

    과거에도 이런 종류의 씨름을 한 선각자와 현인들이 왜 없었을까?

    시선을 2,000년전으로 돌려보자.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이름 폴(Apostle Paul)이다.
    세인트 폴(Saint Paul)이라면, 우리들의 귀에 익숙한 사도 바울이 그 주인공이다.

    젊었을 적, 유대교 도그마에 빠져 기독교도를 잡아 죽이면서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던 바울이 나중에는 어떻게 변했을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기독교 사상 가장 위대한 저술가이자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변신했다.

    수없이 많은 책을 쓴 폴, 그가 만년에 쓴 책 중 가장 핵심을 뚫고 나온 책이 바로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로마서이다.
    로마서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기독교 사상의 중심으로 평가하는데, 이중에서도 로마서 8장은 바이블의 다이아몬드라는 평가를 받는다.

    세인트 폴의 저서는 2000년의 시간적인 간격을 넘어서 오늘 지금 대한민국에게 외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왔다.
    세인트 폴은 사망과 생명의 갈림길을 이렇게 설파했다.

    죄악된 사람의 생각은 [사망]이지만, 그러나 영이 다스리는 생각은 [생명과 평화]이다.
    The mind of sinful man is death, but the mind controlled by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지금 대한민국에서 [종친떼]를 상대로 [사상문화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죄악된 생각은, 그 결과로서 반역과 분열과 거짓을 불러온다.
    죄악된 생각은, 그 결과로써 가난과 고통과 소외를 불러온다.
    죄악된 생각은, 그 결과로써 거짓과 배신과 혼란을 불러온다.
    죄악된 생각은, 그 결과로써 분노와 혼란과 불안을 가져온다.
    죄악된 생각은, 그 결과로써 불통과 염려와 타락을 불러온다.

    이런 모든 것의 궁극적인 결과는 바로 죽음인 것이다.

    어둠과 파멸과 죽음의 반대되는 곳으로 가려면, 죄악된 생각을 떠나서 영(靈, 스피릿)으로 가야한다.
    오직 스피릿 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궁극적인 단 하나의 열쇠이다.

    김지하 시인이 생명운동을 펼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필연적인 결론이라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생명만이 살 길이기 때문이다.
    생명만이 살 길이라는 이 단순 명쾌한 결론이, 죽음과 혼돈과 파괴와 거짓의 그 참혹하고 자기파괴적인 험난한 길을 걷고 난 다음에 내린 것이기에, 아무나 뜻도 모르고 뱉은 생명 어쩌구 하는 결론과는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세인트 폴이 2000년전에 [죄악된 생각은 사망]이지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라는 이 간단명료한 진리의 한 마디가 그냥 나온 줄 아는가?

    세인트 폴은 젊었을 적엔 지식인의 도그마와 학문의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전통적인 유대교의 한계를 넘어 새로 등장한 기독교 사상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과로서 세인트 폴은 새시대 정신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역할을 자랑스럽고 즐거운 마음으로 했던 인물이다.

    자신이 잘 못 된 길에서 사람백정 노릇을 했다는 처절한 후회에서 돌이킨 뒤에, 그는 반대로 새 시대 정신의 전파자로 나선다.
    그 결과로서 세인트 폴이 쓴 수많은 글들이 지금 바이블로 격상돼서 우리 책상에 놓여있다.

    하지만 새 시대 정신의 전파자에게 닥친 시련은 가혹한 것이다.
    세인트 폴은 몽둥이에 맞아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너무나 심하게 맞아서 사람들은 이제 그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성 밖으로 내 던진 적도 있었다.
    감옥에 갇힌 것이 몇 번인지 모른다.
    그것이 끝이었을까?
    세인트 폴은 결국 새 시대 정신을 막으려는 로마제국에 붙잡혀 사형됐다.

    세인트 폴이 중동지역에서 로마로 가려했을때,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말렸다.
    그곳으로 가면 죽는다고.한 두사람이 한 두 번 말린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여러 번 말렸다.
    세인트 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면 죽는 것을 알기에 갈 수도 있었고, 안 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로마로 갔고, 그리고 붙잡혀서 사형을 당했다.

