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국대통령 이승만 ‘죽이기’의 단골 메뉴로 지금도 악용되고 있는 ‘위임통치청원’.
    제16회 이승만 포럼(14일 정동교회)에서 오영섭 교수(연세대 이승만연구원)는 그 사건의 진상과 역사적 배경등을 총정리,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발표했다.
    “위임통치청원서는 이승만 단독작품이 아니다. 당시 미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합의에 따라 마련되었고, 국민회 안창호 회장이 중앙총회를 소집하여 논의-승인한 후 승낙서를 정한경에게 공문으로 보냈다. 이에 국제법 전문가인 이승만의 최종 검토 수정을 거쳐 정한경이 윌슨 대통령에게 발송한 것이다.“

  • 오교수는 미국쪽 ‘위임통치청원’이 1919년 2월25일 우송된 데 이어, 상해 김규식이 3.1운동후인 4월3일에 별도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위임통치청원서가 남아있다고 밝혔다.
    안창호 승인-이승만 작성본인 위임통치청원서와 김규식본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며, 김규식본은 <해방을 바라는 한국인들의 요구사항>이란 비망록까지 붙어있다. 두 청원서의 요지는 “한국의 완전독립을 보장한다는 전제하에 한국을 일본 학정에서 해방시켜 일정기간 국제연맹이 통치해 달라“는 것이다.
    오교수는 김규식도 상해의 여운형과 협의, 결재를 받지 않고는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왜 위임통치청원서를 싸고 이승만에게만 ‘매국노’ 규탄이 이어졌나?
    결론부터 말하면 독립운동 세력들의 파벌 싸움, 주도권 쟁탈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위임통치청원 구상은 당시 일본의 잔학한 무단통치 굴레를 벗어나자는 절박한 상황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합의된 시대적 탈출구였다. 더구나 제1차세계대전후 창립된 국제연맹의 도움을 받자는 기대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등은 당시 각국 식민지 피압박민들의 억압된 요구를 폭발시켰던 것이다. 여기에 한국 독립운동가들도 완전독립의 과정으로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안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무엇보다 일본의 학정부터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에 따라 구체화된 위임통치청원은 3.1운동 직전에 완성, 미국정부와 국제연맹에 발송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 연합국인 미국과 국제연맹은 모두 이를 무시했다. 임시정부도 없는 비공식단체의 호소는 물거품이었다.

    위임통치청원에 반기를 든 것은 무장투쟁 주창자인 박용만 신채호, 공산계열 이동휘 등이었다. 3.1운동후 출범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무장투쟁론, 의열투쟁론, 외교독립론 등등의 주도권  싸움이 치열해졌다. “이완용은 있던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신채호의 유명한 매국노 발언도 이때 나왔다. 식민주의 패권시대의 강대국 파워폴리틱스를 알길도 없는 구시대 의병 수준의 민족자존심이라고 할까. 특히 1921년 1월부터 이승만이 상해에서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시작하자 박용만등 반대세력은 반(反)이승만 운동을 거세게 벌여 나갔다.
    “다 지난 일을 가지고 왜들 이러나?” 이것은 초기 안창호가 변명 겸 반대세력을 달래던 말이다.
    그후 안창호 역시 라이벌인 이승만 반대 진영에 가담, 모든 책임을 이승만에게 뒤집어 씌웠다.

    지금은 어떤가? 국내 현대사 학자들은 대부분 무장투쟁론을 일방적으로 중시하고 외교독립론이나 위임통치청원은 이승만의 매국적 행위로 왜곡하여 교육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일제시대 조선공산당을 이은 북한 정권이 선전해온 '이승만=친미 매국노' 등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역사학계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한  연구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오교수는 “일제강점기에 급진적 독립운동가들은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을 매국노라고 비판했지만, 그러나 현대사의 진로는 이승만이 구상하고 내다본 궤적을 밟으며 성장했음을 유념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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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6회 이승만 포럼 발표 내용>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

