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끝없는 도전 ⑬  

     1905년 5월 27일의 동해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대장이 이끄는 일본군 연합 함대는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상장 지휘하의 러시아 발틱 함대를 전멸시켰다.

    숫적으로 우세했던 러시아 함대가 21척의 전함과 순양함이 침몰한 반면 일본 연합함대는 수뢰정 3척만 침몰되는 대전과를 이룬 것이다.

    평소 도고 대장은 조선 해군의 명장 이순신을 존경 해왔다고 전해져 왔다. 동해해전은 러일전쟁의 승자와 패자를 분명하게 대내외에 공포한 셈이 되었다. 

    「대승리요.」
    대리공사 김윤정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역사상 이런 대승전은 없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물었더니 김윤정은 잊었다는 얼굴을 짓고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얼굴에는 어색한 웃음기로 덮여져있다.
    「그렇지요. 이순신 다음이 되겠습니다.」
    도고 대장이 제 입으로 이순신을 존경한다고 했으니 부정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대사관 2층 김윤정의 숙소 안이다. 오후 6시여서 나는 태산을 보고 나가려는 참이다.
    태산을 맡긴 처지에 저녁식사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태산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온 내가 태산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태산의 맑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산아, 내가 며칠 후에 널 데리러 온다.」
    「아버지하고 같이 삽니까?」
    태산이 물었으므로 나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 하지만 곧 같이 살게 될게다.」

    태산을 올려 보낸 내가 공사관을 나왔을 때 김일국이 따라 나왔다.
    「선생님, 이제 러시아가 날개 잃은 새가 되었으니 대한제국은 일본의 속국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김일국의 표정과 말은 김윤정과 정 반대다. 마치 친족의 상을 당한 것처럼 기가 죽었다.
    나도 머리를 끄덕이며 길게 숨을 뱉았다.

    「루즈벨트가 강화를 주선한다고 했으니 곧 전쟁을 끝내겠지. 러시아는 물론이고 일본도 전쟁을 더 이상 끌 수 없을테니까.」
    그리고는 덧붙였다.
    「대한제국을 일본에게 넘긴다는 합의를 할 것이네.」
    「미국이 도와주지 않을까요?」
    김일국이 묻자 나는 걸음을 멈췄다.

    흐린 날씨였다. 대기에 습기가 배인 것이 비가 내릴 것 같다.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필리핀을 일본이 건드릴까 불안해하고 있어. 아마 필리핀을 일본이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대한제국을 일본에 넘길지도 몰라.」
    「대한제국은 전리품이 되겠습니다.」
    「약소국은 어쩔 수 없어.」
    길게 숨을 뱉은 내가 다시 발을 떼었다.

    「그것에 서럽다고, 분하다고 외칠수록 바보가 되네. 강자만이 살아 남는거야. 그러니까 힘을 길러야 돼.」
    갑자기 목이 메인 내가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된 현실이 분했기 때문이다. 분개할수록 바보가 된다고 방금 말해놓고는 나도 어쩔 수 없다. 왜 대한제국은 이렇게 전리품이 되었는가? 과거에 대한 투철한 반성 없이는 결코 재기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기숙사 건물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7시 반이 되어 있었다.
    어두워진 현관 안으로 들어섰던 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구석의 나무 의자에서 일어서는 하루코를 보았기 때문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하루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 순간 무거웠던 내 몸이 가뿐해진 느낌이 들면서 머릿속이 맑아졌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루코의 목소리도 밝다. 더구나 조선말이다.