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끝없는 도전 ⑲  

     1905년 8월 4일 오후3시, 나와 윤병구는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터베이에 와 있다. 우리가 앉아있는 곳은 세거모어 힐의 대기실. 루즈벨트의 저택인 것이다.

    세거모어 힐(sagamore hill)은 루즈벨트의 여름용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3층짜리 대저택이다. 내 손에는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이 다듬어 준 청원서가 들려 있었으며 우리 둘은 플록코트에 실크해트까지 갖춰 입었다.

    우리가 루즈벨트를 만난다는 소식을 들은 먼 샌프란시스코의 동포들이 옷을 갖춰 입으라면서 1백불을 송금해주었기 때문이다. 동포들의 열망은 대단했다. 유학생들은 내 비중을 높여주려고 나에게 대한제국 유학생 대표 자격을 주었으며 모든 조선인 단체들도 연합해서 우리들의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다만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의 대리공사 김윤정만이 좌불안석이었다. 워싱턴을 떠나기 전에 내가 예의상 전화를 했는데도 받지 않았다. 이미 일본 대사관측도 다 알고 있었지만 직접 연락을 받기가 겁이 난 것 같다. 비겁한 자의 본색은 이럴 때 드러난다.

    「자, 신사분들. 들어가실까요?」
    비서관이 들어와 말했으므로 우리는 일어섰다.

    긴장한 윤병구의 얼굴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져 있다. 아마 내 얼굴도 비슷했으리라. 나는 그 순간이 조선 민족의 운명을 결정 짓는다고 믿고 있었다.

    비서관은 우리를 이층 복도 끝의 방으로 안내했는데 그 곳이 대통령 집무실이었다. 책상에 정장 차림으로 앉아있던 루즈벨트가 우리를 보더니 환한 웃음을 띄우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오시오. 여러분.」
    두 팔을 벌린 루즈벨트가 우리와 차례로 악수를 나누더니 자리를 권했다.

    비서관이 뒤쪽에 의자에 앉았고 루즈벨트는 우리 둘을 정면으로 보는 위치였다. 의례적인 인사를 마쳤을 때 루즈벨트가 바로 묻는다.

    「하와이의 조선인 미국 시민이 5천명이나 된다면서요?」
    「8천명입니다. 각하.」
    내가 들고 온 청원서를 루즈벨트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나는 떨리는 내 목소리를 들었다.
    「조선인 미국 시민이 각하께 드리는 청원서를 갖고 왔습니다.」

    이제는 정색한 루즈벨트가 청원서를 받더니 안경을 썼다. 그리고는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청원서 내용은 일본의 한국 침탈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한 것이었다.

    일본이 작년인 1904년 3월에 조선주차군을 설치하여 대규모 군대를 들여왔으며 7월에는 군사경찰제를 시행하면서 일본은 조선 땅을 지배했다. 그리고 8월에는 한일협정서를 강제 체결하여 외교, 재정권을 박탈한 사례를 청원서에 조목조목 지적한 것이다.

    방안에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정적이 덮여져 있다. 나는 청원서를 읽는 루즈벨트 얼굴에서 일어나는 어떤 움직임도 놓치지 않을 듯이 주시했다. 이윽고 루즈벨트가 청원서에서 시선을 들었다. 굳어진 표정이다.

    루즈벨트가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이 청원서를 대한제국 공사관에 주셔서 미국 국무부로 전해지도록 해 주시지요. 정식 절차를 받으시면 적극 검토해 보겠습니다.」

    이보다 더 한 대답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순간 나는 벅차오르는 감동으로 이를 악물었고 옆에 앉은 윤병구는 흐느낌같은 숨을 들이켰다.

    내가 겨우 말했다.
    「감사합니다. 각하. 실은 제가 대한제국 황제의 친필 밀서를 품고 지난 2월에 헤이 장관을 만난 사람입니다. 그 밀서에도 황제는 1882년 조선 미국 수호 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대한 지원을 간곡히 부탁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