    오 영 섭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

    Ⅰ. 문제의 제기

    임정 초기에 독립운동진영의 노선투쟁과 패권경쟁 과정에서 돌출된 대표적 사건은 이승만(1875∼1965)이 국제연맹에 한국의 위임통치를 맡아주도록 주선해 달라고 윌슨 미대통령에게 청원한 문제이다. 당시 독립전쟁론을 주창한 임정내 이동휘세력, 하와이와 원동의 박용만세력, 북경만주노령 지역의 일부 독립단체들은 이승만이 미국정부에 한국의 위임통치(mandate; mandatory rule)를 청원했다고 거세게 비판했다. 이들은 위임통치 청원행위가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크게 훼손한 것이며, 구미 열강의 침략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과도하게 친미적 태도를 보인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신채호는 “이승만은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역적이다”며 이승만을 강력 비판했다. 위임통치청원에 대한 비판적 반응은 이승만이 정력적으로 추진한 외교독립활동의 성과를 전혀 무시하고, 임시정부의 내분과 혼란의 모든 책임을 이승만에게 돌림과 동시에,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 말고 독립운동계에 특별히 공헌한 것이 있느냐”는 가혹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Ⅱ. 위임통치청원서의 작성제출 관련자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패전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후문제 처리를 위해 이듬해 1월 18일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가 열리게 되었다. 미국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14개조의 평화조건 중에서 제5조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한인들은 국제사회에 독립청원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파리강화회의 주도국들과 그 대표들에게 전달ㆍ제출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에 관여한 단체나 유명 인사들은 수많은 문건을 만들어냈다. 이들이 작성ㆍ제작한 수많은 문건 가운데 오늘날까지도 논란거리로 남아있는 것은 1919년 2∼4월에 작성된 위임통치청원서이다.

    1. 1919년 1월 중순부터 두 달 이상 이승만은 정한경과 함께 미국정부와 윌슨대통령을 상대로 파리행 여권 취득활동과 한국독립 호소활동을 벌였으나 여의치 못했다. 그러자 이승만 은 정한경과 연명으로 1919년 2월 25일자 위임통치청원서를 작성하여 3월 3일에 윌슨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그리고 양인은 3월 16일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자신들이 윌슨대통령에 보낸 「한국위임통치청원서」를 각 신문에 보도케 하였다. 양인의 요청에 따라 󰡔뉴욕 타임즈󰡕는 3월 17일자로 “대한인국민회는 윌슨과 파리강화회의에 대해 한국이 완전한 자치능력을 갖췄다고 판단될 때까지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통치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이 담긴 청원서를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여러 신문들이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사실을 매우 간략히 보도하였다.

    1919년 2월 25일자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서 작성ㆍ발송에 관련된 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1) 중국정부 정치고문을 지낸 젠크(Jeremich W. Jenks)가 1918년 12월 중순경부터 정한경에게 한국이 일본 통치에서 벗어나 완전독립을 확실히 담보하는 조건으로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하라고 권고했으며,

    2) 정한경이 위임통치청원서의 초본을 작성할 때에 미국의 유력인사, 한중 양국의 유력한 친우들, 그리고 국제법 전문가들로부터 권고를 받았으며,

    3) 위임통치청원서를 작성ㆍ발송하기 전에 미국 친우들과 파리강화회의 대표단 책임자인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의 의향을 타진했고,

    4) 안창호는 국민회 중앙총회 ‘행정위원회’를 소집하여 위임통치 청원문제를 논의ㆍ승인한 후 승낙서를 정한경에게 공문으로 보냈으며,

    5) 이상의 과정과 절차를 모두 끝마친 후 국제법 전문가인 이승만의 최종 검토ㆍ수정작업을 거쳐 양인이 서명했음을 알 수 있다.

    한 장은 1918년 11월 25일에 윌슨대통령에게 보냈고, 한 장은 동년 12월 10일에 합중국 상원의원에게 보낼 때에, 나는 한국과 중국에 있는 유력한 친우들과 여러 만국공법(萬國公法) 율사들의 의향을 참작하여 가장 편리한 것을 따라 윌슨대통령께 보낸 것이라. 각하(현순:필자)가 기억하는 바와 같이 이는 독립운동이 발생하기 이전의 일이라. 그때에 미주나 유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인들이 일인의 관할을 만족하게 여기는 줄로 생각하여 독립이라는 말은 입에도 올리지 못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때) 모든 권고를 받는 가운데 중국정부의 정치고문으로 있는 젠크씨는 우리가 먼저 미국대통령에게 한국이 현금 일인의 관할에서 벗어나서 불원간 완전독립을 확실히 담보함으로 국제연맹회 위임 하에 두기를 청원하라고 권고하였다. 이는 그때에 미국대통령이 국제연맹회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권고를 미국의 유명한 이들과 중국과 한국의 여러 친우들에게 받았고, 또 나는 그때에 국민회 회장 안창호씨에게 편지를 하였소이다.