    이렇게 죽음을 무릎쓰고 세인트 폴은 역사를 새롭게 진전시킬 새 시대 정신이 꽃을 피우는 초석을 놓았다.
    세인트 폴은 2,000년전 자기 방식대로 [사상문화전쟁]을 선포하고는, 로마제국이라는 절대적인 세상권력에 도전해서 새 시대를 열었다.



  • 그렇다면 지금 대한민국 한반도에서 가장 치열한 [사상문화전쟁]의 본질은 무엇일까? 
    북한의 3대 세습 정권이 뿌려놓은 잔인하고 비인격적이며 시대착오적인 인권말살의 무자비한 괴물 집단과 연결된 모든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결국 죽음으로 가는 특급열차이기 때문에, 그것을 너무나 명확하게 보는 사람들은 [사상문화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상문화전쟁]은 한반도가 생명으로 나가는 유일한 해법이다.
    [종친떼]의 길은 대한민국이 망하는 길이고, 그 길은 순진-무지-마비-맹인된 너무나 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가는 죽음의 행로이기에, 그것이 너무나 기막혀서 지르는 비명이 바로 [사상문화전쟁] 선포인 것이다. 
    귀가 막혀서 아무리 악악 거려도 듣지 못하고, 꼬집고 깨물어도 며칠 지나면 언제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리는 이 기막한 망각과 무감각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르는 외침인 것이다.

    죄악된 생각은 죽음이고, 영의 생각이 생명과 평화라는 이 간단명료한 한 마디는 생명과 죽음의 처절한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이 뼈속까지 깨달은 뒤 내 지르는 한 마디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중요한 포인트를 놓쳐서는 안된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종친떼]를 대상으로 벌이는 [사상문화전쟁]은 승부를 내야 할 전쟁이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얼마나 좋으냐고?
    서로 용납하고 한 발자국씩 양보하고, 공존하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어째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통합해야지, 무슨 전쟁이냐고?

    참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더 합리적이고, 관대해 보이고, 더 나은 생각처럼 들린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는 안되니까 하는 수 없어서, 통합 대신 분리가 필요하고, 공존 대신 치열한 전쟁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양립하는 순간, 바로 파멸과 죽음으로 이끌려 가기 때문이다.
    왜냐고, 어째서 그러냐고, 무슨 궤변이냐고, 무슨 독선이냐고, 너무나 호전적이 아니냐고?
    대부분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바로 이같이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 단계에 오른 사람만이 사상문화의 전쟁터에 나설 수 있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치명적인 통과의례를 거친 사람만이, 그것이 쓸데없는 어리석은 질문임을 체험적으로 깨달은 사람만이.

    그래서 [사상문화전쟁]은 소수의 전사들이 대표로 나서 치루는 보이지 않는 전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000년전 세인트 폴 역시, 이것이 전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단 한마디로 요약해서 설파했다.

    죄악된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
    The sinful mind is hostile to God.
    It does not submit to God's law, nor can it do so.

    이 문장이 기독교 경전에 쓰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다음과 같이 바꿔서 읽을 수 있다.

    죄악된 생각은 역사를 거스리는 반동이 된다.
    이 죄악된 생각은 역사의 발전에 동조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

    북한의 잔인한 세습독재 정권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종친떼]의 사상과 문화는 역사와 인륜과 천륜을 거스르는 죄악된 생각이다.
    따라서 역사의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다.
    원수와 사이좋게 지내면 좋으련만, 이미 2,000년전 죽음과 생명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들면서 생명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노력했던 세인트 폴은 이런 죄악된 생각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역사에 대해서 증오심을 갖고 있다.
    역사의 발전에 순응하지 않는다.
    아니, 역사의 발전에 순응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역사의 발전에 순응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역사의 발전과 마찰을 빚는다.
    이 마찰이 바로 [사상문화의 전쟁]이란 형태를 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뼈속까지 이런 죄악된 생각의 본성을 꿰뚫지 못하면, [종친떼]를 상대로 하는 사상문화의 영역에서는 어째서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지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세인트 폴은 동시에 어째서 그 전쟁을 해야 하는지도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너희가 죄악된 본성에 따라 [살면 죽을 것] 이다.
    그러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 이다.
    For if you live according to the sinful nature, you will die;
    but if by the Spirit you put to death the misdeeds of the body, you will live,