    각하와 내가 일체로 국민회 대표원이 된 고로 하와이 지회까지 포함된바 우리가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두령 되는 주임자와 의론하는 것이 마땅하겠기에 내가 어떻게 할 것과 미국 친우들의 의향이 포함된 회답을 받은 중 안창호 씨가 행정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사건을 결정 처리한지라. 국민회 임원회에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을 작정하였으니 곧 한국이 일본의 관할에서 벗어나서 불원간 완전독립을 확실히 담보함으로 국제연맹회 위임통치 하에 두기를 청원하라는 공함이 온지라. 나는 즉시 가서 청원서를 준비하였으니 기록된 일자와 같이 이는 독립운동이 개시되기 전이라. (󰡔우남이승만문서:동문편󰡕 8, 「뎡한경씨의 편지」(1921.5.28),)

    2.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와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여운형은 청년당원들과 논의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를 파견하기로 하고, 미국 로녹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영어에 능한 김규식을 대표로 선정했다.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상해를 떠나 3월 13일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파리 시내 샤토당가 38번지 저택에 ‘강화회의 한국민대표단’(1919/4/13 이후 대한민국 주파리위원부)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외교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서두에 ‘1919년 4월 파리’란 문구가 들어간 다수의 독립운동 관련 서한과 문건을 제작하여 5월경에 끌레망소 강화회의의장, 윌슨대통령, 로이드 조지 영국수상 및 각국 대표단에 연이어 전달했다. 이때 김규식은 4월 5일자 영문의 위임통치청원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Ⅲ. 위임통치청원서의 내용과 독립화 방안

    1. 위임통치청원 구절 비교

     이승만과 김규식의 위임통치청원서는 형식면에서 첫째, 1919년 2월 25일자 이승만본은 영문으로 작성된 반면, 김규식본은 1919년 4월 3일자 국한문본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4월 5일자 영문본 등 2점이 남아있다. 이때 김규식본에서 가장 중요한 제13조가 국한문본과 영문본의 내용이 다소 다른 것은 청원서 접수자나 독자를 의식한 때문으로 보인다. 둘째, 전자가 2쪽의 서한 형식의 문건인 반면, 후자는 국한문본의 경우 1쪽짜리 문건이며, 영문본의 경우 13쪽 분량의 「해방을 바라는 한국인들의 요구사항이 수록된 비망록」 앞에 붙어있는 3쪽 분량이다. 본문의 분량은 전자가 후자보다 30% 정도 많은 편이며, 청원서의 논리적 일관성이나 정합성은 후자가 전자에 비해 떨어지지만, 위임통치청원의 주요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내용면에서 양자의 청원서는 첫째, 전자가 윌슨대통령을 대상으로 작성된 반면, 후자는 윌슨대통령을 비롯한 강화회의 참석 대표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다. 이로 인해 전자에는 후자에 없는 미국의 인도주의, 기독교 찬양논리, 일제의 기독교 탄압의 비인도주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 한국 독립이 미국의 국가이익에 부합한다는 논리 등이 포함되어 있다. 둘째, 양자의 청원서는 공히 일본의 국제조약 위반과 불법적 한국병탄 정책을 비판하고, 한국의 자주성과 독립의지를 강조하고, 극동과 세계에서의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논급하고, 마지막으로 위임통치를 요청한 점에서 동일하다.

    양자의 위임통치청원 대목을 비교해 보면, 전자가 국제연맹이 출범하는 민감한 시기에 국제법적 내지 국제정치적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여 한국독립에 필요한 면밀한 안전장치를 마련한 가운데 위임통치를 요청하고 있다. 이에 반해, 후자는 국제법이나 국제정세에 대한 면밀한 고려장치가 다소 부족한 단순한 형태의 위임통치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양자는 모두 일본이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감독국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한국이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서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누리고, 일정 보호기간 이후에 위임통치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는 단계로 나간다고 하는 발전 과정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논리구조를 갖고 있다고 평할 수 있다.

    <이승만ㆍ정한경본과 김규식본의 위임통치청원 구절 비교>

    이승만ㆍ정한경본

    김규식본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1,500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고, 또 이 회의에 모인 연합국 열강이 장래에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현재와 같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저희들의 자유 염원을 평화회의 석상에서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이루어 질 수 있다면 한반도는 모든 나라에 이익을 제공할 중립적 통상지역으로 변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조치는 극동에 새로운 하나의 완충국을 탄생시킴으로써 동양에 있어서 어떤 특정 국가의 확장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In the name of fifteen millions of liberty-loving Koreans, we earnestly petition you to present the accompanying memorial to the Peace Conference, and to espouse our cause of freedom at the Peace Table, so that the Allied Powers assembled at the Peace Conference will take such action as will free Korea from the present domination of Japan and place Korea under the mandatory of the League of Nations with the definite guarantee of complete independence in the future. The accomplishment of this will convert the Korean peninsula into a zone of neutral commerce to the benefit of all nations. It will also create a buffer state in the Far East which will help prevent aggrandizements by any single power and maintain peace in the Orient.)

    (<출처> 방선주,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235-239쪽.)

    (국한문 청원서)

    列强 諸邦이 如 其吾韓國에 同意를 與하야 永久 中立을 得케 할지면 我 韓人은 欣覩히 願함이니 單히 日本이 其間에서 優越權을 行使함만 不願함이라. (<출처> 독립기념관 자료실 소장자료, 자료번호 5-001103.)

    (영문 청원서)

    고유의 강한 민족적 감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이래 날이 갈수록 냉혹한 증오심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비록 일정 부분의 자유가 허용되었다고 하더라도 한국인들은 결단코 일본과 같은 이민족 지배 하에서 평화롭게 살 수가 없습니다. 일본이 감독국(a supervisory group)의 일원이 아니라는 조건 아래, 스스로를 일정한 보호 기간 동안 한국을 국제적 감독(international supervision for a probationary period)에 맡길 것을 바랍니다.

    (On account of the strong inherent racial feeling, which is growing more and more into a bitter hatred as the days go by since the Japanese occupation, Koreans could never live peacefully under an alien race like Japan even if a certain amount of freedom were allowed. Korea would rather submit herself to an international supervision for a probationary period, provided Japan is not a member of such a supervisory group.)

    <출처> Wilson Papers, Microfilm, Reel No.339, "To the International Peace Conference."

    2. 위임통치청원서에 담긴 단계적점진적 독립 구상

    이승만은 위임통치청원서에서 “장래 한국의 완전 독립을 보장한다는 전제 하에” 한국을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에 두어달라고 하였다. 만약 이러한 조치가 취해진다면, 한국은 극동에서 새로운 완충국으로 등장하여 세계 각국의 자유통상에 크게 기여하는 나라가 될 것이며, 동양에 있어서 특정 국가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저지하는 평화선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것이 이승만의 생각이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서에 나타난 궁극적인 메시지는 미국의 위임통치 하에서 일정 기간 한반도에 중립화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한반도의 위임통치를 맡아 행함으로써 한반도가 중립적 상업지대나 완충국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때 ‘중립적 상업지대’란 용어는 이승만이 프린스턴대학에서 국제법 분야로 받은 박사논문(“미국의 영향 하에 성립된 전시중립론”)의 핵심개념인 ‘중립교역’‘중립무역’‘중립교역의 자유’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개념이다. 이는 한반도에서 세력균형(‘均勢’)을 이루자는 것에 다름 아니며, 동시에 한반도 중립화를 달성하자는 것이다.

    위임통치청원서에 담긴 이승만의 중립화론은 1880년대 전반 유길준-김옥균이 제창하여 1900년대 초반까지 고종황제를 비롯한 대한제국 집권층이 국권수호방략으로 주목한 한국중립화정책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승만은 조선-대한제국의 중립화방안을 충실히 계승하여 가장 완결된 형태로 발전시킨 다음, 이를 1910년대 후반 국제적 상황전개에 맞추어 위임통치청원서에 담아냈다던 것이다.

    대한제국기에 옥중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에서 이승만은 대한제국 집권층의 한반도 중립화운동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항구적 태평을 누리는 영세중립국이 속국이나 보호국보다는 좋지만, 그러나 자유 활동하는 힘이 없어서 남과 부강을 겨루지는 못한다”는 생각에서 영세중립국을 반대했다. 또 그는 자주국권 확립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중립화를 통해 정권유지만을 도모하는 집권층을 질타하기도 하였다. 이를 보면 이승만에게 한반도 중립화는 경제적 부강을 가져오지 못하는 절름발이 영세화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은 결국 완전한 자주독립국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단계로서의 의미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독립정신󰡕 집필 당시에 이승만은 만국공법적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체하면서 세계 각국과 자유통상을 통해 국가를 부요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처럼 자유통상을 통한 국부의 확대는 완전독립의 중단단계로서 한국중립화문제를 고려할 때에 영세중립국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주요 논리로 채용되었다. 이를테면 이승만은 한국이 당분간 미국의 위임통치가 작동하는 중립적인 완충지대와 통상지대로 남아 세계 각국과 자유통상을 통해 국부를 증진시켜 독립의 기초를 닦자고 함으로써 자신이 지적한 영세중립국의 약점을 보완하려 했던 것이다.