    바로 이 같은 결론에서 [종친떼]를 상대로 하는 전쟁의 정당성이 나타난다.
    대한민국의 남쪽과 북쪽에서 설치는, 한반도를 감염시킨 이 [종친떼] 바이러스가 [사상문화전쟁]이 파괴하려는 목표이다.
    이 치명적인 [종친떼] 바이러스는 감염되면 죽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이다.

    이 바이러스를 박멸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죽는다.
    이 바이러스를 박멸할 때 대한민국은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다시 말해 <뉴데일리>가 선포한 [종친떼] 바이러스를 박멸하자는 [사상문화전쟁] 선포는
    바로 한반도를 건강하게 일으켜야 한다는 역사적인 발전에 맞는 시대정신인 것이다.

    [사상문화전쟁]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전쟁이다.
    분별력이 없는 수천만명을 살리기 위한 전쟁이다.
    종친떼 바이러스에 감염돼서 죽는 줄도 모르고 어리석게 날뛰는 동시대의 동포들을 살리기 위한 전쟁이다.
    [사상문화전쟁]은 북한주민을 해방시키자는 전쟁인 것이다.



  • [사상문화전쟁]에서 승리하면, 한반도에서 무력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력충돌은 사상문화의 영역에서 해결되지 않은 대립과 모순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종친떼] 바이러스라는 원인이 해소됐으니, 무력충돌이라는 결과가 나타날 수 없는 것 아닌가?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종친떼] 바이러스를 박멸하는 [사상문화전쟁]은 

          ⊙ 가장 평화적이고, 
         ⊙ 가장 경제적이며, 
         ⊙ 가장 현실적인 동시에 
         ⊙ 가장 피해가 적으면서 
        
     ⊙ 가장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한반도 평화통일 전쟁이라는 놀라운 사실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종친떼]를 대상으로하는 [사상문화전쟁]의 선포는 그래서 한반도의 정신적인 대립상태를 해소하자는 평화전쟁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중차대한 한반도 평화통일 전쟁에 나서는 [사상문화전쟁] 특수대원들의 마음가짐은 어때야 할 것인가?

    이 대답 역시 필자는 세인트 폴에게서 찾고자 한다.

    비록 네 믿음으로부터 오는 희생과 봉사 위에 내가 [관제]로 뿌려질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이다.
    But even if I am being poured out like a drink offering on the sacrifice and service coming from your faith, I am glad and rejoice with all of you.

    이 문장에서 말하는 관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관제(灌祭, libation, Drink offering)

    구약시대에 행해진 각종 희생제사중의 하나이다.
    관제는 제사를 드릴 때 제물에 포도주나 술, 기름이나 피 등을 뿌려서 드렸다.
    구약에는 59회 나오는데 전제(典祭)로도 번역되어 있고, 신약에는 관제로 번역되어 있다.

    신약에서는 세인트 폴은 자신이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의미로 ‘관제를 드릴찌라도’ 라고 표현했다.
    또 젊은 목회자 디모데를 권면하면서 세인트 폴은 자신이 순교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관제라는 말을 통해 표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인트 폴의 이 위대한 고백은 이 시대정신과 결합시켜서 다음 같이 바꿔서 읽을 수 있다.

    나는 여러분들이 당면한 시대적인 믿음(한반도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행하는
    여러분들의 모든 희생과 봉사가 성공하도록 나의 피를 그 위에 쏟는다면,
    더없기 기쁘고 기쁠 것이다.


    [종친떼]를 대상으로 하는 [사상문화전쟁]은 이렇게 치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