    이승만정한경ㆍ김규식의 위임통치청원론은 국제여건이 한국독립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궁여지책이 아니라 미국의 전시중립론과 국제법에 대한 정통한 지식을 바탕에 두고 적극적으로 현실적 차선책을 강구하는 가운데 정립한 외교구국방안이었다. 윌슨대통령이 위임통치제도를 만들 때에 그 근본의도는 통상의 자유를 원리로 하는 세계적인 통상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때 최대의 장애물 중의 하나는 바로 열강간의 끊임없는 영토쟁탈전을 촉발시키고 있는 식민지문제였다. 바로 여기서 윌슨대통령은 식민지 해방을 위한 논리, 즉 민족자결주의(self-determinaion)를 제창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을 가장 적절히 반영한 것이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서였다.

    Ⅳ. 위임통치청원을 둘러싼 독립운동세력 간의 갈등양상

    1. 상해임정 출범 초기의 갈등 양상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사실이 하와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박용만 측근세력인 하와이 대조선독립단은 2차례나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전보를 보내 위임통치문제를 따졌다. 이때 청원서의 발송을 승인했던 안창호는 위로의 답전을 보낸 다음,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대조선독립단의 오해를 풀어주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하와이의 박용만세력은 한국독립운동가들이 몰려있는 원동 각지에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사실을 전보로 알리며 이승만을 비판하기에 골몰했다.

    1919년 4월 10일 밤 상해에서 임정 수립을 위한 독립운동가 회의가 열렸다. 이때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뽑자는 신석우의 동의가 있었으나 신채호가 “이승만은 위임통치와 자치문제를 제창하던 자이므로 국무총리로 신임키 불능하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때 그는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며 이승만을 비난했다고 한다. 이어 국무총리를 별도로 뽑자는 신채호의 발언과 후보자 3인을 추천하여 투표하자는 조소앙의 동의에 따라 추천된 이승만ㆍ안창호ㆍ이동녕 3인을 두고 투표한 결과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이는 아직 상해에서 위임통치 청원문제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큰 논란거리로 부각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위임통치 청원논란이 일시 수면 아래로 잠복하자 박용만세력은 다시 이승만을 공격하고 나섰다. 1919년 8월 29일 국치일에 박용만 후원단체인 하와이 대조선독립단 단원들과 대조선독립단의 자매기관인 태평양시사사 사장 조용하가 공동으로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강력히 비난하는 성토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이승만은 2월에는 국민회를 대신하여 한국이 열강의 보호를 받도록 상국(上國)에 애걸하더니 3월에는 국무경으로서 절대독립을 세계에 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미국에 보호를 요청한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이며 한 달 만에 갑자기 입장을 바꾼 것은 대통령의 체모나 자질이 없음을 입증한 것이다”며 강하게 질타하고 나섰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 국민회 대표로 미국정부에 우리나라를 미국 위임통치 아래에 두어달라고 애걸 청원한 자이니 때는 삼일운동이 일어난 해이라.…그 해에 이 사실을 자세히 파악한 이가 없었고 오직 의정원 석상에서 신채호 한 사람이 직언과 공평(公評)으로 이박사의 원수봉대설(元首奉戴說)을 강력히 반대했을 뿐이라. 그러나 당시 인심은 이를 알지 못하고 드디어 (대한)민국 제1대 원수로 봉대함에 이르렀다.…이에 태평양시사보 기자가 성토문을 만들고 하와이독립단이 성토를 개시하매, 상해, 북경, 서북간도, 노령 동지들이 점차 깨달아서 일제히 분기하여 분연히 성토하였다. (󰡔革新公報󰡕 창간호, 「臨時政府의 過去, 現在 及國 將來」, 1922.8;)

    2. 이승만의 상해 체류 시기의 갈등 양상

    1921년 1월부터 이승만이 상해에서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침체에 빠진 임정의 기능이 일단 정상화되고 독립운동이 황성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게 되었다. 당시 이승만의 해결을 기다리는 과제는 4가지였다. 첫째, 대통령제의 유지인가, 의원제의 채택인가 하는 제도변경의 문제, 둘째, 국내외 각지 독립운동단체의 분열을 극복하고 대동단결을 이루어야 하는 문제, 셋째, 반임정운동을 벌이고 있던 중국내 단체에 대한 대응책 내지 완화책 강구 문제, 넷째, 임정의 재정곤란 해소책 문제 등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임정이 지닌 태생적ㆍ구조적 한계로 인해서 애초부터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들이었다.

    1921년 1월 5일 대통령과 각원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국무회의가 열렸다. 각원들의 시정보고를 거쳐 이승만이 국제정세와 구미에서의 활동상황 등을 설명했다. 이어 국무총리 이동휘가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가 고창되던 때에 나온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과 정한경의 자치론은 외교상 실패이며,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현혹시킨 행동이다. 이로 인해 사회의 비난이 정부로 밀려들고 있다”며 이승만의 외교독립노선을 공격하고 나섰다.

    임정 내에서 위임통치 청원문제로 반이승만 기류가 강해지고 있는 가운데, 1921년 2월경 상해-북경 일원에서 본격적인 반임정ㆍ반이승만 활동이 태동하고 있었다. 2월 중순경에 박은식ㆍ최동호ㆍ원세훈 등 14인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이들은 “전국민의 의사에 의한 통일적 정부조직을 수립하고, 여러 방책과 힘을 모아 독립운동의 최고 방침을 세울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이를 위해 노령, 간도, 북경, 상해의 반임정 세력과 연대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런데 여기에 서명한 인사들은 대부분 박용만이 연해주에 머물 때에 관계를 맺은 인사들이기 때문에 이들의 반임정운동은 반이승만활동에 다름 아니었다.

    1921년 4월 24일 박용만이 주도하는 북경의 군사통일회의는 “이승만 등의 매국매족죄를 성토하고, 상해임정과 임시의정원을 불승인하고, 이승만과 임시정부가 시행했거나 시행할 시책을 모두 무효로 돌린다”는 과격한 전보를 상해임정으로 보냈다. 27일 군사통일회의는 대표 신성모를 상해로 보내 내지국민공회 대표 박용만 등 17인의 공동명의로 임정과 의정원을 불신임하는 내용의 통첩을 전달했다. 거기에는 “임정은 위임통치사건을 일으킨 이승만을 수령으로 삼았으니 존재이유가 없으며, 임시의정원은 위임통치사건의 주모자인 국적(國賊)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그 연루자 안창호를 노동국총판으로 선임했으니, 이는 위임통치청원을 묵인한 것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했다.

    1921년 5월에 접어들어 군사통일회의는 다시 반임정ㆍ반이승만운동을 거세게 펼쳤다. 군사통일회의는 4월 27일자 통첩보다 비난 강도가 한층 높아진 선언서와 성토문을 내외에 발표했다. 원동 각지에 배포된 5월자 선언서와 성토문은 그야말로 이승만을 이완용ㆍ송병준과 동일한 매국역적으로 각인시킨 문건이었다. 후자의 문건들은 사실을 교묘하게 왜곡하거나 악의적으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이승만에게 매우 불리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위임통치청원이 3ㆍ1운동 이후에 나온 것처럼 왜곡하여 기술했고, 위임통치청원으로 미국민의 대한독립 후원의지가 약화되었다고 했으며, 위임통치청원이 나오자 일본이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했다며 한국민 탄압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하였고, 이승만이 위임통치청원서를 미국정부에 직접 제출하여 한국민을 팔아먹으려 했다는 등등의 내용들이 실려 있었다.

    근래 상해에 음흉한 말이 나돌고 있는데, “어떤 청년이 대통령(이승만:필자)을 구타하고 이완용과 같다고 질책하였다”고 하며, 또 “대통령이 소학교에 같더니 어린 아이들이 이완용과 같은 놈이라고 하며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여 대통령이 돌아갔으며 세 번을 그같이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그 사실을 은밀히 탐문해 보니 허무한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잘못 전해진 말이 각지에 전파되면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사람도 있을 듯합니다.

    또 일본 신문이나 한국 신문에 각하가 도망했다고 악선전하며, 중국인이나 서양인에게도 이같이 전하며, 이선생은 위임통치를 주장한 사람이라고 선전하여 내외의 신망을 추락시키고자 하는 모양입니다. (중략)

    이러한 음흉한 유언비어로 악선전하는 중이며, 북경에서는 성토문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또 내외에 악선전하며, 각하가 3월 1일 이후에 위임통치를 청원했으며 지금도 위임통치운동을 하는 중이라 하며, 1910년에 한국 주권자가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과 이모(이승만:필자)가 한국통치권을 미국에 위임하기를 청원한 것은 다 동일한 의미요 동일한 해석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 북경에 재류하는 청년이나 한국에서 새로 상해로 건너온 청년들은 이를 잘못 듣고 도리어 이를 다시 널리 전파하는 중입니다. (󰡔이승만 동문 서한집󰡕 하, 장붕->이승만(1921.6.18))

    위 기사에 나오는 의열청년들의 이승만 구타설, 소학교 방문 시의 봉욕설, 이승만의 하와이 도주설, 위임통치청원의 지속적 추진설, 한국 통치권의 미국위임설 등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승만 타도를 목표로 하는 이러한 온갖 거짓 소문들이 중국을 비롯한 원동 각지에 널리 퍼져나가는 상황 속에서 이승만과 그의 지지자들은 나름의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위임통치청원 비판에 대한 이승만세력의 반박

    1921년 4∼5월경 상해-북경 일원에서 박용만을 위시한 무장투쟁론자들은 반임정ㆍ반이승만을 목표로 위임통치청원 반대운동을 거세게 벌였다. 이때 이승만의 적대자인 박용만이 주도하는 북경의 군사통일회의는 이승만ㆍ정한경의 위임통치청원 관련 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하면서까지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게다가 하와이에서는 이승만의 지지자였다가 적대자로 돌아선 현순이 수차의 성명서를 통해 위임통치 청원문제를 거론하며 이승만을 강력 비판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원동과 미국의 이승만세력은 권위와 위상에 심대한 상처를 입었다.

    위임통치문제에 대하여 많은 인사가 불평하고 반대운동을 시도하므로 착오는 착오로써 전하여지고,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 씨 등이 이완용ㆍ송병준이 왜놈에게 팔아버린 국가와 민족을 거듭 미국인에게 전매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칭하고 있다. 또 말하기를 재작년 3월 1일 독립선언 후 2천만 민족이 피와 눈물로써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싸움을 계속하면서 적의 기반을 벗어나려고 하는 인민을 도리어 미국에다 인질로 하였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이를 전파하려고 하는 욕망을 달성시키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는 민족의 적이다. 제2의 이완용, 제2의 송병준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고, 또 만일 하루아침에 미국이 나와서 우리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이 청원하는 위임통치를 실행하려 한다면 그때에는 누가 나서서 이를 막을 것인가 라고 공격하고 이를 내외에 선전하는 자가 있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3󰡕, 국사편찬위원회, 1973, )

    무릇 전일에 박용만 씨가 이 문제를 가지고 하와이에서 불평운동을 시도했으나 뜻대로 진행되지 못했으며, 이번에 또 김규식 씨가 이를 시도한 것은 선생(안창호:필자)께서 이미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처음 제가 이박사와 함께 국민회 대표로서 파리로 가려 하다가 끝내 가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당시의 정세에 의하여 위임통치문제를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하고자 하여 선생께 문의했습니다. 그때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임원회에 이를 제출하여 가결했으니 그대로 행하라는 인가장(認可狀)을 저에게 보내오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받은 후 1919년 2월 25일에 이 문제를 미국대통령 윌슨 씨에게 제출했으며, 위에 기록한 여러 원문은 저의 수중에 있습니다. (󰡔우남이승만문서:동문편󰡕 7, 「정한경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Ⅴ. 맺음말

    이제까지 한국근대사 연구자들은 일제시기 독립운동사를 연구할 때에 온건론보다는 급진론을 더 중시해 왔다. 그들은 온건론에 속하는 외교독립론이나 실력양성론에 대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개량주의 노선에 불과할 뿐이라고 홀대했던 반면, 그 대척관계에 놓인 독립전쟁론이나 의열투쟁론에 대해 민족과 개인의 고귀한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고 호평하였다. 그러나 일제시기 한국실정과 국제정세를 감안할 때 전자가 후자에 비해 결코 저급했다거나 성과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해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한국인들의 외교독립론을 대표하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쟁점 중 하나인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론은 “장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분명한 전제조건 하에” 한국을 일정 기간 동안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어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급진적 혁명론을 주창한 신채호는 이승만을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신채호는 위임통치청원론이 한국여건과 국제정세를 감안한 단계적점진적인 독립구상이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거나 애써 무시했다.

    이승만은 위임통치청원서를 작성할 때에 국제법에 정통한 일부 외국인의 도움을 받았다. 또한 그 청원서를 윌슨대통령에게 제출하기 전에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와 기타 임원들의 승인을 받았다. 따라서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서는 미주 한인사회를 양분한 이승만계와 안창호계의 합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신한청년당 파리강화회 대표인 김규식도 파리강화회의 의장에게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국제연맹 출범기에 외교독립운동을 벌인 온건성향의 한국인들이 위임통치청원론을 독립구상의 일단으로서 공유하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론은 굳건한 독립정신과 냉철한 국제정세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이승만은 개화기 이래 민중계몽론을 주장한 근대지향적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미국식 민주주의, 기독교사상, 서양 근대문명 등을 한국에 이식함으로써 한국을 미국형 선진국가로 만들려는 계몽사상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정치개혁을 추진할 때 일정 기간 동안 일반 민중의 정치참여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로 친미적 엘리트의식이 강했다. 그는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와 미일간 우호관계 속에서 한국민이 자력으로 독립을 이루는 것은 당분간 힘들다고 판단하고, 약소국가에 가장 시혜적인 나라라고 판단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라도 한국독립의 기초를 마련해 나가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이승만정한경ㆍ김규식의 위임통치청원론에는 준비론적 외교독립론이 담겨있다. 그들은 1) 한국이 비교적 은혜로운 기독교 민주주의국가인 미국의 위임통치 하에서 일정 기간 동안 중립화를 달성하고, 2) 중립국 체제의 자치적인 정치환경에서 내치의 자유를 누림으로써 민주주의를 신장시키고, 3) 만국과의 자유통상을 통해 착실히 국부를 증대시켜 나감으로써 경제력을 굳건히 다지고, 4) 마지막 단계에서 미일전쟁의 발발과 같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활용하여 완전독립을 달성하겠다고 하는 점진적ㆍ단계적인 독립구상을 위임통치청원서에 담아냈다. 따라서 위임통치청원론은 그 비판론자들이 제기하는 바와 같은 무비판적인 친미적 사대외교론이 아니라 “독립정신에 바탕한 실력양성론적 외교독립론”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승만의 상해임정 대통령 재직 시에 벌어진 위임통치 청원논쟁은 위임통치청원서의 내용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상태에서 전개된 것이다. 한국독립운동가들은 위임통치청원론을 독립운동계의 고질적 병폐인 패권다툼의 소재로서만 활용했을 뿐이며, 그것을 깊이 분석하여 그 장점을 한국의 신국가 건설전략에 채용하겠다고 하는 전향적 태도를 갖지는 못했다. 한국독립운동계에서 위임통치 청원논쟁은 위임통치청원의 합목적성에 대한 진지한 검토나 논쟁이 수반된 것이 아니라 적대적 경쟁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패권다툼의 소재로만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아쉽다고 하겠다.

    위임통치 청원논쟁 당시 이승만을 이완용과 같은 매국역적으로 몰아간 것은 박용만세력이다. 이승만 등의 위임통치청원론을 가장 먼저 비판했을 뿐 아니라 꺼져가던 위임통치 청원논란에 다시 불을 지핀 것도 박용만세력이었다. 양측의 패권다툼은 1910년대 중반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면서 뚜렷이 갈라진 노선갈등에 기인한다. 외교독립론과 실력양성론을 추구한 이승만과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여 동포들에게 무장군사훈련을 시키며 독립전쟁론을 주창한 박용만은 인적ㆍ물적 자원이 한정된 좁은 하와이땅에서 양립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이들의 선명히 대비되는 사상투쟁은 1921년 봄-여름경 한국독립운동계의 최대 이슈로 떠오른 위임통치 청원논쟁을 빚어냈다.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제도는 국제연합의 신탁통치제도와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양자 공히 전후 피식민지 처리방안으로 고안된 장치이다. 해방 후 한국은 3년간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는데, 이는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은 것이나 진배없다. 다시 말해 한국이 위임통치에 해당하는 미국 지배를 3년간 받은 후에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해 남한만의 자주적 민족민주국가를 수립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한국은 신탁통치 하에서 인민들에게 민주주의를 교육시켜 민력을 키우고 인민의 자유선거와 만국과의 자유통상을 통해 신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세계사상 유례없는 성공신화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위임통치와 같은 신탁통치를 거쳐 부국강병을 달성한 근대국가로 성장해나갔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무장투쟁론을 중시한 급진적 독립운동가들은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을 매국노라고 비판했지만, 그러나 한국현대사의 진로는 이승만이 구상하고 내다본 궤적을 밟으며 나아갔음을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